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
“오랜만이야, 히스.”
전쟁 통에도 오렐리아의 목소리는 낭랑했다.
“뭐야, 이것들은?”
히스가 낮게 으르렁거렸다.
“황실에서 가로채서 재납치를 했어. 세린의 안전을 위해선 어쩔 수 없었다.”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히스의 손이 케이든의 옷깃을 거칠게 붙잡았다. 둘의 얼굴이 바짝 가까워졌다.
“장난해?”
“나중에 해결한다.”
히스가 먼저 움직이려는 케이든을 다시 강하게 움켜잡았다. 손등에 핏줄이 섰다.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그날 밤이 선연했다. 수도에서 돌아와 오렐리아가 공작저에 있는 것을 본 그녀가 어떠했는지.
“로하나한테 어떻게 설명할 건데?”
그때 히스는 그녀가 뛰어 올라가는 것을 보며 뒤쫓는 케이든을 직접 때려눕히고 싶었다.
훗날 그가 그 누구라도 ‘황실에서 실종’되는 것을 막기 위해 그랬다는 것은 이해했지만.
머리와는 별개로 지금도 그때를 떠올리면 반사적으로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 순간이었다.
케이든이 오히려 힘을 주어 둘의 거리를 좁혔다. 짙은 눈이 그를 빨아들이듯 쳐다보았다.
“세린이 잘못되면 로하나는 어떻게 될 것 같아?”
히스의 미간이 좁혀졌다. 바다색 눈동자에 로하나의 얼굴이 스쳤다.
아마도.
그녀의 눈물 짓던 모습이 떠올랐다. 언제 가장 크게 고통스러워했는지도.
히스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그보단 나를 미워하는 편이 나아.”
거칠게 일갈한 케이든이 히스의 손을 털듯이 뿌리쳤다.
“그래서 쟤네를 끌고 가겠다는 거야?”
그럼에도 대책이 없다. 히스가 다시 쫓아가 물었다.
“그럴 리가. 때를 봐서 저것들도 없앤다.”
단단히 굳은 얼굴의 한쪽 입 끝이 비스듬하게 올라갔다.
“그게 가능할 소리야?”
“왜 안 되지?”
“왜긴 왜야, 넌 카르크의…….”
“그래.”
말을 자른 케이든의 서늘한 눈빛이 히스를 내려 보았다.
“난 카르크의 군주이고, 노프탈의 영주이며, 너의 주군이다. 곧 반란군의 수장이 되겠지.”
“케이든.”
“그리고 무엇보다 어린아이를 납치하는 놈들에게 명예니 규칙이니 지켜 줄 자비는 없는 사람이다.”
히스는 인상을 썼다.
모르는 바 아니다. 그도 알지만, ‘케이든 델클리프’는 완전한 사람으로 남아야 했다. 조금이라도 렌트워스 같아서는 안 되는 것이 그가 ‘악스톤’을 죽일 수 있었던 조건이었다.
히스가 잠시 그의 동료로서 머릿속이 복잡해 있는데 불쑥 케이든의 목소리가 휘젓고 들어왔다.
“로하나를 찾아.”
낮디낮은 목소리.
“너는 그녀에게 잘못한 게 없으니 말릴 자격이 있겠지. 찾아서 안전한 곳으로 데려가.”
냉정한 목소리와 달리 숨기지 못한 걱정이 찰나의 시선에서 뚝뚝 떨어졌다.
그는 빠르게 공주를 다시 한번 확인하더니 어마어마한 속도로 궁으로 말을 몰았다.
*
로하나는 남쪽 성벽으로 말을 달렸다. 서쪽이 무너진 것에 비해서 남쪽은 아직 별일이 없어 보였다. 뽀얀 먼지가 일어났다.
그때 사람들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불을 붙인 포탄이 날아왔다. 남쪽 성벽 너머에서 날아오는 것이었다.
절로 말을 멈추게 할 정도의 압도적인 광경이었다. 로하나는 서둘러 말을 멈추고 포탄이 날아가는 성안의 중심을 돌아보았다.
그때였다.
바닥에서 거짓말처럼 엄청난 속도로 얼음 기둥이 치솟았다. 날카롭게 솟은 얼음 기둥은 포탄을 그대로 사로잡았다. 사람들의 비명과 괴성이 여러 번 울렸다.
‘케이든?’
로하나는 미간을 좁히며 속으로 공주의 무사 귀환을 기도했다.
제발 괜찮기를.
제발.
로하나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칼라드리우스는 그녀가 나가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문은 공성전을 위해 막혀 있었다.
여성스러운 망토를 두른 탓인지 군인들은 아무 경계 없이 그녀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로하나는 그대로 문으로 돌진했다.
“이런! 저 여자 잡아!”
빠른 속도였다. 마지막 방어를 위해 잠그던 문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갔다.
무거운 문이 등 뒤에서 닫혔다. 남쪽의 땅은 단단한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져 땅이 미끄러웠다.
포탄을 날린 것도 그쪽.
드디어 아주 먼 시야에 군대의 깃발이 보였다.
황실군이었다.
로하나는 그대로 멈춰 섰다.
칼라드리우스는 여기에서 내가 뭘 하길 바라는 걸까.
잠시 고민하는 순간, 갑작스러운 인기척에 로하나는 고개를 돌렸다.
순간 눈동자가 얼어붙듯 커졌다.
황실의 보초병이었다. 로하나의 시야에 그녀를 향한 화살이 들어왔다.
로하나는 말의 고삐를 당기며 그대로 몸을 숙였다. 능숙한 손길로 바로 활시위를 팽팽하게 당겼다 놓았다.
쐐애애액.
소름 끼치는 소리를 내며 날아간 화살은 경비병의 가슴에, 그리고 경비병의 화살은 로하나의 말에 박혔다.
잠시 그의 상태를 보는 찰나, 속도가 늦춰졌던 말이 휘청했다. 또 다른 보병이 그대로 말의 목을 내려친 것이었다. 미끄러운 땅에 말이 미끄러졌다. 온몸이 암석에 부딪치며 굴렀다.
살상을 해 본 적은 없었다.
찰나의 순간, 뇌리에 스친 생각이었다. 몸에 긴장이 흘렀다. 두 발이 땅에 완전히 닿는 순간 그녀가 눈을 들며 검을 꺼내 들었다.
그래도 죽여야 한다.
그때였다. 느닷없이 검은 복면을 한 자객이 빠른 속도로 날듯이 다가오는 것이 로하나의 시야에 들어왔다.
R. D.?
파인체이서에서 본 그들의 복장을 어찌 잊으랴.
로하나의 칼날은 누구를 공격해야 할지 몰라 순간 당황했다.
다시 활로 저것부터?
아니.
한발 늦었나.
아차 하는 순간이었다.
우선 황실 보병을 공격하기 위해 검을 쥐어 잡던 순간, 의외의 일이 벌어졌다.
복면을 한 자가 날듯이 뛰어올라 그대로 황실 보병의 갑옷 사이를 깊숙이 찔러 넣은 것이다.
악 소리도 없이 사내가 쓰러졌다. 그러자 아까 활을 쏜 황실군은 로하나를 향해 말을 달리다가 선회해 순식간에 그를 베었다.
옆구리부터 겨드랑이까지의 자상. 피가 솟구쳤다.
욕을 내뱉은 그는 그대로 칼을 던졌다. 칼은 적의 목을 관통했다.
무기에서 빛이 나지 않아.
R. D.인데 어째서 마력을 쓰지 않지?
로하나가 미간을 좁히며 활시위를 당겼다.
아니, R. D.가 아닌가?
여차하면 누구든 쏠 생각이었다.
심한 부상을 입은 복면의 사내는 계속 욕을 하며 로하나 쪽으로 천천히 걸어왔다. 흘러나온 피가 순식간에 작은 웅덩이를 만들어 냈다.
“거기 서.”
로하나는 당긴 활시위에 끝까지 힘을 주었다. 남자는 손을 휘적휘적 젓더니 발걸음을 멈췄다. 그러고는 복면을 휙 벗었다.
보랏빛 눈동자의 동공이 확대되었다.
“프란츠……?”
“남부의 영주, 프란츠 소예 후작 오랜만에 인사드리옵죠, 공녀님.”
날카롭게 찢어지듯 올라간 눈매에 유난히 밝은 갈색 눈동자가 잔뜩 인상 쓴 눈썹 밑에서 일그러졌다.
유명한 반항아.
젊은 나이에 남부 수호 가문의 후작 가주가 된 그는 케이든 델클리프 소식을 꺼내거나, 동부가 독립할 수도 있을 것이라며 누구에게 좋을지 모를 이야기를 하곤 했었다.
“아, 이젠 공작 부인이지. 행동파라고 듣긴 했는데, 이렇게까지 하는 건 의외네.”
로하나가 미간을 좁히는 사이, 프란츠의 무릎이 꺾였다. 피가 암석을 적시고 있었다.
“소예 후작.”
로하나는 그래도 걸음을 서둘러 그를 부축했다.
“하……. 역시 나는 책상파인데 말야.”
그를 부축하자마자 로하나가 입고 있던 새하얀 망토가 피로 젖어 갔다.
“후작, 후작이 왜…….”
그러나 프란츠는 빠른 속도로 의식을 잃어 갔다. 우선 치유력으로라도 그를 깨울 필요가 있었다. 그녀의 손끝에서 새하얀 빛이 새어 나왔다.
그때였다.
등 뒤에서 날카로운 뭔가가 느껴졌다.
군인의 칼은 아니다. 망설이는 것이 칼끝에서도 느껴졌으니. 그저 협박용 제스처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 뒤에서 아주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말도 안 되는군.”
그녀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로하나는 천천히 일어나 몸을 돌렸다.
“설마 마력을 쓴다는 말이냐.”
심하게 엉망이 된 드레고리 하노버가 혼자 덜렁 서 있었다. 브란드를 떠올리니 그가 여기 있는 것도 아주 놀랄 일은 아니었다.
“세린은 어디 있어요?”
왜 아무도 같이 있지 않지? 뒤에는 그를 태우고 온 것으로 보이는 말 한 마리뿐이었다. 로하나의 눈동자가 빠르게 주변을 훑었다.
“마력이라니!”
드레고리는 부들부들 떨었다. 순식간에 칼을 꺼내 든 그녀가 팔을 뻗었다.
“세린 어디 있느냐고!”
칼끝은 미동도 없이 단호했다.
사람을 향했음에도.
“공주라면 이미 네놈들이 데려가지 않았느냐!”
로하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없는 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아까 치솟던 얼음 기둥을 떠올리며 로하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브란드에 아버지까지, 어린아이를 납치하는 일에 가주에 후계자까지 나서는 대단한 집구석이네요.”
그녀의 화려한 흰 망토와 드레스는 피로 붉게 젖어 있었다. 높게 묶은 흑발이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드레고리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마력을 다룰 줄 아느냐.”
“네.”
어느새 지는 해에 저녁노을이 눈이 실 정도로 붉었다.
“네가 감히…….”
아버지라는 작자가 부들부들 떨었다. 냉정한 드레고리 하노버의 체신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혼자 초라한 행색의 그는 이제 더는 왕년의 그가 아니었다.
로하나는 한숨을 쉬었다. 몸에 딱 맞는 검은 갑주까지 피가 튀어 있었다.
“치유력이라니……. 제 마력이 그거 하나인 줄 아시나 봐요.”
로하나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칼라드리우스가 그녀의 머리 위에서 비행하고 있었다.
“참 오랫동안 많은 사람을 아프게 하셨죠.”
드레고리의 눈에 분노가 서렸다.
“내가 너에게 손댄 적 있더냐!”
그걸 핑계라고 대다니.
“네가 지금 무슨 짓을 하는지 아느냐! 마계인에게 우리 제국의 역사와 존망이…….”
더 들어줄 수가 없다.
로하나의 눈이 번뜩이자 드레고리는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했다. 다만 뭔가에 막힌 듯 숨을 꺽꺽거리더니 겨우 다시 숨을 몰아쉬었다.
“사과하세요.”
“어이가 없군.”
“그러시겠죠.”
로하나는 익히 알았다는 듯 체념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냥 드려 본 말이었어요.”
곧게 선 로하나가 고개를 까딱하며 손을 옆으로 뻗자 차르르 하며 반짝이는 흰빛이 검에 어렸다.
“그리고 제 마력은 단순한 치유력이 아니에요. 뭔지 굳이…….”
로하나가 나긋나긋하게 말했다.
“설명해 줄 필요까진 없겠죠.”
로하나의 검이 우선 어설프게 칼을 들고 있는 드레고리의 손목을 베었다. 비명이 들렸지만 전혀 개의치 않고 다시 움직이는 그때.
챙 하는 소리가 마른 공기를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