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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죽일 흑막과의 계약결혼-86화 (86/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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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님, 좀 어떠신가요?”

단층으로 된 작은 주택은 조용하고 깨끗했다. 주변에는 넓은 목초지가 있었는데 특별히 가축을 키우지도 않는 듯 조용했다.

오로지 나이 든 부인이 홀로 있을 뿐이었는데 그녀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정말 도와드리지 않아도 될까요?”

로하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소박하지만 베이지색 드레스는 충분히 혼자 입을 수 있는 것이었다.

여기저기 멍과 찰과상으로 엉망인 몸에 뜨거운 물을 머금은 스펀지가 닿자 고통에 아우성쳤다.

로하나는 미간만 조금 찌푸렸다 말 뿐, 천천히 피를 닦아 냈다.

겨우겨우 몸을 이끌고 옷을 입었을 때였다. 부인이 준 약 때문인지, 지나친 긴장이 풀려서인지 순간 정신이 몽롱했다.

로하나는 침대에 앉았다가 그대로 수마에 빠져들어 버렸다.

퍼뜩 정신을 차렸을 때 이미 해는 져 밖이 깜깜했다. 별도 달도 없이 어두운 하늘에 악몽과 함께 일어난 그녀는 서둘러 땀을 닦았다. 숄을 걸치고 방을 나섰다.

“레이디.”

벽난로 앞 의자에 깊숙이 기대앉아 있던 히스가 로하나를 보더니 놀란 목소리를 하며 일어섰다. 등받이가 길어 거의 누워 있다시피 했던 그는 노프탈에서와는 또 다른 모습이었다.

“히스.”

히스 역시 씻은 후인지 푸른 하늘색 머리카락을 풀고 있었다. 그가 서둘러 부드러운 얼굴을 했다.

“걱정 마세요. 다 잘되었습니다.”

많은 말을 쏟아 내려던 로하나의 입술이 멈췄다.

“주무시는 줄 알고 말씀을 못 드렸어요. 샤톤웰은 사수했다고 합니다. 전투는 일단락되었어요. 세린도 물론 무사해요.”

순간, 로하나의 커다란 눈동자에 눈물이 고였다. 히스가 웃으면서 미간을 찌푸렸다. 후두두 눈물이 그대로 떨어졌다.

히스는 당황하지도 않고 제 옆의 손수건을 꺼내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그 정도는 당연히 해낼 사람입니다. 걱정이 많으셨나 봐요.”

로하나의 몸이 떨렸다. 히스는 로하나를 부축해 제가 앉아 있던 긴 의자에 앉혔다.

“히스…… 히스는 좀 어때요?”

옆의 의자에 나란히 앉는 로하나를 보며 히스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제가 먼저 여쭤봤어야 하는데요.”

로하나는 고개를 저었다. 반짝이는 작은 모닥불 빛이 아스라하니 예뻤다. 눈물이 계속 쏟아질 것 같았지만 로하나는 참았다.

“세린 공주가 무사해서 다행이에요.”

그녀가 다시 한번 말했다.

“네.”

빙그레 웃는 그의 반달눈을 보며 로하나는 저도 모르게 조금 웃음을 터뜨렸다.

로하나의 작은 목소리에 히스의 얼굴이 조금 어두워지더니 이내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기운을 차렸다.

“그러니 저희끼리라도 간단하게 축하를 할까요?”

히스가 와인 잔을 들며 눈으로 마시겠느냐고 물었다. 로하나는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와인을 따른 잔을 넘긴 히스가 잠시 기다리라는 손짓을 하고 사라졌다.

로하나는 천천히 와인을 입에 흘려 넣었다. 따뜻한 술기운이 목을 타고 내려갔다.

“좀 드셔야죠.”

돌아온 히스가 의자 앞에 있던 테이블 위에 음식을 내려놓았다.

깨끗하고 하얀 천으로 감싼 김이 모락모락 나는 빵, 몇 가지 치즈와 푸른 채소 수프가 눈에 들어왔다. 마음이 편해지는 소박한 식탁이었다.

“잘 먹을게요.”

벽난로 앞 커피 테이블에서 식사라니. 꼭 퇴근하고 텔레비전을 보면서 저녁 먹던 시절이 떠올라 로하나는 속으로 웃었다.

편하다.

그때였다. 히스가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더니 갑자기 가까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피하지도 못하고 마주친 연회색 눈동자를 보며 로하나는 얼어붙은 듯 그대로 멈췄다.

다가온 그림같이 긴 손가락이 그녀의 눈가를 조심스럽게 쓸었다.

“상처가…….”

무슨 영문인지 알자 로하나는 조금 웃으며 숨을 내쉬었다.

“아, 좀 다쳤더라고요.”

그러다 문득 아차 싶어 탄식을 내뱉었다.

“히스는 괜찮아요? 나보다 훨씬 힘들 텐데, 많이 다쳤죠?”

계속 온몸으로 그녀를 안고 구르고 부딪쳤던 그였다.

히스는 대답이 없었다.

예의 미소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린 얼굴이 멀어지지도 않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히스는 대답이 없었다.

“히스?”

그녀의 목소리에 정신이 든 듯 히스가 순간 눈을 깜빡였다.

“어디 아파요? 많이 안 좋은 거죠?”

그럴 리가 있겠는가. 히스는 빙그레 웃고 다시 반듯하게 자리에 앉았다.

“아닙니다.”

잠시 약 기운에 제정신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좋은 약을 준비하게 할게요.”

히스가 가볍게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케이든의 말을 떠올리며 히스는 잠시 눈을 감았다.

<그녀에게 좋을 게 뭐가 있지?>

감은 눈동자 위로 벽난로의 따뜻한 불이 덮여 왔다.

<결국 팔다리가 잘려 나가는 전장에서 싸우기밖에 더 하겠어?>

“치유력이 흉터까지 막는 건 아니니까요.”

“괜찮은 거 맞아요?”

로하나는 어쩔 줄 몰라 했다.

“레이디.”

아무래도 안심을 시킬 필요가 있어 히스가 찬찬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 정도야 아무것도 아니었다.

“정말 괜찮습니다.”

한참 마주친 눈길에 그녀는 그제야 조금 안심이 되었는지 남은 와인을 비웠다.

아무런 장식 없이, 귀족인 것이 티가 나지 않는 옷을 입은 그녀는 조금 낯설어 보였다.

한동안 그는 술잔을 기울였고 로하나는 드문드문이긴 해도 제법 히스가 가져온 음식을 잘 챙겨 먹었다.

히스는 그런 그녀를 너무 빤히 바라보지 않도록 벽난로로 시선을 고정했다.

“그러고 보니, 히스.”

같이 벽난로를 쳐다보는 그녀의 옆얼굴에 그림자가 졌다.

“R. D. 일은 어떻게 된 거예요?”

올 질문이 왔구나 싶어 히스는 입술을 축이며 천천히 입을 뗐다.

“저도 정확한 정황은 모릅니다만…….”

아까 광장에서 케이든과 스치듯 만난 것과 공주가 그 앞에 안겨 있었던 것을 설명하며 말을 이었다.

“R. D.가 바르디 쪽을 쳐서 세린을 재납치라도 한 모양입니다. 바르디 쪽에도 R. D. 쪽 첩자가 있었던 모양인데.”

로하나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프란츠 소예.

“짐작 가는 사람이 있습니까?”

“네.”

마른 대답에 히스는 미간을 찌푸리더니 어차피 알게 될 것 할 수 없다는 듯 빠르게 말했다.

“아마 세린을 무사히 돌려받는 조건이 R. D.의 합류였던 것 같습니다.”

로하나는 천천히 남은 와인을 입으로 흘려 넣었다. 히스가 그녀의 목울대가 다 움직이는 것을 보고 다시 입을 떼는 순간, 로하나가 먼저 입을 열었다.

“오렐리아가 궁에 와 있겠군요.”

차분한 얼굴은 다시 예의 공작 부인으로 돌아와 있었다.

“네.”

히스가 저도 모르게 긴장하며 대답했다.

뭐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하는 말은 하지 않았다.

히스는 그렇게 눈을 떼지 못하던 로하나를 쳐다도 보지 못했다.

그가 나서서 죄송하다 어쩌다 끼어들 문제가 아니었다. 와인 말고 더 독한 것이 필요했다.

“히스.”

“네.”

“그러고 보니 여태 이것도 모르네요.”

뭘 말입니까? 하는 눈빛에 로하나가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담담한 목소리가 차분하게 이어졌다.

“케이든과는…… 어떤 사이인 거예요?”

히스는 잠시 들고 있던 잔을 만지작거렸다.

“긴 이야기가 될 텐데요.”

“밤은 긴데요, 뭐.”

로하나는 슬리퍼를 벗더니 소파 위로 다리를 올리고 양 무릎을 감싸 안았다. 옆으로 앉은 그녀가 작은 머리를 가만히 나무 등받이에 기댔다.

“케이든과는 10년 전에 여기 근처에서 만났습니다. 전 당시엔 신흥 세력이었던 R. D. 의 수장이었죠.”

갑작스러운 폭탄선언에 로하나가 순간 편하게 웅크리고 있던 몸을 그대로 일으켜 세워 앉았다. 히스는 피식 웃으며 얘기를 계속했다.

“노프탈의 오랜 지주들과 함께 더스틴 델클리프의 아들을 여기로 데리러 왔었습니다.”

히스는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황실에서 도망한 그가 여기 자작의 도움을 받아 몸을 숨기고 있었거든요.”

로하나의 미간이 좁혀졌다.

“그리고 그 집이 사실 오렐리아 브리의 집입니다.”

눈썹을 움찔한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사실 누구나 아는 이유였지만 히스는 말을 아꼈다.

“오렐리아가 자기를 노프탈로 데려가 달라고 떼를 썼고, 은신처를 제공한 자의 영애였던 오렐리아의 부탁을 아예 거절할 순 없었기에 저희 셋은 노프탈로 함께 돌아왔죠.”

벽난로에서 타닥 하며 나무가 타는 소리가 들렸다. 춥지 않아 조그맣게 켜 놓은 불이 아련한 빛을 내뿜었다.

“그 후론 계속 전략과 싸움의 연속이었습니다. 수많은 견제 세력을 숙청해 나가면서 케이든은 세력을 불렸습니다. 아이였는데도 아이 같지 않았어요. 가끔은 저보다도 어른 같을 때가 있었고, 바닥에서 굴렀던 저보다 더 거칠 때도 있었죠.”

오랜만에 그 특유의 여유롭고 다정한 목소리였다.

“히스, 개인적인 질문 하나 해도 될까요?”

잠시 생각을 정리하는 것처럼 보이던 로하나가 물었다. 히스가 고개를 끄덕이자 로하나는 조금 망설이더니 입을 열었다.

“히스는 어째서 R. D.를 나오게 되었어요?”

조금 당황했는지 히스의 눈빛이 흔들렸다.

“케이든은 늘 제가 ‘그만뒀다’고 말하지만…….”

히스는 와인 한 잔을 쭉 비우고는 대답했다. 옛 기억에 미간이 좁아졌다.

“그건 아닙니다.”

“무슨 일이 있었는데요?”

가늘어진 눈은 과거를 더듬었다.

“케이든이 어떻게 제국의 신뢰를 받게 되었는지는 잘 알겠지요?”

히스는 과거를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 ‘악스톤’ 처단 사건을 로하나는 잘 알고 있었다. 그녀가 그의 얼굴에 떠오른 어두운 빛을 직감적으로 느꼈을 때였다.

“그 일이 있고 난 뒤로 R. D.가 두 갈래로 갈라졌던 거죠. 아시다시피 라자르는 저희와 반목한 세력의 핵심이고요.”

“케이든이 악스톤을 제거한 것이 카르크족들에겐 뼈아픈 일이었겠지요.”

보랏빛 눈동자를 들여다보는 순간, 히스는 말문이 막혔다.

“그렇죠.”

“케이든이 그런 일을 했는데도 히스는 어떻게 그 옆에 남아 있는 거죠?”

“글쎄요, 저도 질 싸움은 하는 편이 아니라서. 이길 만한 사람의 판단을 믿는다고 봐야겠죠?”

“케이든이 그런 일을 했음에도 카르크 편이라고 믿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어떻게……?”

원작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그를 믿지 못하는 로하나였다. 제 일생에서 같은 종족의 죽음에 앞장선 남자를 어떻게 믿는다는 것인가.

뭔가 정보를 다 꺼내지 않았다는 생각에 로하나는 재차 질문을 던지려다 이내 멈추었다. 히스의 얼굴이 눈에 띄게 어두워져 있었기 때문이다.

“미안해요, 내가 너무 캐물었네요.”

“아니요, 언제든 환영입니다. 이렇게 못 할 말은 언제든 멈추지 않습니까.”

너스레에 로하나가 오랜만에 푸훗 웃음소리를 냈다. 두런두런 이런저런 이야기가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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