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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에서 조금 떨어진 후원가에 있는 작은 손님용 별채.
푸른 정원보다는 오색의 아름다운 수석으로 장식한 정원이 이국적인 정취를 자아냈다. 자그락, 자갈 밟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때 프란츠가 보였다. 금발을 잔뜩 헝클어트린 채 유난히 가로로 긴 눈매의 밤색 눈동자가 반짝였다.
“공녀님! 아니, 공작 부인.”
물고 있던 담배를 서둘러 던진 그가 씩 웃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히스에게도 묵례를 까닥하면서.
“후작과도 말씀을 좀 긴히 나누어야겠어요.”
오랜 고향 친구였다, 어쨌든.
“오랜만에 이렇게 뵈니까 참 신기하네요. 인생사 알 수가 없어요, 그렇죠?”
손을 내밀자 프란츠는 자연스럽게 무릎을 굽히며 입을 맞추었다.
“저만큼 신기하시겠어요.”
아닌 게 아니라 정말 희한할 일이었다. 도대체 그가 여긴 왜? 그녀의 얼굴을 보며 이해한다는 듯 슬렁슬렁 고개를 흔들던 그가 말을 이었다.
“저를 보러 온 게 아니시라면.”
로하나가 천천히 눈을 들었다.
“네. 어디 있을까요?”
“여기 있어요.”
뒤에서 대뜸 들리는 목소리에 로하나가 몸을 돌렸다.
푸른 드레스를 입은 그녀.
골든 우먼, 오렐리아였다.
원작을 떠올리며 로하나는 미간을 좁혔다.
그녀가 어쩌면 모든 것의 키일지도 몰랐으니까.
“이야기 좀 하지.”
오렐리아는 말갛게 그녀를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로하나는 못마땅해하는 히스를 두고 오렐리아와 옆에 있는 작은 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오렐리아가 앉기도 전에 먼저 자리에 앉은 로하나가 먼저 말을 시작했다.
“라자르는 왜 같이 오지 않고?”
로하나의 당연한 질문에 오렐리아는 미간을 찌푸렸다.
“라자르랑은 어떤 사이예요?”
둘의 눈동자가 마주쳤다.
“도대체 무슨 사이길래 라자르까지 당신한테 그렇게 집착하는지.”
어차피 대답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지 오렐리아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로하나는 잠시 그 빙글빙글 돌던 적안을 떠올렸다.
‘미안하다’고 했던 선뜩한 소년의 목소리도.
살짝 찌푸린 미간을 억지로 펴면서 로하나가 다시 입을 열었다.
“R. D.는 여전하네. 방법은 저번처럼 졸렬하고 천박하기 그지없었지만.”
이번에 미간이 좁아진 건 오렐리아였다.
“조디 일 때처럼.”
깊숙이 등받이에 기댄 로하나가 말을 계속했다.
“그래서 라자르의 계획은 어떻게 되는 거야? 이대로 전쟁에서 승리해서 케이든을 황제로 만들겠다, 이런 건가?”
서늘한 목소리와 아무 표정 없는 얼굴에 순간 위압감이 들 정도였다.
태연하게 손을 잡을 거라고 말하면서 말했지만 불쑥 던져 온질문은 전혀 그렇지가 않다.
사용인이 내온 차에선 알싸하게 매운맛이 났다.
오렐리아가 천천히 입을 뗐다.
“나 보는 거 힘들지 않아요?”
로하나는 미간을 조금 좁혔다. 붉은 입술 한쪽이 쓱 올라갔다.
“너도 쉬운 것 같지는 않은데?”
되묻는 말에 오렐리아의 얼굴이 더 구겨졌다.
“네가 어떤 사람이든, 나에게 어떤 사람이든.”
로하나가 말을 고쳤다.
“지금 그거 가지고 이러쿵저러쿵하고 싶은 사람 없으니까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해.”
“R. D.는 케이든 델클리프에게 도움을 드리겠노라 한 거지 당신에게 복종하겠다고 한 적 없어요.”
오렐리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로하나가 콧방귀를 뀌었다.
“차이가 있다고 생각해?”
로하나가 팔짱을 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계획을 말해. 다신 이렇게 이상하게 뒤통수치는 방식 용납하지 않을 테니까.”
오렐리아가 입술을 깨물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라자르가 말한 건 여기까지예요. 더 이상은 나도 몰라.”
“네가 굳이 R. D.의 수장인 이유는?”
“그거야 당연한 거 아니에요? 나는 황후였어요. 바르디가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쫓아내기 전까진.”
마치 정말 상처가 되기라도 한 듯 말하는 오렐리아의 목소리는 격정적이었으나 얼굴은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꼭두각시 주제에 프라이드가 굉장히 높네.”
로하나의 말에 다시 예쁜 오렐리아의 얼굴에 금이 갔다.
“라자르에게 전해. 나도 ‘미안하다’는 말 잘 기억하고 있으니 언제든 대화할 생각은 있다고 말야.”
무슨 말인지 모를 소릴 남기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로하나는 마침 사용인들이 가져오는 다과상을 스치며 밖으로 나섰다.
프란츠와 히스가 나란히 마주 보고 서 있다가 그런 그녀를 바라보았다.
“로하나 공녀, 아니 공작 부인.”
늘 피우던 담배를 제 등 뒤로 숨기며 프란츠가 고개를 숙였다. 히스는 영 못마땅한 눈이었다.
“오랜만이에요.”
“못 본 사이 분위기가 많이 바뀌셨네요.”
특유의 거친 목소리에 앞뒤로 슬렁슬렁 몸을 움직이는 그가 놀랍다는 듯 말을 했다.
“후작님은 바뀌신 것 없이 많이 달라지셨네요.”
로하나의 말에 프란츠가 팔을 내밀었다.
“그럼 오신 김에 저랑도 잠시 이야기를 좀.”
“위험합니다.”
히스가 둘 사이를 팔로 가로막았다.
“아니에요, 히스.”
그럴 것은 없었다.
“맞아. 공녀님은 심지어 내 목숨을 구해 주셨다고.”
히스의 눈썹이 움찔했다.
“어제 부상을 당하셨어서.”
로하나가 설명을 덧붙였다.
“갚을 수 있게 해 줘야지.”
“그쪽이 어떻게 뭘 레이디에게 갚을 수 있다는 거지?”
지나친 적대감 아닌가, 하는 프란츠의 표정을 무시하며 히스는 로하나에게 돌아갈 것을 말했다.
히스의 태도가 못마땅한 모양이지만 프란츠는 그치고는 제법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지금 샤톤웰과 전후방 웬만한 거리까지 아린족이라곤 공작 부인과 나뿐인데…….”
금발을 휙 쓸어넘긴 그가 세상 능청스러운 얼굴로 히스와 로하나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오랜 회포도 풀 겸 잠시 이야기를 좀 할까 합니다.”
히스가 다시 막는 것을 잡으면서 로하나가 말했다.
“오렐리아도 따로 본 판에 프란츠라고 더 위험하진 않아요.”
로하나의 잔잔한 목소리에 히스가 하는 수 없이 물러나며 경고했다. 프란츠는 그녀를 데리고 후원의 맨 끝까지 걸었다. 말은 그렇게 해도 히스의 시야에서 벗어나지는 않아 주었지만.
“소예 후작,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
“부인, 지금 상황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고 계시는가?”
프란츠가 능글맞은 목소리로 물었다.
“글쎄요. 얼마나 알고 있는 건지 모르겠네요.”
“지금 수도나 전 제국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노프탈에 델클리프 공작과 있으셨으니 모르실 것 같지는 않은데.”
로하나는 잠시 미간을 좁혔다. 케이든과 히스 모두 제게 정보를 적당히 가린 것 같은 느낌이 없지 않아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조디를 앞세워, 오렐리아를 앞세워 시위가 거칠어지고 바르디의 말도 안 되는 법령에 카르크족이 설 자리가 점점 좁아지고 있다는 것은 알았다.
“후작님이 설명하시자면?”
“둘이 있을 때는 그냥 이름으로 부르라고 예전부터 그래도 절대 안 그러시더라.”
로하나는 피식 웃었다. 그는 그대로였다. R. D.에 와 있는 것만 빼고.
“아무튼…… 내가 원래 아무한테도 환영받지 못하는 치였던 건 기억하시죠?”
기억하다마다요. 노프탈은 독립을 해야 마땅하다, 그렇지 않으면 카르크족 전체가 우릴 다 죽일 날이 올 수도 있다고까지 했었으니.
“표정 보니까 다 기억하시네.”
“어떻게 모르겠어요. 후작님의 인기와 더불어 염세적인 시선이 보통 유명했어야죠.”
적당히 맞춰 주는 로하나의 말에 프란츠가 이마에 주름을 만들며 눈을 떴다.
“부인, 못 보신 새 더 매력적으로 바뀌셨네요.”
그리고 이런 말을 해서 인기였다. 구릿빛 피부와 함께.
로하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제가 얘기하던 대로입니다. 아르드골드 제국은 예상하고 통제할 수 없다는 이유로 마계와 관련된 모든 것을 통제하거나 억압하고 있죠.”
로하나는 미간을 좁혔다. 충분히 미루어 짐작한 바였다.
“이런 식의 부자연스러운 탄압은 반드시 어느 순간 임계에 부딪히게 되어 있습니다. 부인도 역사 정치에 조예가 깊으셨던 거로 기억하니 새삼 놀랄 이야기는 아니시겠죠.”
긴 한숨을 쉰 후 소예가 말을 이었다.
“생각이 있으시겠지만, 그래도 같은 순수 인간 출신으로서 뭐 하나만 더 묻죠.”
계속하라는 보랏빛 눈동자를 보며 프란츠는 담배 연기를 뒤로 후 내뿜었다.
“카르크족의 편에 선 이유가 있습니까? 케이든 델클리프와의 개인적인 관계 말고요.”
이 와중에 능청맞게 놀리는 목소리에 로하나는 살짝 가늘어지는 눈을 감았다 떴다.
“황제가 당신에게 미쳐 있다는 건 나도 알고, 온 제국이 압니다. 근데 그 자리를 굳이 마다하다니…….”
프란츠가 말을 이었다.
“부인의 행동과 결정이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고, 마력까지 사용하는 아린족이라 카르크족을 친밀하게 느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만.”
몸을 살짝 기울인 그가 자못 진지해진 목소리로 물었다.
“그거와 전쟁에서 정말 어느 쪽에 설지는 또 다른 문제일 수 있습니다.”
연한 눈동자가 로하나를 똑바로 응시했다.
“바로 어제, 죽을 뻔했던 제가 할 말은 아니지만.”
그의 시선이 조금 흔들렸다.
“카르크족은 격렬하게 공격할 겁니다. 보셨겠지만 케이든의 전투력은 사람의 영역이 아닙니다. 히스도 10대 중반에 이미 카르크족 전체를 주무르던 실력자입니다.”
로하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아린족을 옹호하지 않으실 자신이 있으십니까. 저는 솔직히 오래 걸렸거든요, 진짜 행동하기까진.”
둘의 눈동자가 마주쳤다.
“확실한 이유가 없다면 갈수록 힘들어지실 겁니다.”
로하나는 잠시 마른 입술을 깨물었다. 알고 있었다, 꼬집지 않아도.
“그 시녀 일로 R. D.와 오렐리아에게 유감이 많다고 들었습니다.”
“오렐리아가 그래요?”
그렇다는 듯 연한 눈을 천천히 깜빡였다.
“이번 작전에서 R. D.는 세린 공주가 다치지 않게 최선을 다했습니다. 졸렬하고 끔찍한 작전이었다 해도 드릴 말씀은 없지만…….”
로하나는 친하지도 그렇다고 영 모르는 남도 아닌 후작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