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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끝나고 다시 찾아가겠습니다.”
심장이 쿵 떨어졌다.
“그때, 다시 황제로서 당신에게 나를 제안하겠습니다.”
케이든은 예의 수려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며 태연하게 말했다. 마치 내일 어디 놀러 가자고 예고라도 하듯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였다.
“뭘 그렇게 놀라십니까.”
한쪽 입꼬리를 느슨하게 올리며 웃는 모습은 쓸쓸했지만 자신감에 차 있었다.
“보내 드린다고만 했지, 찾지 않겠다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해서 문제 될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만……”
농담도 격정 가득한 절절한 고백도 아닌, 그의 담백한 고백에 로하나는 아무 반응도 하지 못했다. 방금 전까지도 치열하게 머릿속을 헤집던 고민이 딴 나라 이야기처럼 멀게 느껴졌다.
“미리 말하지 말 걸 그랬네요. 이렇게 얼어붙을 줄 알았으면.”
케이든이 아무렇지도 않게 몸을 일으켰다. 그새 한참 어두워진 정원에 선 그는 손을 내밀었다.
“가시죠. 늦었습니다.”
로하나는 아무 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손을 잡았다.
지금은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도 침묵만으로 충분한 듯했다.
차가워진 저녁 바람에도 봄기운이 깃들어 있어 그럼에도 괜찮았다.
*
“오랜만이에요.”
낭랑한 목소리가 울러 퍼졌다. 전혀 오랜만이지 않았다. 사실 아주 지나치게 자주 보고 있을 정도였으니까.
“네. 앉으시죠.”
오렐리아는 R. D.의 상징인 검은색 망토를 입은 채 금발을 높게 올려 묶고 있었다. 그녀가 경쾌하게 자리에 앉자 머리카락이 찰랑 흔들렸다.
프란츠는 그 옆에 건들거리며 앉았고, 이미 앉아 있던 케이든과 히스는 별 반응 없이 둘을 응시했다.
“먼저 얘기할게요.”
계속하라는 듯 케이든이 고개를 까딱했다.
“제가 어떤 신분인지 설명하지 않아도 여기 계신 분들은 잘 아시겠죠.”
쓸데없는 말이 길어진다는 듯 케이든이 미간을 좁히며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그런 시선에도 개의치 않으며 오렐리아는 계속했다.
“이미 노프탈이 샤톤웰을 지원하면서 황궁과는 어색한 사이가 되어버렸잖아요? 제 생각에……. 아니 우리 R. D. 생각에는 이 기세를 몰아서 우리 편은 확실히 우리 편으로 잡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지금 바로 요점을 말하지 않으면.”
“저는 수도로 갈 겁니다.”
“뭐라고?”
오렐리아의 말에 히스는 어이가 없다는 듯 반문했고, 케이든은 쯧 하고 혀를 찼다.
“간다는 게 무슨 뜻이지?”
“말 그대로 가서 세력을 규합하겠다는 거예요.”
로하나는 알겠다는 듯 그녀를 가늘어진 눈으로 바라보았다.
“단순히 카르크족이라는 이유만으로 사랑하는 남자에게 짓밟힌 갸륵하고 가여운 전 황후.”
로하나의 말에 케이든이 의자 깊숙이 몸을 기댔고 오렐리아는 고개를 조금 치켜들었다.
“자금줄을 더 확보하기 위함인가요?”
케이든이 일전에 하노버 공작가가 관리하던 상단 중 대다수를 끌어들이며 전쟁 자금을 준비했다는 것을 알고 로하나가 미루어 짐작해 묻자, 오렐리아도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몰라서 묻는 건데, 이 전쟁에서 수도의 자금이 얼마나 필요한가요?”
“자금은 있을 만큼 있어. 여기 프란츠가 남부까지 잡고 있고.”
케이든이 빠르게 대답했다.
“무시할 일은 아니지만, 지금은 굳이 때가 아니야.”
케이든이 딱 잘라 말했다.
“R. D.의 결정이에요.”
“쓸모없는 일이야. 수도의 돈줄들이 널 신경 쓸 거라고 생각해? 어차피 대부분이 아린족이야. 결국 넌 카르크고.”
히스의 말에 잠깐 불편한 침묵이 흘렀다.
“어차피 R. D.의 단독 행동이고 내가 반대한다고 해도 강행하겠다면 마음대로 해.”
케이든의 말에 오렐리아가 눈썹을 움찔했다.
“아직 더 중요한 사안이 남아 있는데. 이야기 안 끝났어요.”
“뭐가 더 남았지?”
“저에게 동행자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럼?’ 하는 얼굴로 케이든이 턱을 들어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로하나 델클리프 공작 부인도 함께하셨으면 해요.”
순간 모두의 시선이 로하나에게로 쏠렸다. 단 한 명, 케이든 델클리프만 제외하고.
그는 아까보다 수 배는 차가워진 눈으로 미동 없이 오렐리아와 프란츠를 번갈아 노려보았다.
“저요?”
“여기 저희와 함께하기로 하신 거 아니었나요?”
오렐리아는 일부러 뜸을 들이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그렇지만, 로하나 님은 ‘델클리프 공작 부인’ 아니셨던가요?”
로하나는 조디의 일이 있은 직후 그녀와 마주쳤던 순간을 떠올렸다. 그 당시 황후였던 그녀는 그런 로하나의 도발에 따귀까지 올려 붙일 정도로 발끈했었다. 로하나는 입을 꾹 다물며 미소를 지었다.
“카르크족이 아린족에게 카르크족을 위한 싸움에 동참하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오렐리아가 말을 이었다.
“카르크족의 편에 선 아린족이 설득하면 이야기가 다르지 않겠어요?”
로하나는 가만히 그녀의 이야기를 들었다. 카르크족이 당하는 부당한 슬픔은 유모 사건부터 오늘 이때까지 사무치게 깨달았다.
어째서 마력자들을 그렇게까지 핍박해야 했는지. 도대체 선황제는 무슨 생각이었는지. 그 통일 전쟁이라는 게 과연 무엇이었는지.
한때는 시어른으로 모실 뻔한 그에게 지금이라도 찾아가 묻고 싶을 지경이었다.
“안 돼.”
케이든이 더 듣지도 않고 자리에서 덜컹 일어났다.
“공작님께 여쭌 것이 아닌데.”
“이 전쟁의 수장은 나다. 안 된다면 안 되는 거다.”
“아직 제가 대답하진 않았어요.”
“로하나, 당신도 가만히 있어.”
순간, 로하나의 미간이 좁혀졌지만 케이든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 냉정하고 험악했다.
“그까짓 자금 좀 대겠다고 네가 얼굴마담으로 나서는 것도 모자라 로하나까지 끌어들이겠다고.”
“전쟁은 결국 돈이랑 사람 싸움인데, 사람이 부족한 우리는 돈이라도 있어야죠.”
“로하나가 누구를 설득할 수 있을 리도 만무해. 말 같은 소리를 해야지.”
“설득할 능력이 없진 않아요.”
로하나가 조용히 덧붙이자, 오렐리아를 향해 있던 냉정한 시선이 로하나에게 와 꽂혔다.
“지금 능력 타령을 할 때가 아니야.”
“이 전쟁은 내가 연루된 일이기도 해요. 나도, 내 임무가 있다고.”
“당신의 임무는 조용히 지내다가 안전한 곳으로 피하는 거야.”
“누가 그걸 정했대요? 나는 들은 적이 없는데.”
둘 사이의 긴장감이 팽팽해지자, 히스가 불편한 듯 헛기침을 했다.
“개인적인 과거사도 그렇고, 파혼 건도 그렇고, 세린 공주 일도 그렇고, 칼라드리우스 건도 그렇고.”
로하나가 줄줄이 읊는데도, 케이든의 표정은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이건 나의 일이기도 해요.”
“로하나.”
“내가 무얼 하고, 하지 않고는 내가 결정해요.”
반박하기 어려운 간단한 명제에 케이든이 크게 숨을 몰아쉬었다. 맞는 말이었다. 그녀는 여기저기 흔들리는 것 같아도, 자기가 할 일을 결국 밀고 나가는 여자였다.
로하나 하노버가 그런 사람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케이든은 결국 항상 그녀에게 무엇이든 강요하게 되고 말았다.
“잠깐 나오시죠.”
케이든의 말에 로하나도 덜컥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부부는 빠르게 여러 내실을 거쳐 작은 회의실로 걸음을 옮겼다.
“뭡니까.”
“뭐가요.”
“당신하고 나는 이 전쟁에서 함께할 수 없습니다.”
로하나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지만 케이든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로하나는 더 물러설 곳이 없다고 생각해 말을 내뱉었다.
“이럴 거면, 다시 찾아오겠다느니, 집착하겠다느니, 그런 말은 왜 하는 거예요?”
케이든의 얼굴이 냉정하게 굳었다.
“나의 안전 같은 소리를 하고 싶은 건 알겠는데……”
로하나가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그냥 그렇다고 말해 줬으면 좋겠어요.”
한층 누그러진 목소리에 케이든이 미간을 찌푸렸다. 못 들을 소리를 들은 양 갑자기 얼굴이 굳은 그는 아까보다 더 단호한 얼굴로 겨우 입술을 뗐다.
“당신은 나를 믿으면 안 됩니다.”
로하나도 잘 아는 바였다. 아주, 너무나, 오랫동안, 되짚어 왔던 사실이니까.
“안전 때문이 아닙니다.”
순간, 서늘한 기색이 케이든의 눈매를 타고 흘러내렸다. 높은 콧대에 진 그늘과 짙은 눈매의 그림자가 그를 더욱 위협적으로 보이게 했다. 뭔가를 단단히 결심한 얼굴이었다.
“그럼 뭔데요.”
로하나가 조용히 되물었다.
“전쟁 중에는 아린족인 당신을 지킨다고 약속할 수 없습니다.”
저도 모르게 케이든에게 기대했던 로하나의 마음에 쩍, 하고 금이 갔다.
그렇구나.
원작에서 그에게 속절없이 죽던 로하나가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원작에서의 케이든도 무시무시하게 냉정한 흑막이긴 했어도 잔인한 성정은 아니었다.
이겨야 하는 전쟁을 위해서였을 것이다. 죽여야 했기에 죽였을 뿐. 어쩌면 원작의 케이든도 그녀를 죽이며 가슴 아팠는지도 모른다.
그때였다.
복도 멀리에서부터 심상치 않은 소리가 들려왔다. 여러 사람들의 다급한 구두 발자국 소리였다. 이어서 케이든과 로하나를 찾는 듯 문이 쾅쾅 열렸다.
“케이든!”
히스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뭐야.”
갑옷 같은 모습을 조금 누그러뜨린 케이든이 문을 열며 물었다.
그런데 분위기가 이상할 정도로 어두웠다. 로하나도 긴장한 채 굳을 정도였다. 케이든은 그녀 앞을 막아서며 물었다.
“뭐야.”
히스의 얼굴이 심상치 않았다. 왜 이렇게 놀란 얼굴인 거지?
로하나의 시선이 그 뒤에 있는 붉은 옷의 사신을 향했다.
황궁이었다.
“직접 전달드립니다.”
붉은 옷을 입은 황궁의 기사는 무릎을 꿇으며 검은 인장으로 마무리된 황금 두루마리를 케이든에게 올렸다. 로하나는 서둘러 주위를 둘러보았다. 오렐리아와 프란츠는 몸을 숨긴 듯 보이지 않았다.
케이든은 천천히 그 두루마리를 풀었다.
검은 인장이 뜻하는 바는 로하나도 잘 알고 있었다.
맙소사.
〈선황제 콘스탄스 바르디 렌트워스 서거〉
그리고 이어서 기사가 읊는 편지에 로하나는 멍한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황제 폐하께서 델클리프 공작과 공작 부인을 장례식에 초청하시는 바입니다.”
도발적인 초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