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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는 후작께선 도대체 왜 이런 선택을 하신 거죠?”
남부의 영주 프란츠 소예. 현금을 물 뿌리듯 할 수 있는 하노버만큼은 아니어도 유서 깊은 영지가 넓었고, 남부에서의 신망도 두터웠다.
그것을 굳이 다 버렸단 말인가.
“저야 이게 옳다고 생각하니까요. 늘 그랬고.”
로하나가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옳다고 생각해요?”
“언젠가 역사의 흐름은 이쪽이 될 거라고 보았다고 하면 좀 더 믿으시려나?”
“그렇군요.”
“케이든 델클리프가 지나치게 곧아서 미뤄졌던 일이 이제 슬슬 시작되는 것뿐입니다. 흐름은 이게 맞아요. 그러니 제가 굳이 첨언을 하자면 부인도 여기와 함께했으면 좋겠군요. R. D.와의 유감은 죄송하지만 좀 미뤄 두시고.”
프란츠가 담배를 다시 물었다.
“그러고 보니 놀랍게도 그 케이든이 결국 움직인 계기가 공녀님이시네요. 역시 세상에 사랑이 제일 무섭다니까”
내뿜는 연기가 제법 보랏빛으로 어두워진 하늘에 퍼졌다.
로하나는 저도 한 대 달라고 하고 싶은 심경이었지만 팔을 꼬며 한숨을 쉬는 걸로 대신했다.
“후작님의 이유는요?”
“그건 이렇게 짧게 드릴 말씀은 아닌 것 같으니…….”
담뱃불에 빨갛게 불이 들어왔다.
“노프탈에서 차차 이야기해 볼까요?”
“노프탈로 오시나요?”
“아, 델클리프 공작께서 당연히 우리를 초대할 거라 생각했는데. 아직 안 했다면 공작 부인께 부탁드려도 될까요?”
능청인지, 계획인지, 아니면 이미 정해진 말을 하는 것인지.
로하나는 옅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옆에 두어야 하는 적이자 동지라면.
가까울수록 좋은 법이니까.
*
“공작님!”
세린이 깊은 녹안을 크게 뜨며 반색을 했다. 케이든이 미소를 띠며 무거운 문을 지나 침대에 누운 공주에게 다가갔다.
“좀 어떠십니까.”
“괜찮아요, 전.”
세린은 노란빛 프릴이 잔뜩 달린 잠옷에 가까운 실내복이 신경이 쓰여 이불을 매만졌다.
“늦어서 미안했습니다.”
“아니에요.”
세린의 기억은 흐릿했다. 누군가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듣고 고개를 들어 올려다본 후로 기억이 없었고.
정신을 차렸을 때는 수도에서 온 것이 분명한 화려한 마차 안에 공작 부인과 꼭 닮은 남자가 있었다. 쓸데없이 먹을 것이나 주던.
그러고선 물인지 주스를 마시곤 다시 정신을 잃었었다.
“주는 걸 먹지 말았어야 했는데.”
“세린 공주.”
낮은 목소리에 투명한 얼굴이 그녀에게 가까이 왔다.
“여기에서 공주가 잘못한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진지한 목소리가 울렸다. 세린은 왠지 눈물이 날 것 같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울고 싶은 것을 참지도 말고요.”
아직 어린 공주였다. 케이든은 그녀가 예전의 자유분방하던 쾌활함을 잊을까 걱정스러웠다.
“걱정 마요.”
그러나 이어진 그녀의 표정은 의외로 강했다. 그새 붉어진 얼굴에는 생기도 흘렀다.
“황제가 얼마나 비겁한 사람인지 알 수 있었으니까, 그 정도로 충분해요.”
케이든은 기특한 마음에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세린은 잠시 아이처럼 기뻐하다, 다시 조금 어두워진 얼굴로 돌아와 케이든을 쳐다보았다.
“공작 부인께 와도 괜찮다고 전해 주세요.”
케이든이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벌써 무리하지 않아도 됩니다.”
“부인 잘못이 아닌걸요.”
초롱초롱한 눈빛, 단호하게 앙다문 턱.
“알겠습니다.”
씩씩한 공주였다. 케이든은 자랑스러운지 씁쓸한 건지 모를 마음을 누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을 닫고 나오자 갈레드가 보고서를 잔뜩 든 채 나타났다. 심상치 않은 표정을 본 케이든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었다.
“얘기해.”
“아시다시피 지금 인질을 두고 말이 많습니다.”
역시 그 이야기인가.
양쪽 군대의 출혈이 상당했다. 왕국은 보복을 원하고 있었다.
케이든이 절벽에서 구해서 포로로 잡은 황실의 군대와 함께.
“당장 브란드 하노버의 목을 치라는 항의가 올라오고 있습니다.”
케이든이 눈을 내리깔았다.
“포로 목숨은 내가 결정한다.”
10년 전 싸움귀였던 그는 이런 일에 있어서 잔인할 정도로 깔끔했다.
이번에도 브란드 하노버는 본보기로 나쁘지 않은 존재였다.
그렇지만.
이제 그에게는 먼저 두어야 할 사람이 생겼다.
“내일 아침, 노프탈로 돌아간다. 하노버는 우리가 데려가.”
그때였다. 마침 로하나가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
케이든과 갈레드가 중앙 계단을 통해 현관으로 내려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갈레드의 눈치를 보아하니 곤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 분명했지만, 그의 짙은 눈은 로하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옅은 미소를 머금을 뿐이었다.
“오렐리아를 보고 왔어요.”
로하나가 대뜸 던진 말에 그도 어느 정도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짧게 끄덕였다.
“저도 아직 본 적이 없어서. 같이 갔으면 좋았을 걸 그랬습니다.”
대답하려 입을 열던 로하나가 바깥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화약 냄새였다. 중앙궁 현관으로만 걸어왔을 뿐인데도 전투의 흔적이 공기에도 짙게 남아 있었다.
로하나가 말을 이었다.
“라자르가 오렐리아와 생각을 다 공유하는지는 아직 잘 모르겠어요. 오렐리아가 스스로 움직이는 것 같지는 않은데.”
“로하나.”
“상관하는 것도 내 마음이에요.”
조금 당황한 듯했으나, 어느 정도 예상했던 바인지 케이든은 그럭저럭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리고 프란츠 소예와 오렐리아 모두 노프탈로 오라고 했어요.”
쓴웃음을 짓는 로하나를 보며 케이든은 미간을 좁혔다.
“그런 건 제가 하고, 당신이 나에게 화를 내면 될 일인데. 그렇게까지 할 것 없습니다.”
부쩍 가까워진 거리로 걸으며 케이든이 말했다. 넓은 어깨가 그늘을 만들어 냈다.
“이 정도로요.”
어차피 피할 수 없다면 정면으로 대치하는 것이 나았다.
“그러고 보니 불편한 말씀을 드릴 것이 있습니다.”
케이든이 먼저 입을 열었다. 로하나가 걸음을 멈추었다.
“어떤……?”
어두워지는 그녀의 눈을 보던 케이든이 더 미룰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입을 열었다.
“브란드 하노버 일입니다.”
로하나는 긴 속눈썹을 내리깔았다. 조금 들떴던 발걸음은 순식간에 물속을 걷듯 느려졌다.
“그렇군요.”
로하나가 케이든을 올려다보았다. 오늘따라 유난히 그의 은발이 빛나고 있었다.
“어떻게 하실 생각인가요?”
케이든은 마른침을 삼켰다.
“원래라면 목을 칠 수도 있는 거겠지요?”
이미 전투는 시작되었고 전쟁은 서막을 올렸다.
“그러기엔 좀 더 귀한 인질이기도 하죠.”
케이든이 서늘하게 진실을 이야기했다. 로하나는 목구멍을 치고 올라오는 무언가를 꾸역꾸역 삼켰다.
“브란드가 연루되었다는 증거는 없어요.”
정작 브란드에게 악을 쓴 것은 그녀였지만, 그녀라고 모두가 제 동생의 목을 치려는 것을 가만히 두고 볼 수는 없었다.
어릴 적, 저의 잘못으로 아버지에게 대신 맞고 울던 어린 소년의 모습이 그녀의 뇌리를 스쳤다.
기억하고 있는지도 몰랐던 장면들이었다.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저 아이도 어떻게 보면…….
로하나는 잔상을 떨쳐 내려 고개를 살짝 저었다.
어떻게 보면 브란드 역시 피해자이기도 했다.
이번 일에 정말 휘말리기만 했을 수도 있었다.
“당신의 동생이라고 애매한 행동을 취할 순 없습니다. 그 정도는 당신도 아시겠죠.”
로하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소예 후작의 말이 떠올랐다. 어느 편으로 설지 정확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
단순히 케이든 때문이라면 고통스러워질 뿐이라는 걸.
머리로 다시 한번 깨닫자 가슴이 서늘했다.
“로하나.”
그 순간, 케이든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어느덧 성큼 몸과 몸 사이의 간격을 닿을 듯 가깝게 한 그에게서는 여름이 다 와 가는데도 눈보라 향이 났다.
“그래도 그렇게까지 걱정하진 마십시오. 전 원래 인질에게는 최소한의 도리를 지키는 편이라.”
“…….”
“만나고 싶으시면 모셔다드리죠. 대우도 나쁘지 않게 하고 있으니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로하나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아니에요.”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브란드도 아마 생각할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노프탈로 가서 그때 얘기하죠.”
그리고 그 전에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대신 먼저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어요.”
소예 후작의 말을 조금은 노력해서 들을 필요가 있다.
누구냐는 그의 질문에 로하나는 살풋 미소를 지었다.
“에밀리요, 조디의 동생.”
그녀에게 확인할 것이 있었다.
그런데 이어지는 케이든의 말이 낯설었다.
“아뇨.”
로하나가 한쪽 눈썹을 꿈틀했다.
“아니라뇨?”
“안 됩니다.”
그게 무슨…….
“전시입니다, 이젠.”
케이든이 말했다.
“혼자 어딜 가시는 건 허락할 수 없어요.”
“허락이요?”
로하나가 되물었다.
“대신, 제가 불러오겠습니다. 사람을 써서 데려오게 하면 그걸로 되겠지요?”
냉정하게 업무를 보는 듯 덧붙이는 말에 로하나는 알 수 없는 꺼림칙함을 느꼈다.
“제 명령인데, 당연히 올 겁니다.”
굳은 로하나의 얼굴을 보며 케이든이 조금 신경 쓰듯 부드럽게 덧붙였다.
로하나는 제가 너무 예민했나 싶어 천천히 대답했다.
“예, 그럼 그렇게라도.”
어서 집으로 가고 싶었다. 불안한 기운이 가슴에 스멀스멀 올라왔다. 케이든의 예민한 반응에 새삼 실감이 났다.
‘전쟁이 정말 시작된 건가.’
아무래도 그 몰래 밖에 나가서 상황을 봐야겠다는 생각이 든 건 그날 저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