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를 죽일 흑막과의 계약결혼-89화 (89/125)

89

*

쾅.

여자가 울면서 방을 뛰쳐나갔다.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정리하지도 못한 모양새였다.

부디에르는 혀를 차며 그녀를 나무라고 내실로 들었다.

고급스러운 실내가 군인들의 피와 땀, 흙으로 엉망이 되었지만 그는 다른 것이 초조했다.

내실의 응접실은 박살 난 찻잔과 물건 따위로 엉망이었다. 황제는 티 하나 없이 깨끗한 실내복에 보라색 가운을 걸친 채 자리에 앉아 있었다.

“프란츠 소예와 관련된 자들은 전부 잡아들여.”

부디에르는 고개를 조아리며 다급하게 대답했다.

“네, 물론입니다, 황제 폐하.”

절대 실패할 수 없는 작전이었다. 중간에 샤톤웰의 공주 계집을 놓친 것도 문제였지만 반년을 공들인 폭탄과 그 폭탄으로 만들어 낼 절벽이 실패한 것이 통탄할 일이었다.

‘겨울을 다 쓴 일이었다.’

군인들의 보고를 들으니 케이든은 그 절벽에서 뛰쳐 올라왔다고 했다.

무려 마물의 도움을 받아서.

부디에르는 속으로 치를 떨었다. 도대체 누가 그걸 예상할 수 있단 말인가! 드레고리 하노버는 죄인이 되어 수용되어 있었다. 저도 그렇게 될까 봐 오금이 저렸다.

최대한 고개를 조아리고 나가는데 황제가 다시 그를 불렀다. 돌아보자 새파란 눈이 번뜩이며 그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저딴 천박한 여자들 내 방에 다시 들였다가는 그 여자 목은 물론이고 네 목도 날아갈 줄 알아.”

부디에르는 이마가 땅에 닿을 듯 고개를 숙이며 겨우겨우 뒷걸음질로 방을 나갔다.

바르디는 부디에르가 나가자마자 책상에 있던 유리잔을 던졌다.

아름답게 세공되어 있던 유리잔이 박살이 났다.

납치 작전이 실패한 것도 견딜 수가 없었지만 그의 속을 더 뒤집어 놓는 것은 따로 있었다.

로하나.

‘도대체 왜 당신을 그렇게 취급하는 곳에 눌러앉으려는 거야?’

로하나가 눈앞에 있다면 대답할 때까지 목을 졸랐을 것이다.

도대체!

왜!

목이 부러지더라도 대답할 때까지.

그때 미처 연락을 받지 못했는지 노크 소리가 나고 여인들이 들어왔다. 바르디가 가늘어진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내가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했을 텐데.”

그러나 문을 연 자의 눈은 달랐다. 뭔가 임무를 띠고 온 듯 차갑고 결연한 눈이 그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뭐지.”

어이가 없어 바르디는 잠시 그 여인을 올려다보았다. 여인이 조용히 속삭였다.

“부디에르 경께서 보내셨습니다. 급하신 일이라고.”

“다 꺼져.”

여인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사뿐 숙였다.

*

10년 전.

노프탈의 버려진 어느 성 주탑 위. 히스가 피가 잔뜩 튀어 무거워진 눈꺼풀을 떴다.

“죽여야 한다면 그렇게 해.”

케이든이 턱의 피를 닦아 내다가 미간을 찌푸렸다.

“쓸데없는 소리.”

히스가 마른 입술을 올리며 어이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살려 두겠다고, 나를? 이것 후에도?”

둘의 시선이 마주쳤다. 케이든은 피가 젖은 갑주를 벗어 턱 하고 바닥에 던졌다. 방금까지 적이 되어 버렸던 친구 앞에서 케이든은 겁이 없었다.

“그만해.”

침착한 케이든의 목소리에 히스는 어이없는 웃음을 흘렸다. 혼혈 왕자인 그를 몰아내자는 R. D. 극단 세력의 움직임은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케이든이 ‘그런 짓’을 할 줄은 몰랐다. 덕분에 황제의 신뢰를 얻고 노프탈은 무사하게 되었지만.

지난 5년간 함께했으면 무엇하랴.

“넌 내 아버지를 죽였어.”

“그래.”

히스가 미간을 구겼다.

“그리고 난 너를 죽이려 했고.”

“알아.”

오묘한 흑안이 표정 없이 히스를 내려다봤다.

“죽이기 싫으면 내가 알아서 죽어 주리?”

“죽겠다고 협박하는 그런 인간이었나?”

핵심을 찌르는 서늘한 목소리에 히스가 입술을 깨물었다.

“생떼 부리지 마.”

“말이 길다, 하던 대로 해.”

배신자의 목을 쳐 내는 것이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닌데 케이든에게 나라고 다를까.

“그만해.”

별안간 쏘아보는 눈빛에 히스는 저도 모르게 입을 닫았다.

“널 죽일 일은 없어.”

“어째서?”

둘의 시선이 맞부딪쳤다.

“그 작전이…… 악스톤의 명이었다는 걸 넌 알고 있었지.”

순간, 서슬 퍼렇던 히스의 얼굴에 힘이 빠졌다. 사실 알고 있었다. 악스톤은 이미 얼마 남지 않은 목숨이었고, 그런 그는 늘 케이든에게 말하곤 했다. 어차피 죽을 자신의 죽음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라고.

지금은 때가 아니니 때를 기다리라고.

알고 있었으면서도 분해서 케이든에게 칼을 겨눴다. 용서하고 싶지 않았다. 상황이 어찌 되었든 악스톤을 죽게 한 케이든 델클리프가, 렌트워스의 피가 흐르는 그가 죽일 만큼 미웠다.

작전은 실패하고 라자르에게 배신당해 R. D.에서조차 쫓겨났다. 그보다도 한참 어린 케이든이 말했다.

“선택해.”

히스가 모든 사실을 알면서도 그를 미워해 어깃장을 놓은 것이라는 걸 케이든은 알고 있었다.

차가운 바람이 바닥에 고인 피에 파동을 일으켰다.

“앞으로 다시 나와 마주쳤을 때 정말로 나에게 죽을지.”

같이 무릎을 굽힌 케이든이 단검을 들어 보였다.

“아니면 지금부터라도 나와 제대로 함께할 것인지.”

냉정한 판단력, 동물적인 전투 실력, 몇 수를 앞서 보는 두뇌. 케이든을 서술하는 많은 단어가 있었지만, 이 순간 히스는 새삼 알 수 있었다.

5년을 함께한 친구에게 배신을 당해도 그는 침착했다.

배신자의 속까지 꿰뚫어 보면서.

“나에게 기회를 주는 이유는?”

“사람이 죽음 앞에서 기회를 얻게 되면 의외로 괜찮은 선택을 하니까.”

그답지 않게 선무당 같은 대답에 히스가 미간을 찌푸렸다.

“나를 믿는 근거는?”

“믿다니.”

케이든이 입을 열었다.

“재차 말하지만, 기회를 주는 것뿐이다.”

침묵이 흘렀다.

히스는 입술을 깨물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흔들리는 눈을 보자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선뜻한 미소가 케이든의 입가에 스쳤다.

짙은 눈은 그러게, 진작에 그럴 거면서, 하고 말하고 있었다.

히스는 그제야 깨달았다. 처절한 인정.

자신의 방식은 실패했다.

“라자르가 남은 세력을 규합하려 할 거야.”

케이든이 천천히 입을 뗐다.

“그럼 더더욱 네 도움이 필요하겠군.”

태연한 목소리였다. 케이든이 가늘어진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침묵이 흘렀다.

히스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바다색 눈동자가 어린 군주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때 케이든이 덧붙였다.

“최선을 다하지. 네 옆에서, 네 방식대로.”

“재차 말하지만 R. D.처럼 무작정 전쟁을 일으킬 생각은 없다.”

흑안에는 복잡한 상념이 가득했다. 그에겐 아직 시간이 필요해 보였다.

“이제 나에게 설명하지 않아도 됩니다.”

히스는 진심으로 말했다.

제가 믿었던 방법은 실패했다.

R. D.는 실패다.

이 지긋지긋한 30년을 끝내긴 위해선 다른 방법이 필요했다.

“노프탈과 우리를 수호하는 것이 최우선이다.”

히스는 그대로 자신의 장검을 뻗어 그에게 절을 올렸다. 케이든이 그의 칼에 자신의 칼을 가져다 대면서 서약을 완성했다.

“앞으로 잘 부탁해.”

대뜸 뻔뻔한 반말에 케이든이 믿을 수 없다는 듯 히스를 바라보았다.

“말은 계속 그렇게 할 건가? 내 밑으로 오면서도?”

“응.”

히스가 비스듬히 미소를 지었다.

“알고는 있었지만 정말 놀라울 정도로 경우가 없군.”

믿을 수 없다는 기색이 그대로 드러난 그의 얼굴을 보며 히스는 계속 그렇게 하기로 생각했다.

“너도 언젠가 이런 뻔뻔한 상황에 처하게 되면 날 이해할 거다.”

“어른인 척하는 말은 적당히 하지?”

히스가 비릿하게 웃었다.

“아, 그전에.”

그 순간, 갑작스레 움직이는 그의 손끝에서 새하얀 화살이 순식간에 날아갔다. 단말마 같은 비명이 들리며 사람 둘이 나무에서 떨어졌다.

“위험한 사람들은 바로바로.”

케이든이 히스를 올려다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마력이 아직 한참 부족하네.”

“금방 늘 거야.”

히스가 대답했다.

*

옛 생각에 잠겨 있던 히스가 브란드의 특별 보호실에서 나오는 로하나를 바라보았다.

“괜찮으십니까?”

“물론이죠.”

사실 별말이 오가지도 않았다. 브란드는 그저 자신은 억울하다고 했고, 로하나는 그가 억울하고 하지 않고를 떠나 그에게 할 말이 없었다. 그리고 그보다 더 급한 일이 있었다.

케이든에게 말하지 못했던 그 일.

“레이디, 굳이 지금 그들을 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어스름한 땅거미가 지고 달이 뜨고 있었다. 로하나는 대충 직접 땋아 내린 머리를 어깨 너머로 넘기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정말 꼭 만나고 싶어서 그래요.”

로하나의 말에 히스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나직한 한숨을 내쉬더니 천천히 앞장섰다. 로하나가 문득 그의 뒷모습을 보며 입을 열었다.

“히스, 그전에.”

히스가 무슨 일이냐는 듯 부드러운 얼굴로 그녀를 내려 보았다.

“케이든에게는 아직 그 이야기 못 들었어요.”

로하나가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순간, 히스의 눈이 흔들렸다. 로하나는 조금 당황한 그를 풀어 주려는 듯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이제 그런 말을 물어도 되는 사이 같진 않아요.”

히스는 최대한 미소를 유지했다.

“부인에게 비밀을 가지다니, 안 될 사람인데요?”

특유의 능글거리는 말투에 로하나는 또 후후 웃었다. 그 쓸쓸함에 히스는 저도 모르게 눈자위가 어두워졌다.

“레이디, 뭔지 나는 모르지만…….”

로하나가 걸음을 늦추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지금은 케이든한테 조금 시간을 줘요.”

순간 새물새물하게 접혀 있던 로하나의 눈이 살짝 멈추었다. 히스의 농담을 이어 가는 그녀의 너스레에 빙그레 입꼬리가 올라갔다. 씁쓸함이 번졌다.

“서툰 점이 많죠?”

“네, 뭐.”

무엇이든 꾹 눌러 담다가 갑작스레 폭발하는 그의 단점이 이제는 슬슬 보였다.

“그래도 케이든은 믿어도 되는 사람입니다.”

“히스처럼요.”

아니요, 저처럼은 절대 아니고요.

히스는 하지 못할 말을 삼키며 그럭저럭 어깨를 으쓱했다. 농담이 재미있었는지 다시 웃음을 짓던 그녀의 얼굴이 곧 서서히 굳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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