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를 죽일 흑막과의 계약결혼-88화 (88/125)

88

“오랜만이야.”

로하나가 오렐리아에게 걸어가며 말했다. 마주친 두 여자 사이로 긴장이 흘렀다.

“이제 황후가 아니니 내가 굳이 존칭할 필요는 없겠지?”

오렐리아의 미간이 좁혀졌다.

“네, 그럼요. 편하게 말씀하세요.”

그녀의 인형 같은 얼굴이 기계적으로 낭랑한 목소리를 뱉어 냈다. 눈은 늘 그렇듯 동그랗고 빠르게 돌아가는 생각으로 번뜩였다.

“어쨌든 세린을 역으로 납치한 건 우리에게 좋은 수가 되었네. 다행이고, 고마워.”

오렐리아는 속으로 혀를 짓씹었다. 애초에 이 계획이 마음에 안 들었었다. 물론 이 정도가 아니면 케이든이 R. D.나 자신을 받아 줄 리 없다는 것도 알았지만.

그런데 이렇게 태연할 로하나는 예상하지 못했다.

“별말씀을요. ‘카르크’를 위해서 R. D.나 저는 못 할 일이 없거든요.”

로하나가 눈을 가늘게 뜨며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래, 도와준다니 고맙게 받을게.”

애써 유지하던 오렐리아의 어여쁜 표정에 금이 갔다.

“좋은 전력을 마다할 이유는 없겠지.”

로하나가 생글 웃었다.

자신을 아랫사람으로 대하는 로하나의 말에 오렐리아의 황금빛 눈동자가 그녀를 노려보았다.

로하나는 오렐리아가 굳이 예쁜 표정을 짓지 않으니 차라리 보기가 나았다.

오렐리아가 인사도 없이 뒤를 돌아 빠르게 사라지자 프란츠가 그녀를 뒤쫓았다. 로하나가 그들로부터 시선을 거두는데 이번엔 이슬라가 말을 걸었다.

“델클리프 공작,”

케이든이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짧게 끄덕이고, 로하나 역시 이슬라 여왕 뒤를 따랐다.

*

두 사람이 이동한 화려하고 푹신한 방석이 깔린 방은 10년에 걸쳐 만들었을 오색의 태피스트리가 벽과 바닥에 장식되어 있었다.

“공작 부인, 용서하십시오.”

여왕이 고개를 숙였다. 로하나는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누구라도 그렇게 했을 겁니다.”

공과 사는 구분한다. 그녀는 가장 옳은 선택을 했다. 케이든도 그러했고.

이제는 지난 일이다.

“델클리프 공작께선, R. D.와 절대 손잡을 생각이 없었어요. 세린이 아니었다면 있을 수 없을 일입니다.”

이슬라가 빠르게 말했다.

“결국 왕실의 공주를 보호하지 못한 제 책임입니다.”

로하나는 눈을 내리깔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지 마세요. 여왕 전하께서도 너무 자책이 심합니다.”

어느 세상이든 양심 있는 자들에게는 자책이 필수인가. 로하나는 씁쓸하게 생각했다.

“앞으로 어떻게 할지만 생각하죠.”

이슬라는 강한 여왕이었다. 통일 전쟁 당시 샤톤웰이 제국에 흡수되지 않은 것부터 대단한 일이었지만 두 세대가 내려올 동안 그걸 지켜 낸 것은 이슬라였다.

물론 또 훗날 반목하게 될 수도, 그녀에게 위험한 사람이 될 수도 있었지만.

로하나는 제일 묻고 싶었던 질문을 던졌다.

“세린 공주는 좀 어떤가요?”

“조금 놀랐지만 괜찮아 보여요, 지금은.”

이슬라가 천천히 말했다.

“만나 보시겠어요?”

로하나가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다 대번에 멈췄다.

“아, 아뇨.”

로하나는 제 아버지를 닮은 것으로 유명했다. 흑단 같은 검은 머리카락과 특이할 정도로 채도가 높은 보랏빛 눈동자.

“다음에…… 다음에요.”

지금 세린을 보러 가는 것은 좋은 생각이 아니었다.

“제 인사를 전해 주세요. 공주가 무사해서 정말 너무 기쁘다고요.”

이슬라의 눈이 부드럽게 깜빡였다. 그러더니 미처 잊을 뻔했다는 듯 손을 움직였다.

“아, 그리고…….”

그녀의 손에 낡은 서책이 들려 있었다.

“마물의 현신에 관한 내용입니다. 저희 샤톤웰은 마법서가 모두 불탈 때 마지막까지 자료를 보존한 곳이에요. 이런 정보는 여기밖에 없습니다.”

무겁고 오래된 종이에는 질기고 선명한 글씨가 남아 있었다.

“도움이 될 겁니다.”

로하나는 짧게 고개를 끄덕이며 무거운 책을 받아 들었다.

*

전투의 후유증이 남은 궁 안은 모두가 분주했다. 흐느끼는 목소리, 입을 틀어막는 애끓는 비명도 간간이 들렸다.

조금 놀란 듯, 당황스러운 듯 그녀를 향한 뾰족한 시선도 계속됐다. 어쩐지 두려워져 로하나는 걸음을 빨리했다.

도착한 접대용 응접실은 비어 있었다. 케이든이 바로 밖으로 나간 모양이구나 싶어 로하나는 조금 기운이 빠졌다.

샤톤웰 특유의 낮은 가구들에는 푹신한 쿠션이 올라가 있었다.

로하나는 그중 긴 의자에 앉았다. 앉기보단 거의 눕게 되는 가구였지만.

‘괜찮을까.’

눈을 감자 다시금 익숙한 무거운 추가 저 깊은 곳에서 마음을 끌어내렸다.

공과 사는 구분한다며 이슬라의 갑작스러운 납치 시도도, 케이든과 R. D.의 일시적 동맹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괜찮고 안 괜찮고를 떠나, 정말 여기가 내가 있을 곳인가.

오렐리아가 저렇게 멀쩡히 뻔뻔하게 살고 있는 것을 보면서 지내는 게 괜찮고 말고를 떠나서 옳은 일일까.

그때였다.

덜컥.

문이 열렸다. 케이든이었다. 로하나는 깜짝 놀라 기댔던 몸을 일으켰다.

“왜…… 놀라십니까.”

“아.”

로하나는 저도 모르게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가셨을 줄 알고.”

케이든은 별말 없이 등 뒤의 문을 닫았다. 잠그는 소리가 나고 그가 성큼성큼 로하나 쪽으로 다가왔다.

부딪칠 듯 다가온 그는 한쪽 무릎을 꿇고 앉은 채 시간을 주듯 그녀를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그렇게 앉으니 유난히 넓은 어깨가 도드라졌다.

“상황이 이러니 바쁘실 거라.”

케이든이 잠시 미간을 좁히더니 천천히 겉옷을 벗었다. 벗은 옷가지는 로하나가 앉아 있는 소파 옆으로 던져졌다.

“칼라드리우스의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겁니까? 의사소통을 했다든지.”

케이든의 질문에 로하나는 조용히 기억을 되짚었다. 너무 심한 난리 통에 그랬던 거라.

“로하나, R. D.의 일은…….”

“세린 공주를 구하는 것이 최우선이죠.”

로하나가 재빨리 케이든을 말을 끊었다.

“더 이야기 안 하셔도 돼요.”

케이든은 두통이 이는 듯 잠시 이마를 손으로 짚었다.

“로하나.”

케이든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갑주를 고정하던 가죽끈을 거칠게 당기자 가죽이 찢어지는 소리를 냈다.

“제가 부탁 하나 해도 되겠습니까?”

어느새 셔츠 한 장을 겨우 걸친 그가 그대로 천천히 양팔을 뻗어 그녀를 품 안에 가두었다. 조금 걷힌 셔츠 밑으로 선명한 근육이 모양대로 갈라졌다. 로하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다는 말 그만하십시오.”

목소리에 미묘하게 거칠어진 숨이 섞여 있었다.

“가끔은 당신이 저에게…….”

그는 말을 고르는 듯 잠시 입술을 깨물었다.

“아니, 나한테만큼은.”

공기의 밀도가 시시각각으로 두꺼워졌다. 이제는 숨소리에 가까워 낮디낮은 목소리는 거의 색정적이었다.

“괜찮지 않다고 말했으면 좋겠습니다.”

보랏빛 눈동자가 흔들렸다.

“내가 지은 죄가 있으니 그 정도는 들어야 마땅합니다.”

공과 사는 구분하니 걱정하지 말라, 세린이 우선인데 그 선택은 어쩔 수 없었다. 아침부터 그녀가 준비한 구구한 대인배의 말들이 구름처럼 붕 떴다.

“당신에게 불공평한 상황이니까.”

정말 괜찮았을 리가 있겠는가.

당연히 안 괜찮았다. 머리가 이해하는 것과 가슴이 괜찮은 것은 별개였으니까.

집요한 눈빛은 그런 로하나의 속을 아는 듯 깊고 진득하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흔들리는 표정을 읽으며 그의 목소리에 밀도가 더 높아져 갔다.

“R. D. 일에 대해서도 얼마든지 원망해도 좋습니다.”

뻗은 긴 손가락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당신은 그 이상을 해도 괜찮아.”

로하나는 조용히 그런 그를 바라보았다. 만난 이래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한 거리감이었다.

“하지만 여기 일에 너무 관여되지 마십시오.”

그는 친절했고, 다정했으며, 진심으로 그녀를 밀어내고 있었다.

“내가 마물을 다룰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건, 라자르가 필요한 사람이라고 했던 건 다 어떻게 되는 거예요?”

저도 모르게 반항적인 마음이 든 로하나가 발끈했다.

“어제 자칫하면 당신이 잘못될 수도 있었습니다.”

“제 앞가림 정도는 잘한다는 거 충분히 증명한 거 같은데요.”

뭔가가 목에 걸린 듯 숨이 차고 온몸에 족쇄가 채인 듯 답답했다. 케이든은 전에 없이 공격적인 로하나를 보면서 차갑게 굳은 얼굴로 바라보았다.

“이제 와서 당신이 죽으면 우리 쪽이 불리해집니다.”

냉정한 목소리에 로하나의 미간이 좁아졌다.

“가급적 안전하게 계세요.”

케이든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을 이었다. 순간, 로하나가 케이든의 팔목을 잡아챘다.

“뭐 하는 거예요, 이게.”

어이가 없어 목소리가 절로 떨렸다.

“지금 나한테 미안하다고, 설명해야 하는 것 아니에요?”

“미안하다고 한 것 같은데.”

“미안하긴, 나한테 불리한 상황이라고만 했죠.”

케이든의 미간이 좁혀지면서 눈이 가늘어졌다. 입술이 살짝 벌어지다가 다시 굳게 닫혔다.

“설명하고, 앞으로 어떻게 할지 생각해야죠.”

“당신은 이제 그럴 것 없습니다. 계약대로 당신이 마력을 키우는 것까지 뭐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같이 전쟁을 하자고 약속한 적은 없어.”

케이든이 잡힌 팔목으로 도리어 가까이 다가오며 말했다.

“뻔뻔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로하나의 떨리는 목소리를 듣고는 케이든이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카르크족의 악스톤마저 죽여서 황제의 눈에 들었다가, 이렇게 다시 배신하는 걸 보면 알 텐데.”

케이든의 목소리는 담백하고도 냉정했다.

“나 원래 뻔뻔합니다. 그런 중에 예의 바른 척하느라 오랜 시간 좀 힘들었던 것 같네.”

숨결이 닿을 듯 가까워진 거리에서 두 눈동자가 일렁이며 마주쳤다. 숨을 쉴 수 없는 긴장이 흘렀다.

“그래도 최소한의 양심은 있어서 날 미워하라고 한 겁니다. 원치 않으면 지금에라도 도망을 쳐도 좋겠지만…….”

케이든이 잡힌 팔에 살짝 힘을 주자 이번에는 로하나가 딸려 올라갔다. 제 몸 위에 그녀를 거의 올리다시피 한 채 앉은 케이든이 흑안으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계약은 계약, 지키실 건 지키셔야죠.”

순간, 흔들리는 그의 눈을 보면서 로하나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렇군요.”

그녀가 애써 태연을 가장한 미소를 지어 올리자 케이든 역시 옅은 미소로 응대했다.

“솔직하시니 좋네요.”

“전 늘 솔직했습니다.”

“저와의 관계에 있어서도?”

“엄청나게 솔직했죠.”

케이든이 그녀를 더 끌어당기자 이제는 아예 상체가 바짝 붙었다. 입술이 닿을 듯 가까이 다가온 얼굴이 알 수 없이 복잡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로하나는 그새 조금 거칠어진 숨을 내쉬었다.

순간, 10여 년 전 히스가 했던 말이 떠올라 케이든은 속으로 헛웃음을 지었다.

<너도 언젠가 이런 뻔뻔한 상황에 처하게 되면 날 이해할 거다.>

“뭐예요?”

“갑자기 옛날 생각이 나서.”

그때였다.

똑똑.

매우 조심스럽지만, 그러나 매우 단호한 노크 소리가 울려 퍼졌다.

로하나는 대번에 그를 뿌리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케이든은 마지막까지 버티다가 정말 최후의 통첩으로 울려 퍼진 노크 소리를 듣고 나서야 피식 웃으며 겨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이따 뵙죠.”

로하나는 선뜻하게 움직여 나가는 케이든의 뒷모습을 말없이 바라봤다.

그러다 시선을 돌린 테이블에는 이슬라가 건넸던 자료가 있었다. 가는 손가락이 천천히 책장을 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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