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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죽일 흑막과의 계약결혼-84화 (84/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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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이 한 뼘도 더 되는 검이 그녀 앞을 가로막았다.

순간적인 힘에 밀려나지 않기 위해 왼발이 재빠르게 중심을 잡았다.

큰 키에 두꺼운 몸은 황제의 붉은 망토와 금빛 갑주로 번쩍였다. 적갈색 머리카락이 바람에 흔들렸다.

바르디 렌트워스.

황제였다.

로하나는 잠시 그를 올려다보았다. 새파란 눈동자가 가늘어져 있었다.

“로하나, 정말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거야?”

로하나의 미간이 움찔했다.

“이렇게까지?”

굳게 다문 턱을 기울이며 로하나가 눈을 치떴다.

“네가 이러면 이럴수록 나는 너 못 놓아줘.”

크고 넓은 몸이 다가왔다. 숨결이 닿을 듯 가까운 거리였다. 검끼리 맞부딪치는 소리가 첨예했다.

로하나는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세상에.”

살짝 찌르면 그대로 터질 듯 도톰하고 붉은 입술이 엷은 미소를 띠었다.

“아직도 그런 식의 말이 나에게 위협이 될 거라고…… 정말로 그렇게 생각해요?”

푸른 눈이 번뜩였다.

“이제 그만하세요.”

그때 바르디가 순간 힘을 풀며 검을 거뒀다. 로하나는 아직 검을 올리고 있었는데도 그의 커다란 손은 로하나의 어깨에 와 닿았다.

여자는 잠시 그런 남자의 손을 쳐다보다 이내 제 손을 들어 옆으로 떨구었다.

검으로 공격할 수 있을 거리였다.

그녀의 머릿속 계산을 모르는 것인지 무시하는 것인지 바르디가 입을 열었다.

“이제 그런 거 아니야.”

떨리는 목소리가 누가 들으면 정말 마음에 상처라도 입은 것 같았다.

“지금이라도 돌아가요. 양심이 있다면 여기에서 멈춰.”

로하나가 속삭이듯 경고했다. 진심이었다.

“나는 너도 여기도 포기 못 해.”

푸른 눈이 속속들이 핥듯이 로하나를 훑더니 결국 해야 할 말을 한다는 듯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케이든이 누구랑 손을 잡았는지 알기는 해?”

로하나가 눈썹을 움찔했다.

“지금 저 프란츠 소예가 왜 여기 있는 것 같아?”

멀리서 포성 소리가 계속되었다.

“로하나, 네가 있어야 할 곳은 거기가 아니야.”

협박인지 꿀이 떨어지는 유혹인지 모를 눈빛이 노을에 비쳤다.

“이제 그만 돌아와.”

로하나가 감았던 눈을 천천히 뜨자 새파란 눈과 다시 마주했다.

지금 이곳에서 그녀가 불청객이라는 건 그녀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하나 확실한 것이 있다면.

케이든이 했던 말이 이제야 이해가 됐다.

<살려고 도망치던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서 죽고 싶지 않았을 뿐.>

“네 옆은 내가 죽을 곳도 아니야.”

바르디의 얼굴에 알 수 없는 미소가 번졌다.

“아쉽네.”

순간, 방심한 틈을 타 챙 하는 금속 소리가 울려 퍼졌다.

로하나의 선제공격이었지만 바르디도 검술로 쉬운 상대는 아니었다.

경호 부대의 활이 그녀를 향했다.

“꼼짝 마, 아무도.”

그때였다.

검은 화살이 날아와 경고성으로 그 둘 사이의 바닥에 내리꽂혔다.

“뭐야.”

적막을 깬 사이, 마른 땅을 박차고 엄청난 말발굽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경호 부대가 조명탄을 쏘아 올렸다.

검은 화살을 보며 로하나는 숨을 내쉬었다. 말발굽 소리가 멈추자 익숙한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렸다.

“로하나.”

늘 그렇듯 다급한 중에도 다정한 목소리가 그녀를 불렀다. 언제나 그렇듯 보지 않아도 뒤에 그가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온몸에 미세한 전율을 흐르게 했으니까.

“전 괜찮아요.”

로하나의 신호를 아는 것인지 케이든을 보고 나서인지 칼라드리우스가 노랫소리를 다시 내기 시작했다. 가까워지는 목소리가 불길했다.

바람같이 도착한 황실군의 보병이 방패를 땅에 처박듯 내리꽂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순식간에 바르디 뒤로 사열한 군대는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완벽했다.

“제국군은 먼저 국경을 넘어선 왕국에 대해 방어를 하고 있을 뿐이다. 이런 반응은 매우 당황스럽군.”

황제 앞을 순식간에 경호대가 세 겹으로 둘러쌌으나 바르디는 무슨 생각인지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오며 입을 열었다.

“어디 다치셨습니까.”

시선은 바르디에게서 떼지 않으면서 말에서 내린 케이든이 로하나의 옆으로 다가왔다.

턱선을 따라 튄 피가 붉었다. 새카만 망토에 갑주를 입은 모습은 꼭 처음 본 날처럼 익숙하고도 낯설었다.

저도 모르게 케이든의 상태를 살피던 로하나는 눈이 가늘어지는 그를 보며 재빨리 대답했다.

“제 피가 아니에요.”

소예를 가리키는 눈빛에 케이든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케이든에게 문을 열어 준 것으로 보이는 왕국의 사병들이 소예를 데리고 물러났다.

“이제 물러나십시오.”

“나도 싸워요.”

“물러나.”

케이든이 조금 험악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시 따지려는 그녀의 말문은 바르디에게 막혔다.

“로하나, 케이든이 그새 R. D.와 손을 잡은 건 알고 있어?”

순간, 로하나의 미간이 좁혀졌다. 케이든은 아무 반응 없이 그를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케이든, 도대체 저게 무슨…….”

그는 아무 반응 없이 산 같은 넓은 등을 보이며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강철 같은 팔에 몸이 절로 밀렸다.

한편 어느새 남쪽 문에서 쏟아져 나온 왕국군이 케이든 뒤로 사열하기 시작했다.

“쓸데없는 고집 부리지 말고 우리 공녀를 돌려줘. 샤톤웰과 너 그리고 R. D.는 이미 한패인 것 같은데…… 우리 공녀를 들고 네가 협박하는 꼴이지 않아?”

로하나는 원작을 떠올렸다. 결국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구나. 실제로 원작에서는 이 비슷한 상황에서 로하나를 죽게 한다. 선전 포고의 의미로.

아직 여름날까지는 날짜가 남아 있는데.

로하나가 본능적으로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는데 바르디가 말을 이었다.

“이렇게 하지.”

그의 입술에 일순 기대하는 미소가 슬며시 번졌다.

“쓸데없는 오해를 불식시키는 의미로 네가 강제로 결혼한 내 로하나를 돌려줘.”

‘내 로하나’라고 말하며 마주친 푸른 벽안이 광기에 사로잡힌 듯 번뜩였다.

“그럼 우리 황실군이 자비를 베풀어 물러나 주지.”

전군이 술렁여 공기가 울렁댔지만 차분한 그의 뒷모습은 익히 그런 소리를 할 줄 알았다는 듯 미동조차 없었다.

“싫어?”

로하나의 심장이 불안하게 쿵쿵 뛰기 시작했다. 드레고리가 했던 말대로, 그녀도 잘 알다시피 그녀는 여기에 속하지 못했다.

‘이래서 가라고 했구나.’

케이든이 험악하게 물러나라 했던 것을 떠올리자 로하나는 순간 마음이 아팠다. 정확히 왜인지도 모르게.

왜 나를 쳐다보지 않았지?

그가 무슨 의중일지, 갑자기 안갯속처럼 뿌옇게 보이지 않았다.

마주쳐 주지 않는 검은 눈동자가 야속했다.

다시 낮은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울렸다.

“헛소리도 참 길게 하는군.”

케이든의 느른한 눈빛이 서서히 살기로 가득 찼다.

“내 아내다.”

로하나는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강하게 다문 턱에 날카롭게 올라간 깊은 눈매가 사람 같지 않았다.

처음 보았을 때의 모습에 가까웠다.

보자마자 그의 별칭인 하얀 늑대가 떠오르는 모습.

‘아내.’

로하나는 저도 모르게 반지를 끼고 있던 왼손을 쥐었다. 그렇게 많은 시간을 함께하고 밤을 보내면서도 그를 남편이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감히 남의 여자를 달라 말라 하다니…….”

굳이 그렇게 생각하면 불안하기 이를 데 없었으니까.

일부러 잊고 살았다. 로하나는 아까부터 알 수 없이 저며 드는 심장을 애써 꾹꾹 눌렀다.

“제국의 황제가 되어서 그런 헛소리를 해서야 되겠습니까.”

길고 무거운 검이 날카로운 금속 소리를 내며 칼집에서 벗어났다. 새파란 빛이 흔들림이 없었다.

“전군 전투 준비!”

황실군이 검과 창을 겨누었다. 뒤에서 궁수 부대가 활시위를 당기는 소리가 공기를 갈랐다.

그때였다.

케이든이 살짝 뒤로 시선을 돌렸다. 로하나도 뒤를 돌아보자 익숙하고 반가운 얼굴이 보였다.

“히스!”

말을 타고 나타난 히스는 앞의 적들을 갈기갈기 찢어 버릴 표정이었다.

“노프탈까지 달려.”

히스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히스에게 눈을 마주치면서도 케이든은 제 뒤에 선 로하나를 끝내 쳐다보지 않았다.

“케이든, 칼라드리우스가 나타났잖아. 나한테도 말을 줘요. 분명 잘 싸울 수 있어.”

로하나가 다급히 말했지만 케이든은 그녀가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듯 반응이 없었다.

“히스, 어서 말해. 내가 그 ‘현신’일 수 있잖아요!”

답답한 로하나가 이번에는 히스를 붙잡았다. 그 순간, 케이든의 얼굴이 더 험악하게 굳었다. 두 남자 사이에 알 수 없는 기류가 흘렀다.

“로하나, 마지막 기회야. 모두를 살릴 수 있어.”

게다가 고개를 돌려 옆으로 바라본 바르디의 확신에 찬 눈빛에 로하나는 토할 것같이 속이 울렁거렸다.

그때 낯설 정도로 단호한 케이든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가.”

끝까지 그녀를 보지 않는 눈매는 서늘하기만 했다.

“케이든!”

히스는 아무 말 없이 거칠게 로하나를 들어 올려 제 앞에 태웠다. 히스가 그녀를 태운 것을 보자마자 케이든은 앞으로 달려 나갔다.

그 순간 뭐라 할 수 없는 불길함이 그녀의 몸을 휘감았다.

쿵, 쿵.

도대체 왜 날 보지도 않고!

로하나가 손을 뻗었으나, 그도 히스도 너무 빨랐다.

케이든의 망토가 손끝을 스쳤다.

바르디가 입을 열더니 손을 까딱했다.

공격 명령.

쐐애애애액 하며 날카롭게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들렸다.

케이든이 칼을 들어 올리자 넓은 반경 안으로 비처럼 날아오던 화살이 박살 나면서 말을 타고 달리는 둘을 엄호했다.

“잠깐!”

“로하나, 가만있어!”

히스의 다급한 말에도 로하나는 몸을 틀어 뒤를 바라보았다.

높아지는 지대 덕분에 케이든이 아직 보였다.

가장 앞서 진격하는 그의 가차 없는 공격에 앞에 버티고 있던 황실군이 속절없이 죽어 나가고 있었다.

바르디는 수십 명의 비호를 받으며 빠르게 도망치고 있었다.

칼라드리우스는 그녀 바로 위에서 날갯짓을 하고 있었다.

오팔색 눈이 번쩍였다.

가까워진 덕분에 엄청난 바람이 소용돌이치듯 불었다.

로하나는 이를 악물었다.

‘내가 칼라드리우스의 현신이다.’

아름다운 노랫소리가 경고음처럼 울리고 있었다. 그녀가 오팔색 눈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케이든을 도와, 내가 네 현신이라면.’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답답함이 손끝을 저릿저릿하게 만들었다.

‘저번처럼 나를 도와.’

그때였다.

콰과과과과과광.

쿠구구구구구구궁.

순간 아무것도 들리지 않을 수준의 엄청난 폭발음이 났다.

지축이 흔들릴 정도였다. 말이 그대로 뛰어올랐다가 중심을 잃으며 미끄러졌다.

히스의 커다란 팔이 강하게 로하나를 안았다. 온몸으로 그녀를 감싸며 히스의 몸이 그대로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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