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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손자, 우리 아버지가 죽이려고 했었거든.”
선황제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모르는 줄은 몰랐네.”
바르디가 전에 없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선황제의 생기 없이 딱딱한 얼굴은 핏기마저 가시자 오래된 나무 조각 같았다.
“사실은 아셨으면서.”
순간, 선황제에게 그나마 남아 있던 위엄의 빛깔은 순식간에 잿빛이되었다.
“당신 아들이 어떤 사람인지 알면서도, 당신 아들을 직접 처벌하기에는 마음이 약해져 제대로 막지도 못했지요.”
바르디의 말에 선황제는 마른침을 삼키고는 헛헛해진 눈동자를 그에게서 돌려 버렸다.
“꼴랑 황태자 자리를 주지 않은 것 정도로 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바르디의 진심 어린 비난에 선황제는 새파랗던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도대체……. 무슨…… 소리냐…….”
“카르크족이 앞장서서 황족인 케이든 델클리프를 납치하다시피 노프탈로 데려갔고, 그 후로 이렇게 사이가 서먹해졌다.”
바르디는 책을 읊듯이 나지막이 읊조렸다.
“물론, 우리의 훌륭한 제국민인 케이든 델클리프는 그런 수모를 받고도 제국을 위해 카르크족의 수장 악스톤을 없앴고, 여태까지 동부를 지키는 든든한 역할을 하고 있다.”
선황제의 낮은 신음 소리가 바르디의 목소리를 멈췄다.
“그런 거라고 믿고 싶으시겠죠.”
둘의 눈이 다시 마주쳤다. 나이보다 훨씬 늙어 보이는 선황제와 나이보다 훨씬 어려 보이는 황제의 얼굴은 놀랄 정도로 서로 닮아 있었다.
선황제는 바르디가 내뱉는 말 자체보다 그의 말투에 더 놀란 것처럼 보였다.
제 사촌 형보다 훨씬 못난 아이였다. 능력적으로는 모든 면에서 뒤떨어졌다.
그럼에도 단 하나 볼 게 있다면, 제 아버지인 에드윈의 성정을 물려받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그 아비에 그 아들이다.”
바르디가 입을 떼자 선황제는 깜짝 놀라 몸을 떨었다.
“그렇게 생각하실 텐데, 아니요.”
바르디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떨렸다.
“그게 아니라……”
바르디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어두컴컴한 실내인데도 그림자가 져 그나마 빛이 비치고 있던 선황제의 얼굴에 그늘을 드리웠다.
“당신이 결국 이 사태를 만든 거지.”
달그락, 소리를 내며 바르디는 직접 제가 가져왔던 찻잔을 정리했다.
“애초에 카르크족을 끝장내지 못하고 아둔하게 둔 것.”
바르디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아무리 이기지 못했던 딸이라고 해도 그 딸이 카르크족하고 결혼해 끔찍한 혼혈을 낳게 한 것.”
선황제의 푸른 눈에 다시 한번 노기가 띠었다.
“제 아들이 그런 제 누나를 가만두지 않을 것을 예상하지 못하고, 그 집안에 무슨 짓을 했는지 이날 이때까지 몰랐거나 눈감았던 것.”
뒤에 있던 테이블에 찻잔을 내려놓은 바르디가 다시 몸을 돌려 선황제 침대 위를 굽어봤다. 굵은 팔로 지탱하면서 내려다보는 선황제는 어릴 때부터도 우유부단해 부족한 것이 너무 많았던 조부 그 자체였다.
그럼에도 그에게 인정받고 싶었고, 그럼에도 그가 두려웠었다.
바르디는 속으로 씁쓸하게 웃었다. 냉랭한 얼굴에는 미동도 없었다.
“전…… 전쟁은…… 안 된다…….”
선황제가 마지막 힘을 쥐어짜듯 말했다. 마른 손이 덥썩, 생각보다 놀랄 만큼 강한 아귀힘으로 바르디의 팔뚝을 잡았다.
“마…… 마력자들을…… 끝까지…… 이길…… 순…… 없어……”
“카르크족을 다 쓸어버리면 그 안에 마력자들도 다 죽겠지.”
바르디는 별로 힘을 들이지 않고 선황제의 팔을 뿌리쳤다.
“라…… 라자…… 르……”
몸을 돌려 나가던 바르디가 그 이름에 멈칫했다.
“뭐?”
“라…… 라자르를…… 조심……”
선황제는 말을 미처 다 마치지 못하고 기침을 했다. 쇠가 긁는 듯한 거친 기침 소리가 먼지 가득한 어두운 실내에 가득 울려 퍼졌다.
바르디는 인상을 쓰며 몸을 다시 돌아 세웠다.
두꺼운 문을 닫고 나오자 앞에 드레고리 하노버 공작이 기다리고 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것 같은 그는 머리를 조아린 채 황제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좀 서둘러야겠어.”
드레고리가 조금 놀란 듯 몸을 움찔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살려 둘 필요는 없을 것 같아.”
하고 싶었던 말들을 하고 났는데도 속이 시원해지지는 않았다.
이제는 그의 생존도 별로 중요하지 않다. 뭘 어쩌겠다고 저 목숨을 열심히 부지해 주었는지. 돌아보니 모두 부질없는 낭비였던 것 같아 바르디는 실소를 흘렸다.
“아…… 그렇지만.”
바르디는 조용히 고개를 갸웃했다.
“내 할아버지의 죽음이 곧 도움이 될 수도 있겠네.”
“어…… 어떤……”
그러다 질문을 하던 드레고리의 눈에도 일순 생기가 돌았다. 정확하진 않지만, 어쩔 작정인지는 알 것도 같았다.
그러다, 황제는 드레고리가 샤톤웰 전투 이후로 계속 두려워했던 질문을 던졌다.
“당신 딸은 누구를 닮아 그렇게 고집이 세지?”
“철이 없어 그렇습니다.”
드레고리의 뻔한 변명에 바르디는 미간을 찌푸렸다. 걸음을 옮긴 두 사람이 해가 닿는 복도에 이르자, 황제의 적갈색 머리카락이 반짝였다.
“자네 집안에 카르크족이 있었던가.”
드레고리는 기다렸던 질문에 아니라는 사실을 줄줄이 읊었다. 바르디는 천천히 그의 변명 아닌 변명을 듣다가 입을 열었다.
“아들 일은 안 되었네.”
브란드가 케이든 측에 인질로 잡힌 사실이 진심으로 가슴 아프다는 듯 과장된 말투였다. 드레고리는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걱정하지 마.”
드레고리는 고개를 들어 황제를 바라보았다. 태연한 그의 목소리와 달리 경멸이 가득한 얼굴은 케이든을 떠올릴 때 그가 항상 짓는 표정이었다.
“케이든은 그를 돌려줄 거야. 내가 케이든을 좀 알지.”
드레고리는 말이 없이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그런데 말이야.”
바르디가 화제를 돌렸다.
“혹시 라자르라는 자를 아나?”
황제의 다음 질문에 드레고리는 깜짝 놀랐다. 통일 전쟁을 경험한 세대라면 그 마력자를 모르긴 어려웠다. 정체도 뭣도 불분명한 그 존재.
“통일 전쟁 때, 마력자들의 리더였다고 들었습니다. 신출귀몰하고, 부족한 능력이 없었다고. 그렇지만 이제는 사망했을 텐데요……?”
드레고리가 아는 바로 그는 이미 그 당시 종적을 감추었었다. 전쟁 중에 사망했을 거라는 소문이 당시 겨우 소년티를 벗었던 드레고리가 아는 것의 전부였다. 그 사실까지 설명하자 바르디는 알겠다는 듯 손을 저었다.
“의사에게 전하게. 우리 할아버지, 더 이상 너무 고통스러운 삶을 오래 연명하실 필요는 없을 것 같다고.”
“네.”
드레고리가 다시 깍듯하게 고개를 조아리자, 바르디는 몸을 돌려 제 방으로 향했다. 수도에는 벌써 봄기운이 완연했다.
*
에밀리를 불러 주겠다는 케이든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녀는 어쩌면 당연하게도 아직 수도에서 지내고 있었다고 했다.
샤톤웰에서 온 지 꼭 나흘째인 오늘. 그녀 역시 수도에서 출발해 오늘 노프탈에 도착한다고 했다.
로하나는 오랜만에 돌아온 노프탈의 공작저에서 조용히 창밖을 바라보았다.
벨벳 장식에 스며드는 햇살에 봄기운이 담겨 있었다. 벌써 봄이었다.
그때, 바라보고 있던 창밖에 마차가 도착하는 것이 보였다. 노크 소리가 나기 전에 로하나는 몸을 돌려 손님을 맞을 다이닝 룸으로 향했다.
에밀리에게 확인할 것이 아직 남아 있었다.
“저를 부르셨다고 들었습니다.”
다이닝 룸에 막 도달한 에밀리는 예전에 만났을 때보다 제법 차분하고, 세련된 자세로 그녀에게 인사를 건넸다.
로하나는 앉아서 다과를 권했다.
“무슨 일로 부르신 것인지…….”
“수도에서 지내고 있다고 들었어.”
“네.”
“지내는 건 누가 봐주고 있는 것이지?”
단도직입적인 로하나의 질문에 에밀리는 조금 당황한 것 같았다. 전에 만났을 때에 비해 그녀가 조금 무섭게 자신을 대한다고 느껴졌다.
“미안. 따지는 것이 아니네.”
로하나는 얼굴을 조금 풀고는 심호흡을 했다. 시녀들이 내온 다과들이 단정했다.
“수도에 사는 카르크인의 목소리가 필요했어. 너라면 나에게 솔직할 것이라고 믿을 수 있었고.”
로하나의 말에 찻잔을 기울여 입술을 축이던 에밀리가 조금 멈칫했다.
“급하게 먼 길을 오게 한 건 미안해.”
에밀리의 눈이 로하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공작 부인은 참 특이하십니다.”
에밀리가 중얼거리듯 입을 열었다.
“끊임없이 뭔가 답을 찾으려는 사람 같아요. 사는 게 너무 여유가 넘치셔서 그런가.”
에밀리의 말에 로하나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저의 생활을 봐주고 있는 건 바르디 황제 폐하세요.”
예상했던 답변이었기에 로하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케이든도 널 봐줄 수 있었는데……. 왜 그쪽을 선택했는지 물어봐도 될까?”
에밀리는 조용히 제 손을 맞잡았다가 풀었다. 그녀답지 않게 조금 불편하고 초조해 보였다.
“저 원래 뻔뻔한 사람이니까 그냥 솔직하게 답할게요.”
“그걸 원해서 이렇게 먼 길을 부른 거야.”
로하나의 말에 에밀리는 조용히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나는 개죽음 당하고 싶지 않거든요.”
로하나의 미간이 조금 좁혀졌다.
“케이든의 도움을 받으면 죽임을 당할 거라고 생각해?”
“나는 바보가 아니에요. 언니나 엄마랑은 달라요.”
에밀리가 계속해서 다과에 손을 뻗어 입에 넣으며 말했다.
“진짜 전쟁은 아니지만 대놓고 샤톤웰 편을 든 델클리프 공작님이 황군과 정면으로 싸우게 되는 것도 시간문제라는 거 공작 부인도 잘 아시잖아요.”
“전쟁이 나면 제국군이 이길 거라고 보는 거야?”
“아뇨.”
에밀리는 냉정하게 말했다.
“왜 그렇게 단언하지?”
“카르크족은 다 알아요. 원래 때린 사람은 기억 못 해도 맞은 사람은 기억하거든. 아린족이 어떤 민족인지.”
침묵 끝에 로하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원작을 아는 로하나는 아린족이 카르크족을 압도적으로 이긴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말인데, 내가 알 바는 아니지만.”
에밀리는 이미 던져 버린 말 더 이상 거리낄 게 없다는 듯 쿠키까지 입에 털어 넣으며 말을 이었다.
“공작 부인.”
쿠키를 다 삼킨 에밀리가 처음으로 진지해진 목소리로 입을 뗐다.
“당신은 왜 굳이 그 개죽음을 당하지 못해서 안달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