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를 죽일 흑막과의 계약결혼-94화 (94/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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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왜 굳이 그 개죽음을 당하지 못해서 안달이지?”

로하나는 차분한 눈으로 에밀리에게 계속하라는 신호를 했다.

“하…….”

무례한 행동과 도발적인 말에도 덤덤해 보이는 로하나에게 에밀리는 질렸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더니, 결국에는 진심이 섞인 듯 조금 차분해진 목소리로 돌아와 말을 이었다.

“공작 부인께 뭐 좀 여쭐게요.”

“네.”

“알다시피 카르크족들은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이야기로 너무 잘 알아요. 아린족을 이기는 것이 가능했다면, 애초에 이렇게 되지 않았을 거란 것을요.”

“유모도…… 세실도 그렇게 생각했나요?”

“네.”

에밀리의 얼굴이 슬프면서도 묘하게 평화로워졌다.

“그러니, 공작 부인도 돌이킬 수 있다면 지금이라도 친정으로 돌아가요.”

로하나는 한쪽 눈썹을 치켜떴다. 친정으로 돌아간다라. 친정에서의 삶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굳이 죽을 위험에 일부러 처할 이유가 있어요? 너무 곱게만 사셔서 세상 무서운 걸 모르셔서 그런가, 정말.”

아까처럼 비꼬기보다는 진심으로 딱하다는 그녀의 목소리에 로하나는 빙그레 웃고 말았다.

“먼 길 오느라 고생했어.”

진심이었다. 굳이 이렇게까지 먼 길을 오게 할 생각은 없었다. 수도에 계속 있었을 줄은 몰랐다.

“필요한 만큼 쉬다가 돌아가.”

남아 있던 찻잔의 차를 다 마신 로하나가 끝맺음을 하고 자리에서 먼저 일어났다. 에밀리의 한숨 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저녁 노을이 빨갛게 내려앉고 있는 지평선 너머로 침엽수 그림자가 까맣게 대비되었다. 그때, 오랜만에 듣는 친숙한 목소리에 로하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레이디.”

밝은 하늘색 머리카락이 노을을 받아 붉은 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샤톤웰에서 돌아온 지 나흘. 프란츠 소예 후작과 오렐리아가 은신할 만한 저택을 구해 준다고 히스가 로하나 옆에 붙어 있을 시간이 없었다.

“히스.”

반가운 마음에 로하나의 얼굴이 대번에 풀어졌다.

“오렐리아와 프란츠의 거취를 알아봐 주셨다고요.”

히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어차피 R. D. 선에서 해도 충분한 일을 굳이 이렇게 저와 엮어서 하는 건.”

로하나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대신 이었다.

“세린 공주 건을 가지고 노프탈과 아주 단단히 연합하겠다는 작정이겠지요.”

히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그의 시선이 잠시 바깥에 서 있는 낯선 손님용 마차에 꽂혔다.

“에밀리와 벌써 이야기를 나누신 모양입니다.”

“네.”

로하나가 짧게 대답하자, 히스가 짐작했다는 듯 다시 말을 이었다.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히스의 질문에 로하나는 조금 망설였다. 대답을 하지 못할 내용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결국 이야기의 결론은 항상 하나로 귀결되었다.

당신은 여기 있으면 안 돼.

“그냥…… 확인하고 싶었어요. 왜 수도에 있는지, 왜 바르디 황제 편에 섰는지 궁금하기도 했고.”

아하, 하며 히스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케이든은 뭐라고 하던가요?”

“아직 이야기 못 해 봤는데요.”

샤톤웰에서 그렇게 돌아온 후, 로하나는 케이든이 의식적으로 모든 대화를 피한다고 느꼈다.

“브란드 하노버는 어떻게 지내고 있습니까.”

“잘 지내요. 방에 갇혀 있는 신세이긴 하지만, 저랑 낮에는 저랑 산책도 하고요.”

브란드 하노버의 처리를 두고 사안이 곤란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브란드는 끝까지 자기는 몰랐다고 주장했고, 로하나는 그런 그를 믿었지만 달리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더 이상한 건 바르디 쪽에서도, 드레고리 하노버 쪽에서도 아무런 연락이 없다는 것이었다.

버리는 카드라고 생각하기에 브란드는 그래도 하노버 공작가의 후계자였다.

버렸다기보다는 아무래도 타이밍을 잡고 있다고 보는 편이 타당했다.

“레이디. 그새 더 마르셨습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에 잠겨 있던 로하나를 깨운 건 다시 히스의 목소리였다.

“그런가요.”

빙긋 웃는 로하나를 히스가 답답하게 쳐다보던 차였다. 그때 정문에서 요란한 소리가 울러 퍼졌다.

케이든이 말을 탄 채 이즈, 갈레드, 그리고 몇 명의 수하와 함께 돌아오고 있었다. 석양빛이 비추자 유난히 짙은 얼굴선이 도드라져 보였다. 로하나는 멀리서 다가오는 그를 보면서 그야말로 최근에 더 말라 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오렐리아와 프란츠는?”

로하나를 보면서도 눈인사를 채 제대로 하지 않은 케이든은 히스에게 먼저 말을 건넸다.

“괜찮은 은신처를 마련했어. 대놓고 여기 있는 것보다는 그게 나을 테니까.”

“R. D. 상황은?”

“좋아지면 더 좋아졌지 나빠질 건 없더군.”

로하나는 둘의 대화를 팔짱을 낀 채 조용히 들었다.

“그 애와는 만났습니까.”

케이든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로하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늘 듣는 남자의 목소리에 처음이나 지금이나 긴장을 하는 것이 스스로 너무 어이가 없었지만, 로하나는 저도 모르게 긴장하는 제 자신을 풀어 주려 일부러 팔꿈치를 제 손으로 꾹 쥐며 쓸었다.

“들어가죠.”

케이든이 같이 들어가자고 제안하자, 로하나는 조금 놀랐다. 최근 들어 그런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날도 좋은데 밖에서 얘기하면 어때요?”

봄바람이 분다고 해도 아직 추운 노프탈이었다. 의외의 제안이었지만 케이든도 로하나의 시선이 닿은 하늘을 보고 이해했다. 꽤 괜찮은 석양이었다.

“여기.”

히스가 인사를 하며 물러나고, 케이든의 간단한 호령에 시녀와 시종들이 간단하게 덮을 담요와 그밖에 다과, 물 등을 챙겨서 가지고 나왔다.

원래라면 그러지 말라고 했을 로하나는 이번에는 별말 없이 가만히 그들이 챙겨 주는 시중을 받았다.

델클리프 공작저는 황궁과 달리 중앙에는 정원이 없었지만, 후원은 제법 잘 꾸며져 있었다.

“그래서 자료 조사는 잘 되었습니까.”

비꼬는 것인지 놀리는 것인지 애매한 그의 질문에 로하나는 입술을 꾹 닫았다. 다시 생각나는 샤톤웰 전투에서의 순간순간이 그녀를 괴롭혔다.

생겨난 크레바스 밑으로 황실군이고 왕국군이고 할 것 없이 수많은 사람들이 빨려들듯 떨어지던 광경.

그리고 같이 떨어지던 케이든까지.

로하나의 표정에 자기가 그렇게까지 심각한 질문을 했는지 조금 당황한 케이든이 미간을 좁히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로하나는 대답 없이 차를 마시려 찻잔을 들어 올렸지만 입술이 떼어지지 않았다.

‘요즘 왜 이렇게 저를 피하세요?’라는 질문도 차마 목을 타고 올라오지 못했다.

무슨 질문이 그런가.

언제부터 서로를 그렇게 애틋해했다고. 그럴 수 있는 사이가 아닌데.

“로하나.”

케이든이 다시 그의 오랜 버릇대로 그녀를 향해 몸을 좁혀 왔다. 늘 그렇듯 더운 기운이 그녀를 덮었다.

“네.”

“농담이 지나쳤습니까.”

케이든의 흑안이 그녀를 찬찬히 살폈다. 로하나는 그런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아니, 알고는 있었지만 믿을 수가 없었다.

이제는 다시는, 저런 눈에 속지 않기로 했었다.

“난 부인께서 원하시는 대로 부인과 편하게 지내려는 거였는데. 너무 부담을 드리면 안 되니까.”

케이든이 말을 이었다.

“어째 점점 얼굴이 어두워지시고, 말수도 없어지시고.”

케이든의 커다란 손이 로하나의 옆얼굴을 조금 가리고 있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로하나는 용기를 내 그를 다시 쳐다봤다.

“자료 조사를 열심히 했어요. 에밀리 덕분에 카르크족이 아린족을 얼마나 두려워하는지도 실감했고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케이든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아마 당신에게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돌아가라고 했겠지요.”

로하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좁혀진 미간을 보며 케이든은 조금 미소를 짓더니 긴 손가락으로 그녀의 이마를 쓸었다.

“심각할 것 없습니다. 우리도 서로 늘 한 이야기 아닙니까.”

‘알지만, 지금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게 아니잖아.’

로하나는 다시 튀어나올 것 같은 말을 눌러 담았다. ‘미드 섬머’에 떠나기로 한 건 그녀가 그녀 자신에게 한 약속이기도 했다. 어떻게든 이번에는 ‘혼자’ 살아남기로 했다.

프란츠 말이 맞았다. 여기 있으려면 여기 있을 이유가 있어야 했다.

여기 있지 않을 것이기에 고민하지 않으려 했다. 그런데 이게 뭔가. 수도에 있는 에밀리를 불러다가 끊임없이 상황을 파악하고.

칼라드리우스의 현신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샤톤웰 여왕 이슬라가 준 책을 읽고 또 읽었다.

그리고 고작 며칠 케이든과 말을 섞지 않은 것만으로도 이렇게 어처구니없이 가라앉는 자신을 보면서 로하나는 혼란스러웠다.

어른들의 연애 놀이. 딱 그 정도로 감당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미드 섬머 전에 가고 싶어서 그렇습니까.”

태연하게 술잔을 기울이며 석양을 응시한 채 하는 그 말에 순간 로하나는 말문이 막혔다.

“뭐라고요?”

“어쩌죠. 전에도 말했듯이 그건 나도 허락 못 하겠는데.”

케이든이 여전히 다정하지만 씁쓸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 후엔 나도 어쩔 수 없지만.”

그러더니 그는 익숙하게 그녀에게 다가왔다. 로하나는 그를 막아 세웠다.

로하나는 이 순간 정확히 알았다. 다정함에도, 아무 문제가 없는 말을 함에도 왜 이렇게 화가 나는지.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와 몸을 나누고 싶지 않아졌다.

끝까지 잡지 않는 사람이라면, 지금 끊는 것이 맞았다.

‘안 그랬다간 정말 내가 잡아먹힐지도 몰라.’

이미 먹혔는지도 모르겠지만 로하나는 정신을 붙잡았다.

“아…….”

다른 이유 때문이라고 생각했는지, 실례했다는 듯 케이든은 바로 몸을 떼어 내었다. 로하나는 변명할 거리를 열심히 생각했다. 그때 그녀의 눈에 정원수 사이에 있는 작은 문이 보였다.

“어, 저기 문이 있는 줄은 몰랐네요.”

순간 케이든이 당황하며 얼굴을 굳혔지만, 말을 돌리고 제 감정을 숨기느라 바빴던 로하나는 그걸 눈치채지 못했다.

“아, 예.”

“어떻게 꾸며 놓으셨어요?”

아무래도 이 공기를 깨려면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이 최선일 것 같아 로하나가 일어서는데, 두꺼운 손이 그녀를 붙잡았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냥 버려 둔 문이에요.”

“네?”

케이든 답지 않게 빠르게 중얼거리는 변명에 로하나는 뭔가 미심쩍었지만, 이내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때, 저 멀리서 인기척이 들렸다. 히스였다.

“실례합니다.”

너스레를 떠는 히스를 보며 케이든이 그만하고 본론을 말하라고 했다.

“내일 R. D.측에서 정식 회의를 요청했습니다. 델클리프 공작 부인께서도 꼭 같이 참석하시면 좋겠다고요.”

오렐리아와 프란츠의 방문이라.

로하나는 이렇게 저렇게 뭐든 더 알아보려고 했던 불과 몇 시간 전까지의 자신을 남처럼 생각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그들이 그녀를 원하는 이유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제 그녀는 다시 하나만 생각하기로 했다.

‘혼자 살아남기.’

그 이상을 생각하는 건 그녀에게 사치였고, 케이든 델클리프에게도 과한 일이었다. 그러니 이제는 그와 닿지 않게 조심해야 했다.

생각만으로도 갑자기 속이 욱신거려 로하나는 자기도 모르게 갈비뼈 안쪽을 속으로 누르듯이 쓸어내렸다.

어느새 해가 져 하늘은 짙은 푸른빛으로 무겁게 가라앉고 있었다.

“로하나.”

서둘러 일어나려는 그녀를 결국 그가 다시 붙잡았다.

“전쟁이 끝나고 다시 찾아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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