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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저희는 언제 돌아가죠? 지금은 너무 늦었으려나.”
자정이 넘어가는 시간이었다.
‘이렇게 피곤하고, 이렇게 지쳤으면서도 당신은 곧 돌아가자고 하는군.’
히스가 난처하게 눈을 내리며 웃었다.
“글쎄요. 그러다가 병나십니다, 정말로. 해가 뜨는 대로 출발하죠.”
욱신.
마음이 아파 오는 것이 어이가 없어 히스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아, 그렇지. 히스 힘든 건 생각을 안 하고 내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했네요.”
타닥타닥, 벽난로가 차차 꺼져 갔다.
“케이든은 괜찮겠죠?”
차마 말하지 못했던 질문을 불쑥 던진 그녀의 속눈썹이 파르라니 떨렸다. 아마 밤 내내 걱정한 모양이었다.
“당연하죠. 전서구에도 멀쩡하다고 써서 보냈잖아요?”
이미 한번 안심시켰으나 그녀는 그래도 불안해 보였다.
“잠시 물 가져올게요.”
히스가 어떻게든 미소로 안심시키고 다녀왔을 때 그녀는 그대로 웅크린 채 잠이 들어 있었다. 마리앤이 준 약이 독할 텐데 그녀치고는 오래 버틴 셈이었다.
히스는 조용히 그녀를 안아 올렸다. 머리카락 한 올도 흐트러지지 않게 아주아주 조심히.
급하게 뛰쳐나온 흔적이 있는 침대 위에 천천히 그녀를 뉘었다.
눈가의 상처를 쓸며 히스는 질끈 눈을 감았다. 그가 해야 할 일은 예나 지금이나 같았다.
케이든 델클리프에게 충성한다.
그러니 그녀를 보호한다.
다른 생각은 하지 않는다.
무던히도 되뇌었던 말을 다시 되뇌며 조심스럽게 그녀 위로 담요를 덮었다.
지금의 꿈자리는 아까보다 조금이라도 편하길 바라며.
*
늦은 밤, 전쟁의 후유증으로 도시는 시끄러웠다. 아직 흙먼지와 피로 범벅이 된 전투복을 갈아입을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케이든을 보며 이슬라가 술잔을 건넸다.
“한잔하실래요?”
인명 피해가 만만치 않았다. 재산은 말할 것도 없고. 그래도 왕국이 궤멸할 위기에서 버텼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는 건지.
케이든이 잔을 받아 마셨다. 탈 것같이 독한 술이 목울대를 지나 가슴으로 내려갔다. 좀 나았다.
“국왕의를 오게 할까요?”
“이 정도는 괜찮습니다.”
그렇게 대답할 줄 알았다는 듯 이슬라는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옆에 선 그를 올려다보았다.
“의원을 부를 겁니다. 침실에서 치료받으세요.”
더 아무 말 하지 않은 그는 다시 시선을 돌렸다. 시선이 향한 쪽은 남쪽이었다.
“히스가 곁에 있으니 괜찮을 겁니다.”
“압니다.”
“공작 부인은 정말 어딘가 특이한 사람이더군요.”
이슬라는 저도 모르게 말을 이어 갔다. 아까 있었던 일을 고백했는데도 케이든은 미간을 좁히고 눈썹을 올릴 뿐, 별다른 말이 없었다.
“칼라드리우스가 공작을 도왔다고 들었어요.”
“예.”
이슬라는 얇은 입술을 습관처럼 깨물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죠.”
“제가 하지 않은 일이라는 건 확실합니다.”
케이든이 시녀들이 내온 젖은 수건으로 칼을 닦으며 말했다. 털썩 소파에 주저앉자 탄탄한 근육이 더 섬세하게 보였다.
“부인께 특별히 전달하신 거나…….”
“히스에게 듣기로 늘 소리를 듣는다고 했답니다. 아주 예전에 수도에 칼라드리우스가 처음 나타났을 때부터. 그땐 설마 그 소리가 그 소리일 줄은 몰랐다는데.”
“그렇군요.”
“현신인 경우에는 그를 다스릴 수 있는 힘을 얻는 대신 언제 그에게 죽임을 당할지 모른다고 알고 있습니다.”
이슬라는 의외의 부분까지 이미 알고 있는 그를 보며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에요, 그건.”
이슬라는 그런 위험 부분을 제외한 채 로하나에게 자료를 넘긴 것을 떠올렸다. 그녀가 그것까지 알지 못하게 하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오랜 경험으로 보았을 때 케이든이 로하나를 보는 눈이나, 로하나가 그를 보는 눈은 당연한 것을 말했기에.
로하나 하노버는 분명 카르크 편에 설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된다면 그녀의 힘이 유용할 것이다.
“확실한 건 그녀가 우리 편에 서 줘야만 할 것 같다는 거예요. 그걸 보장할 수 있나요?”
케이든은 칼날을 깨끗이 닦은 수건을 툭 수반 옆에 던졌다.
“글쎄요.”
날카로운 턱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그 말에 이슬라의 녹안이 흔들렸다.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그들을 처음 보았을 때 느껴졌던 가벼운 질투심이 동정으로 바뀌어 갔다.
그들이 그렇게 마냥 괜찮을 리가 있겠는가. 결론이 어떨지 훤히 보이는 관계가 갖는 한계를 모를 나이도 아니었고.
이슬라가 천천히 눈을 깜빡이다 입을 열었다.
“오늘 내린 모든 결정.”
케이든이 테라스 밖을 향하고 있던 시선을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저희 샤톤웰을 위했던 것, 카르크족을 위했던 것, 잊지 않겠습니다.”
이슬라는 흑안을 똑바로 마주하더니 천천히 무릎을 내렸다.
한쪽 무릎을 내리고 허리와 고개를 숙이는 샤톤웰의 가장 높은 격식의 인사였다.
“여왕 전하.”
“세린 공주를 구해 주신 것, 노프탈의 군대를 바로 파병해 주신 것, 결정적인 순간 황제의 군대를 쫓기보단 궁과 수도를 수호해 주신 것.”
목소리가 조금 떨렸지만 발성은 컸고 발음은 정확했다.
“샤톤웰의 여왕으로서, 무슨 일이 있든 노프탈의 영주인 케이든 필립 델클리프의 편에 설 것을 맹세합니다.”
케이든은 잠시 미간을 좁힌 채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러다 결국 그도 무릎을 굽히고 칼을 꺼내 들었다.
가장 높은 예였다.
“너무 그러지 마십시오, 근데.”
무너지던 절벽을 떠올리며 케이든이 살벌하게 말했다.
“저는 이제 한 가지만 보면서 갈 것이고…… 다음에는 세린이라고 해도 제가 접어 줄 수 있을지 확실치 않으니까.”
예의 바른 목소리로 하는 살벌한 소리에 이슬라는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그의 얼굴이 변했다. 이제 주사위는 던져졌고, 그는 더 이상 제국의 예의 바른 황족이 아니었다.
땅거미가 보랏빛으로 어둑어둑 내리기 시작했다.
*
히스와 로하나는 이른 아침부터 달려서 샤톤웰의 궁에 도착했다.
밤새 오렐리아와 손잡은 케이든을 떠올리며 잠을 설친 로하나는 아직도 정확히 어떤 감정을 가지고 어떤 행동을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세린을 구하기 위해서는 그게 최선이었을 것이란 걸 안다. 아린족인 그녀가 여기에 설 자리가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여름날이니 뭐니 하기 전에 지금에라도 떠나게 해 달라고 해야 하나.
로하나가 잠시 넋을 놓아 몇 번을 넘어질 뻔하자 히스가 너무 불안해하며 겨우겨우 도착한 길. 그래도 그녀가 여전히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그들을 먼저 맞이하러 나온 것은 놀랍게도 이슬라 여왕이었다.
“여왕 전하.”
로하나가 무릎을 굽혀 인사를 올리자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였다.
기둥 사이로 누군가 달려오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굳이 소리나 향 때문이 아니라 달빛 아래에서 마주쳤을 때부터 각인된 듯 알 수 있는 그의 기척이 있었다.
반가우면서도 어쩐지 고개를 들기가 어려웠다. 내리깐 로하나의 시선으로 새하얀 복도 위를 뛰듯이 오는 그의 군화가 보였다.
그리고 그 옆으로 푸른 드레스 자락이 보였다.
어쩜 그녀는 푸른 드레스를 그리 좋아하는지. 작디작은 발끝이 살짝 보이는 것까지도 그때와 참 비슷했다.
바르디는 환하게 웃는 얼굴로 그 여름의 끝자락에서 그녀를 소개했다.
<인사해, 오렐리아야.>
세린을 구하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고 새벽부터 되뇌면서 왔건만, 노력이 무색하게 그녀의 발치가 보이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울렁였다.
그런데 순간 무언가가 로하나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케이든이 오던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렇게 급하게 오고 있었으면서 덜컥, 멈추어 선 군화.
로하나는 천천히 시선을 끌어 올려 그를 올려다보았다.
짙은 눈이 그녀와 마주쳤다. 빨려 들어갈 듯한 오묘한 흑안이 그녀에게 닿을 듯 닿지 못할 듯 흔들렸다.
“덕분에 목숨을 건졌습니다.”
냉정한 목소리가 그녀를 향했다. 로하나는 잠시 어이가 없어 그를 바라보다가 뒤따라오던 오렐리아를 바라보곤 다시 시선을 돌렸다.
“괜찮냐고 안 물어봐요?”
로하나가 웃으며 물었다. 케이든은 말없이 길고 날카로운 눈을 천천히 감았다 떴다.
“괜찮으십니까.”
칼 같은 그의 태도와 옅은 미소가 걸린 얼굴. 그가 한 걸음 더 멀어졌다는 것을 보여 주는 행동에 로하나는 옅게 뭔가가 가슴을 저미고 가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이러지 말자.
“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잠시 흐르던 어색한 침묵을 먼저 깬 건 케이든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당신은 날 살려 주는 데 도가 텄군요.”
케이든이 조금 흐리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상황은 히스에게 들었습니까?”
“들었어요.”
‘고작 그런 동맹에 제가 동요할 것 같으셨어요?’
로하나는 말하려다가 그만둔 말을 속으로만 삼켰다. 케이든은 그런 그녀에게 닿을 듯 가까이 섰으면서도 냉랭한 목소리를 유지했다.
“오렐리아를 제대로 처분하기 어려울 수도 있겠습니다.”
“네.”
“그럼.”
먼저 몸을 돌려 지나간 건 케이든이었다. 로하나는 순간 멍해진 얼굴을 재빨리 감추느라 힘을 썼고, 모여 있는 일행들 중 정적을 깬 건 프란츠였다.
막 계단을 올라오던 그는 씁쓸하면서도 능글능글한 특유의 미소를 입가에 띄우며 인사를 건넸다.
“공작 부인, 덕분에 목숨을 건졌습니다.”
R. D.의 복장을 하고 있었지만 마력을 쓰지 못했던 남자. 무슨 영문인지 황궁군과 싸웠던 그였다.
“프란츠 소예 후작.”
로하나가 제대로 호칭하자 만족스럽다는 듯 씩 웃은 그가 케이든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별말씀을요.”
“공작 부인께서 전투까지 나서실 줄은 진짜 몰랐습니다. 반가워요.”
프란츠가 옅은 금발을 흩트리면서 설렁설렁 손을 내밀었다. 얼떨결에 악수를 하자 강한 힘이 느껴졌다.
그때 오렐리아가 그들을 향해 걸어왔다. 오랜만에 보는 오렐리아는 여전히 아름다웠고 당장이라도 모든 것을 엎고 싶을 만큼 불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