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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땐 아는 척을 못 했지만.”
마침 돌아가고 있는 히스를 붙잡아 세운 프란츠가 술 한잔을 요청했다. 히스는 마뜩잖은 얼굴로 그 앞에 앉았다.
“나 기억 안 납니까?”
히스는 가만히 프란츠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그때 수도에서 정무 회의가 끝난 후 케이든에게 뭐라 말을 붙이던 그가 떠올랐다.
히스가 아아, 하는 얼굴을 하니 프란츠 소예는 만족스럽다는 듯 씩 웃었다.
“사실 그때 악스톤의 아들을 보다니 영광이라고 하려고 했는데, 그랬다가는 미친놈 보듯 할까 봐 말을 못 했네요.”
순간 숨이 멎은 듯 놀란 히스가 그를 바라보았다.
“네.”
히스가 짧게 대답하며 샷을 들이켜자 프란츠도 뒤따라 마셨다.
“레이디도 압니까?”
프란츠는 뭘 그런 걸 묻냐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당신이 악스톤의 아들이라는 것이요? 잘 모르겠는데.”
껄렁한 말에 히스는 재차 미간을 좁혔다. 무례한 듯 아닌 듯 모호한 선을 타는 화법이 영 불편했다. 아까 로하나를 붙들고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도 불안했고.
“왜요, 굳이 이 와중에 그걸 비밀로 해야 합니까?”
천천히 잔을 쓸던 히스가 질문을 던지며 대답을 피했다.
“후작께선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어마어마한 결정을 하신 겁니까?”
“로하나 공녀, 아니 공작 부인과 똑같은 질문을 하시네요.”
프란츠가 머리를 쓸어 넘기며 말했다.
“그건 노프탈에 가서 다 같이 술 한잔하면서 이야기해 볼까요? 하하하.”
실없는 소리에 히스는 고개를 저었다. 여기서 술잔을 비우면 일어날 명분이 생기니. 그리고 오늘은 어쩐지 술이 당겨서 히스는 무거운 술병을 기울였다.
“R. D.는 어떻게 돌아갑니까?”
질문을 던진 건 히스였다.
“아시다시피 라자르가 통솔하고, 오렐리아가 얼굴마담이 됐죠. 카르크들 사이에서 그녀를 동정하는 여론이 얼마나 큰지는 로하나, 아니 공작 부인에겐 비밀로 한 모양입디다.”
마른 얼굴을 살짝 찌푸리며 프란츠가 잔을 들고 있던 손을 바꾸었다.
“예.”
“그렇게 숨겨서 될 일이 아닐 텐데.”
“압니다.”
그러나 그녀는 ‘칼라드리우스’의 현신일지도 몰랐다. 아직 R. D.도 이자도 물론 모르는 사항이었지만.
만약에.
만약에 로하나가 아린족으로 돌아서기라도 한다면, 그럴 리가 없을 것이라는 이상하고 씁쓸한 자신감이 있었지만, 카르크족에게는 치명적인 위협이다.
“나도 질문 하나 해도 되겠습니까.”
물어보라는 히스의 푸른 눈빛에 프란츠가 말을 이었다.
“로하나와 공작께선 언제부터 저런 사이였습니까? 공작께선 그 정치적 부담을 안고 가신다고 해요?”
히스의 미간이 좁혀지다 못해 붙을 듯 깊게 구겨졌다.
“그 말을 레이디에게 했습니까?”
“부인께는…….”
프란츠가 “후.” 하고 한숨을 쉬었다.
“어느 편에 설지 스스로 아셔야 한다고 말씀드렸어요.”
뜻밖에 툭 털어놓는 솔직함에 히스가 한쪽 눈썹을 치켜떴다.
“어려서부터 이런저런 일로 자주 봤었습니다, 로하나 하노버 공녀일 때.”
프란츠의 목소리가 조금 멀어졌다.
“뭐라 설명할 수 없는 독특함이 있었어요. 모든 것을 다 받아들이고 견디는? 나랑은 완전 반대였죠. 그래서 어제오늘 모습은 저어어엉말 의외였지 뭡니까.”
히스는 턱 막히는 숨을 들키지 않으려 잔을 넘겼다.
“예전부터 잘 지냈으면 하는 친구였는데. 뭐 물론 저한테 친구처럼 대해 준 적은 한 번도 없지만.”
프란츠가 비스듬하게 자세를 바꾸며 말을 이었다.
“아까 둘이 그러고 나서 부인의 표정을 보니 걱정이 되더군요. 그래서 오늘 이야기한 겁니다.”
그러고 싶지 않았지만 히스도 그의 말에 속으로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뭐…… 그건 두 부부가 알아서 하겠지요.”
냉랭한 히스의 반응에 프란츠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제 잔도 마저 비웠다.
그때 저 너머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프란츠의 부하로 보이는 R. D. 조직원이 문을 열고 들어오더니 그 뒤로 자그마한 여인이 따라왔다.
“둘이서만 즐거운 시간 보내기야? 너무하네.”
오렐리아.
히스가 드륵, 의자를 밀며 일어났다.
“그럼 전 이만.”
프란츠가 히스를 붙잡으려는 찰나, 오렐리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
“히스까지 나한테 이러는 게 난 너무 이상해.”
황금빛 눈이 반짝였다.
“내가 여태까지 이렇게 살아 있는 게 내 눈치 덕분이잖아.”
천천히 또각또각 걸어오는 구두 소리가 낭랑했다.
“히스가 왜 나한테 이렇게까지 화가 났을까? 케이든은 그렇다 쳐도.”
가까워진 그녀의 키는 히스의 반이나 될까. 그 작은 몸에서 독하고 짙은 붉은 향이 뿜어져 나왔다. 히스는 그런 그녀를 가만 내려다보았다.
“꼭 다른 이유가 있는 것처럼 보여. 오해하겠어, 이러다가.”
듣고 있던 프란츠의 미간이 좁혀졌다.
히스는 평온한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러니 그런 오해하기 전에 오랜만에 우리 R. D.끼리 술 한잔할까?”
“난 이미 나간 지가…….”
“창시자의 아들께서는 그런 사사로운 것 정도에선 감면이 되셔야지.”
프란츠가 거들었다. 히스는 길고 가는 한숨을 내쉬었다. 오렐리아의 황금빛 눈동자가 어린아이의 것처럼 순진한 빛을 내뿜으며 반짝였다.
히스는 두통을 느끼며 자리에 앉았다.
*
어두컴컴한 실내는 시간이 멈춘 듯했다. 한때는 찬란한 햇살이 반짝반짝하게 만들었을 황금 장식들이 놀라울 정도로 빛이 바랜 채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선황제 폐하. 황제 폐하께서 드셨습니다.”
조용한 대신의 말에 지나치게 큰 침대에 누워 있던 작은 몸이 신음 소리 비슷하게 대답했다.
바르디는 천천히 몸을 움직여 침대 가까이로 다가갔다. 부디에르의 급한 전갈을 받고 수도로 달려오느라 고작 나흘이 걸렸을 뿐인데, 그는 소식보다 더 쇠약해져 보였다.
바르디는 천천히 제가 직접 들고 들어온 쟁반을 내려놓았다. 약차에서 김이 모락모락 올라왔다. 선황제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나뭇가지 같지만 여전히 전투의 상흔이 가득한 긴 손가락으로 약차를 마셨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선황제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전투가 있었다고……. 들었…… 다.”
푸르디푸른 선황제의 눈은 아직도 바르디의 것보다 더 밝아서 어두운 실내에서도 이상할 만큼 번뜩였다. 꼭 절대로 죽지 않겠다고 악을 쓰는 듯한 그 두 눈에 바르디는 차가운 얼굴을 했다.
“네.”
“……그리고 졌다고.”
목소리에 노기가 어렸다. 바르디는 속으로 어이가 없었다. 곧 죽게 되는 마당에 그는 아직도 자신을 어린 아이처럼 혼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너는…… 내가 왜 통일 전쟁을 그만뒀다고…… 생각하나……?”
처음 듣는 질문이었다.
“더 할 자신이 없으셨나 보죠. 카르크족을 완전히 이길 자신이.”
예전과 다른 손자의 말투에 선황제는 조금 당황한 듯했지만 이내 미간을 좁히며 말을 이었다.
“그게 아니다……”
선황제와 현황제의 눈이 매섭게 마주쳤다.
“마력자들을……. 마물들을…… 아주…… 없애는 건 불가능하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야…….”
“그래서 샤톤웰을 살려 두고, 노프탈에 그 많은 카르크인들까지 살려 두고. 숙제를 마무리하지 않으셨다는 뜻이군요.”
바르디의 말에 선황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들을…… 흡수했어야 해. 나도 실패했고……. 너는 나보다 더 실패하고 있어……”
카르크족에 대한 아린족의 두려움과 혐오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었다. 그들에게서 많이 나타나는 마력자들 때문이었다. 그리고 통일 전쟁 이후로는 마력자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마저 금기시될 정도로, 모두 그 과거를 잊고 살았다.
로하나 같은 귀족 자제들은, 여성인 경우 특히 그들에 대해서 들어 본 적이 없을 정도로.
그런데, 이제 와서 저런 소리라니.
한심해서 바르디는 한숨이 나왔다.
“그러니…… 유리에……. 내 딸이 더스틴 델클리프와 결혼하게 둔 것이야.”
그건 사실이었다. 그가 통일 전쟁을 서둘러 마무리한 뒤에 펼친 나름의 유화 정책에 카르크족은 세상이 좀 달라질까 기대했을 것이다.
그들이 어린 아들을 두고 젊은 나이에 모두 비명횡사하기 전까지는.
“샤톤웰 군대를…… 궤멸시킬…… 함정을 만들었다고 들었다.”
숨이 찼는지 선황제는 띄엄띄엄 말을 이었다. 바르디는 눈앞에서 봤던 황당한 광경을 떠올렸다.
“어리석었지만…… 이기려면……확실히…… 이겼어야지…….”
오랫동안 준비했던 함정으로 샤톤웰과 노프탈의 군대가 빨려 들어가던 모습이 눈에 선했다. 그리고 황당할 만큼 당황스러웠던 그 새의 모습까지. 바르디는 이를 악물고 대꾸했다.
“케이든 델클리프가 나서지만 않았어도 애초에 샤톤웰 같은 것 따위에 지는 일은 없었습니다.”
그가 소중해 마지않는 딸의 유일한 아들. 케이든의 이름을 올리자 그의 번뜩이던 푸른 눈이 순간 일그러졌다.
“너는…… 케이든한테……. 안 된다.”
그 말에 바르디의 냉정했던 얼굴이 일그러졌다.
“뭐라고요?”
“너는…… 애초에 상대가…… 된 적이…… 없어.”
선황제는 마른 장작 같은 손을 휘저었다. 당장에라도 꺼질 것 같은 숨을 쉬던 노인은 언제 그랬냐는 듯 기세가 당당했다.
“노프탈을 포섭하지 못하면…….”
순간, 선황제가 미친 듯이 기침을 하는 바람에 그의 말이 끊어졌다. 한참이 지나서야 그는 다시 말을 이었다.
“너는…… 이기지 못해……”
바르디는 피식 웃음을 지었다. 늘 듣던 말이라 새삼스럽지는 않았지만, 괜찮았다.
이제 그 말을 할 수 있는 날도, 아니지,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할아버지.”
“선황제…… 폐하…… 이다…….”
“당신의 소중한 손자가 왜 당신의 편지에 답장을 하지 않는지 궁금하지 않아?”
순간, 선황제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 손자, 우리 아버지가 죽이려고 했었거든.”
선황제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