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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죽일 흑막과의 계약결혼-85화 (85/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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윙.

이명이 울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억겁 같은 찰나였다.

로하나는 히스의 품 안이었다. 그가 완전히 그녀를 감싸지 않았으면 몸이 완전 박살 났을 것이었다.

“히스!”

깜짝 놀라 그를 흔들어 깨웠다.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더니 순간 로하나를 보며 안도의 빛을 보였다.

“괜찮아요?”

고개를 끄덕이던 그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그런데 가늘게 뜨고 있던 눈동자가 로하나 뒤의 광경을 보더니 충격에 빠진 듯 크게 확장됐다.

히스를 따라 겨우 고개를 든 로하나는 눈앞의 광경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멀지 않은 곳에 땅이 갈라져 있었다.

함정.

바르디와 경비대는 그 폭탄으로 만든 절벽을 뒤로하고 빠르게 도망하고 있었다.

갑자기 생겨난 크레바스 밑으로 황실군이고 왕국군이고 할 것 없이 수많은 사람들이 빨려들듯 떨어져 내렸다.

“케이든!”

로하나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노랫소리도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비명과 소란 중에 크게 갈린 땅에서 계속해서 연쇄 폭발이 일어났다.

덜덜 몸이 떨렸다.

본능적으로 공포에 질린 눈에서 눈물이 후두두 떨어졌다.

그때였다.

절벽에서 새하얀 새가 솟구쳐 날아올랐다.

*

반드시.

달리는 말에 바짝 붙은 몸은 바람조차 피해 갔다. 케이든은 속으로 되뇌었다.

‘반드시 죽인다, 이번엔.’

어머니가 했던 ‘때를 기다려야 한다’는 말도, 할아버지라는 선황제가 늘 편지를 보내며 했던 ‘네가 돌아와야 한다’는 말도.

아무 소용없었다.

때를 기다리다가, 또다시 그 비슷하고도 비참한 상황에 처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 가능성을 갖고 싶지 않았어. 돌아와야 한다니, 도대체 뭐가 좋다고 그곳으로 다시 돌아간단 말인가.

나와 내 사람들을 보호하는 것으로 충분한 지난 15년이었다.

케이든이 미간을 좁혔다.

눈 감고 귀 닫고, 최대한 모두가 ‘다치지 않는’ 쪽으로 살자고 생각했다.

같은 카르크족의 악스톤마저 배신하고 제국의 충성하는 개라고 해도 상관없었다.

산 사람은 살아야지.

결국 싸우기 위해 목숨을 내놓아야 할 수많은 사람들을 생각하면 전투를 일으키는 것조차 무모하게 느껴졌었다.

폐에 피가 들어차 숨이 차던 순간이 아직도 꿈에 생생한데 나 스스로도,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수많은 사람들도 그렇게 죽어 나갈 것이 사실은 두려웠었다.

“델클리프 경! 속도를 좀! 부대가 늦습니다.”

왕국군의 수장으로 보이는 자가 고함을 질렀다. 엄호할 수 없다는 것이겠지. 상관없었다.

그러나 더는 아니었다.

흩날리는 은발 아래 짙은 눈매는 흔들리지 않고 한곳만을 쳐다보았다.

이렇게 비겁하던 나도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이유가 생겼으니까.

‘이대로라면 그녀가 어디에서도 쉴 수가 없어.’

로하나가 어느 곳에서도 편하게 쉴 수 없는 상황을 끝낸다.

‘이대로라면 그녀와 함께할 수 없다.’

로하나를 쳐다보지도 못하는 지금의 삶을 끝낸다.

얼음 기둥이 치솟아 오르더니 케이든의 속도보다 더 빠르게 앞선 황실군 말의 다리를 바닥에서부터 옭아맸다.

높은 속도로 도망을 치고 있던 말들의 발이 묶이면서 관성으로 병사들이 딱딱한 암석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운 좋게 얼음 기둥을 피해 간 자들이 케이든과 스치며 푸른 칼날에 베였다.

‘누구든 방해하는 자가 없도록 황제가 될 것이다.’

황실군은 거의 인간 방패가 되어 케이든의 속도를 늦추고 있었다.

‘고의로군.’

수장이 되어서 가장 앞서 도망하는 모양새라니.

케이든이 미간을 좁히며 인상을 쓰는 그때였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앙.

갑작스러운 굉음에 지축이 흔들렸다. 얼음과 마력으로 중심을 잡아 보았으나, 순간 바닥이 무너지고 있는 걸 알았을 때는 아차 싶었다.

순간의 판단이 모든 것을 가름한다.

케이든은 그대로 말의 고삐를 버리고 검과 단검을 꺼내 들어 벽으로 꽂아 내렸다.

엄청난 충격과 무게가 팔목에 실렸다. 기존의 엄청난 속도와 갑작스러운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몸이 계속해서 벽을 따라 추락했다.

‘이러다간 검이 부러지겠어’.

황실군, 왕국군 할 것 없이 엄청난 수의 군인들이 바닥이 보이지 않는 절벽 아래로 추락하고 있었다.

마력을 이용해 얼음 기둥을 끌어 올리자 다행히 많은 군인들이 충격을 받을지언정 추락은 피하고 기둥 위로 올라섰다.

제기랄.

검에서 뿜어지는 푸른빛이 흰빛으로 바뀌었다.

제기랄!

한 손으로 마력을 쓰던 것을 멈추면 저 많은 인력이 다시 떨어져 죽을 것이다.

로하나의 얼굴이 떠올랐다.

황제가 된다.

그 방법밖에는 없다.

케이든은 이를 악물었다. 온몸의 근육이 불거지며 몸을 올리는 순간이었다. 탁 소리를 내며 암석이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샤톤웰 특유의 암석 지형.

칼을 잘못 꽂으면 그대로 갈라질 것이었다.

얼음을 포기해.

라자르의 목소리가 들린 듯했다. 케이든은 어이가 없어 그 와중에도 실소를 터뜨렸다. 이 와중에 라자르 목소리가 왜 떠오르는가.

닥쳐.

나는 내 방식으로 이긴다.

그때였다.

익숙한 돌풍이 위에서 느껴졌다. 순간, 그가 목에 핏대가 서도록 힘을 주며 위를 올라보았을 때 눈이 마주쳤다.

아름다운 오팔 보석 같은 눈이었다.

<아름답고 소름 끼치는 노랫소리예요.>

로하나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아름다운데 소름 끼칠 수가 있나?>

그의 질문에 로하나는 특유의 우아한 미소를 지었었다.

<당연하죠.>

케이든이 암석에 찍어서 박고 있던 왼손을 놓자마자 공중으로 떨어지는 그의 몸을 칼라드리우스가 아무렇지 않게 제 등에 태웠다.

그대로 마력을 이용해 얼음 기둥을 끌어 올려 순식간에 모두가 절벽에서 솟구쳐 올라갔다.

밖에서도 바람이 강하게 불었다. 높은 곳에 있자 시야가 확보되었다.

바르디.

케이든은 날카로운 눈으로 황제를 좇았다.

기특할 만큼 빠른 속도로 멀어진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뒤를 돌아보고 있었다. 옆의 기사들이 그를 재촉하듯 바짝 붙어 말을 달렸다.

‘반드시 죽인다.’

케이든이 뛰어내리려고 하는 그 순간이었다.

돌풍을 일으키며 절벽 위에 멈추어 선 칼라드리우스가 갑자기 고도를 확 높였다.

뛰어내리지 못한 채 반사적으로 욕을 내뱉는 순간, 마물이 고개를 돌려 케이든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오팔을 박아 놓은 듯 오묘하기 그지없는 시선이 샤톤웰의 성안으로 향했다. 케이든의 미간이 좁혀졌다.

똑바로 선 케이든은 칼라드리우스를 바라보았다.

‘이미 R. D.를 영입하는 순간 그런 완벽한 헌신은 물 건너갔어.’

머릿속의 소리가 가슴을 헤집었다.

바르디가 멀어지고 있었다. 어쩌면 지금이라도 뒤쫓아 죽일 수 있을지도 몰랐다. 남은 군대로 어떻게든.

그렇지만.

‘지금 돌아가지 않으면 샤톤웰은 끝난다.’

칼라드리우스의 눈이 말하고 있었다. 케이든이 내리떴던 눈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로하나.’

케이든의 눈을 본 칼라드리우스는 그제야 오팔 눈을 되돌리더니 넓고 긴 날개를 폈다. 돌풍이 불었다. 칼라드리우스가 순식간에 하강해 케이든을 내려놓았다. 피에 젖은 무거운 부츠가 땅에 부딪쳤다.

‘조금만 기다려.’

정말 잠시만.

“성으로 돌아간다!”

명령이 떨어지자 왕국군은 어느 때보다도 빠르게 박차를 가했다.

반드시 해결할 테니까.

뛰어내리는 케이든 위로 칼라드리우스가 빠르게 하늘 더 높은 곳으로 치솟듯 올라갔다.

황제가 될 것이니까.

*

로하나가 비명을 지르며 입을 가리는 순간, 히스가 그녀를 안아 올렸다.

칼라드리우스가 절벽에서 솟는 것을 보면서, 그녀의 몸은 히스에게 안겨 말에 실렸다. 그는 망설임 없이 반대쪽으로 말을 달렸다.

“히스!”

뭐 하는 거야! 도망가면 어떻게 해!

소리 지를 정신도 없는 사이 히스가 뒤를 돌아보더니 그녀의 귓가에 외쳤다.

“케이든은 무사합니다!”

목소리가 날카롭고 험악했다. 다시 돌아본 눈에 케이든이 칼라드리우스 위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빠르게 멀어지는 모습에 알 수 없는 눈물이 흘렀다.

“꽉 잡으세요.”

바위를 깰 기세로 말이 달리기 시작했다. 히스가 최대한 몸을 숙이는 바람에 그 앞에 앉혀진 로하나는 말을 껴안다시피 하게 되었다.

그녀는 눈을 감았다. 수많은 포탄과 비명을 멀리하면서.

영문 모를 눈물이 쏟아졌다.

얼마나 달렸을까.

샤톤웰의 괴석이 사라지고 활엽수가 울창한 숲에 도착하자 말도 지쳤는지 속도가 떨어졌다. 그녀를 덮다시피 안고 있던 히스의 몸이 떨어지고 말이 서서히 멈추어 섰다.

로하나는 감고 있던 눈을 천천히 떴다.

아직 무성하진 않아도 제법 새싹이 많이 오른 아름다운 숲이었다.

오랜만에 말굽이 흙을 밟는 소리를 들으니 아까의 모든 일이 꿈결처럼 느껴졌다.

로하나는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히스는 그런 그녀를 보며 아주 흐린 미소를 짓고는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어디로 가는 거예요?”

“노프탈로 가야 했는데…….”

히스가 말끝을 흐렸다.

“아무래도 그쪽으로 가는 길에 전투가 있을 수도 있을 것 같아서.”

바르디가 그렇게까지 철저했던가.

로하나는 지치는 마음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넓은 손바닥이 그녀의 머리를 쓸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여기에도 제 친구들은 많으니까.”

로하나는 조금 놀란 듯 눈을 살짝 크게 뜨더니 이내 다시 시선을 앞으로 돌렸다.

히스의 눈에 익숙한 마을 어귀가 들어왔다. 지독한 우연에 그가 피식 웃었다.

이곳은 남부의 켈리.

프란츠 소예의 영지였으며, 카르크족이 그나마 가장 많이 남아 있는 제국의 영지 중 하나였다.

그리고 오렐리아 브리의 고향이기도 했다.

이 말을 해야 할까.

히스는 씁쓸하게 생각하며 천천히 말을 몰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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