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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죽일 흑막과의 계약결혼-82화 (82/125)

82

*

로하나는 최대한 빨리 뛰었다. 일찍이 지상에 도착한 히스가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칼라드리우스의 노랫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그때 보고대의 목소리가 황실군의 침입을 알렸다.

“황실군이라니?”

이슬라의 미간이 좁아졌다. 히스가 낮게 욕을 내뱉었다. 로하나조차 잠시 멍해졌다.

“공작 부인을 안전한 장소로 모셔라!”

히스의 말에 로하나가 다급히 그의 팔을 붙잡았다.

“히스, 잠깐.”

“레이디, 훈련과 진짜 전투는 다릅니다. 피해 계십시오.”

“보병과 기마대가 밀고 옵니다. 서쪽 성문이 이미 함락되었다는 보고입니다.”

새하얀 깃발을 올린 파병대가 외쳤다. 이슬라는 히스를 쳐다보았다. 갑옷을 들고 오는 여군들이 서둘러 그녀를 둘러쌌다. 칼과 활이 그녀에게 능숙하게 채워졌다.

“제국민인 너희는 빠져.”

“웃기는 소리 하지 마.”

히스가 신랄하게 말했다. 거친 모습에 로하나는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세린 일도 있는 지금 너 혼자서 제대로 지휘 못 해.”

“지금 내가 제대로 된 여왕이 아니라는 거야?”

“너도 사람이라는 거야.”

히스가 짧게 일갈했다. 이슬라는 그런 그를 원망스럽게 쳐다보았다.

“이제 와서 돕는 척하지 마.”

“로하나 일은 어쩔 수 없었어. 너도 알잖아.”

“세린한테 무슨 일 있으면 용서 안 해.”

“그럴 일 없어.”

히스가 이슬라에게 가까이 다가섰다. 여왕의 숨이 가빠졌다.

“세린은 케이든이 데려와.”

히스가 어른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니 네 목숨 정도는 지키게 해 줘.”

이슬라의 얼굴이 복잡하게 흔들렸다.

“이젠 아무 사이도 아니지만.”

히스가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계속 기다렸었어.”

이슬라의 말이 불쑥 돌아서는 히스의 발목을 잡았다. 히스의 미간이 좁아졌다.

“끝낸 건 내가 아니라 너야.”

히스의 말이 부드럽게 차가웠다.

“근데 왜 난 항상 내가 널 기다리는 것 같을까.”

여왕이 말을 마치는 그 순간이었다. 히스가 갑자기 활을 끄집어 올렸다. 순식간에 화살이 새하얀 빛을 내며 날아갔다.

“우선 목숨부터 부지하고 보자.”

순식간에 쏘아진 화살이 날아오던 포탄을 그대로 얼려 버렸다. 포탄이 바닥에 굉음이 내며 떨어졌지만 다행히 궁은 안전했다.

마력자들이 히스와 동일한 화살을 날리기 시작했다. 이슬라와 눈을 마주친 순간, 뭔가 직감적으로 불길했다.

히스는 다급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없었다.

로하나가.

“레이디!”

아비규환 속에 도망치는 궁의 일반 귀족들과 각 잡혀 올라오는 군대의 인파 어디에도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로하나!”

고함을 질렀지만 대답도 돌아보는 자도 없었다.

곁눈으로 이슬라가 빠른 걸음으로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제기랄.

히스가 욕을 하는 사이 노프탈의 사용인이 다가왔다. 그도 갑자기 없어진 로하나 때문인지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공작 부인을 찾아. 반드시 대피소에 모셔야 한다.”

미치겠군.

히스가 머리를 쓸어 넘겼다.

*

“로하나!”

저 멀리에서 히스가 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로하나는 눈을 질끈 감고 무장한 몸을 살폈다. 검과 활, 화살. 로하나는 머리를 질끈 높게 묶으며 두건을 둘러썼다.

인파 속으로 숨어들자 다시 욕지거리가 섞인 히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미안, 히스.’

전쟁이야 어쩔 수 없다고 해도 세린이 걸린 이상 그녀를 구하는 것까지는 손 놓고 있을 수 없었다.

‘분명 할 수 있는 것이 있다.’

이번에는 저번보다 더 확신이 있었다. 노랫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기묘할 만큼 항상 높은 곳에서 이끄는 듯 아름답고 소름 끼치게 울리는 노랫소리.

칼라드리우스는 그녀에게 무슨 말을 하는 것이 분명했다.

로하나는 궁 밖으로 벗어날 방법을 생각했다.

‘여기에서는 무리야.’

피난하는 성안의 왕국 국민이 방공호로 보이는 문으로 마구 몰리고 있었다. 날아오던 포탄을 보며 숨이 멎으려는 찰나, 새하얀 빛을 내며 날아가는 화살에 포탄이 멈추어 떨어졌다.

로하나는 다시 뛰다가 길에서 아무 말이나 잡아끌었다.

“이것 보쇼! 아니, 그건 내 말인데!”

“여보! 지금 그게 문제야! 지하로 전부 대피하라고 했다고!”

“죄송합니다!”

로하나는 그 와중에 사과를 하며 말에 올라탔다.

칼라드리우스의 소리는 남쪽에서 들리고 있었다.

하늘을 올려다보는 순간, 저 멀리 흰 형체와 함께 별처럼 반짝이는 오팔색 눈동자가 보였다.

그러더니 순식간에 돌풍이 불었다. 고도를 낮춘 칼라드리우스가 하늘에 나타났다.

새하얗고 흠 없이 완벽하게 아름다웠다.

사람들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돌로 만든 길이 미끄러웠지만 로하나는 재주 좋게 말을 이끌어 속도를 냈다.

노랫소리가 말하고 있었다.

남쪽으로!

로하나는 속도를 높였다. 고삐를 바짝 잡아 쥔 손에는 조금의 떨림도 없었다.

*

달려가던 히스는 순간 부서질 것 같은 손목의 통증을 느꼈다.

‘빌어먹을.’

로하나를 놓쳤다. 칼라드리우스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이 그녀에게 뭔가를 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을 텐데.’

마물이라는 존재는 그렇게 쉽게 다룰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세기의 천재라는 케이든조차도 마물은 다뤄 본 적이 없었다.

라자르가 말한 대로 그녀는 뭔가 비밀을 가지고 있는 걸까. 단지 꿈에서 그의 목소리를 들었다고 하기엔 로하나는 묘하게 특이한 행동을 할 때가 있었다.

히스는 재빨리 전투 채비를 하면서 문득 케이든과 했던 대화를 떠올렸다.

라자르의 습격을 받고 회복 중이던 겨울 한중간의 날.

히스는 케이든이 초를 여러 개 더 켜는 것을 침대에서 바라보았다. 아직 흑마법의 후유증으로 온몸이 부서지게 아팠다.

<아직도 초를 그렇게 켜 놓는 거야?>

놀리는 말투에 케이든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가 지하에서 당했던 일을 아는 거의 유일한 사람이 히스였고, 어둠을 두려워하는 그를 놀려도 되는 것도 히스가 유일했다.

<마력을 가르쳐 드리는 게 문제가 있나?>

성냥을 흔들어 끄며 비스듬하게 앉는 그의 얼굴이 복잡했다. 히스가 말을 이었다.

<라자르에게 황금빛 화살을 쏘았어. 레이디가 우리 편에 서면 R. D.도 황실군도 이번에야말로…….>

<알아, 로하나가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거.>

<반갑진 않아, 우리와 같은 사람인 게?>

케이든이 미간을 좁히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아린족의 마력이 대단하든, 로하나가 칼라드리우스와 어떤 관계가 있든…….>

낮은 목소리는 잠겨 있었다.

<그녀에게 좋을 게 뭐가 있지?>

그의 씁쓸한 목소리에 히스의 얼굴에 작은 금이 갔다.

<결국 팔다리가 잘려 나가는 전장에서 싸우기밖에 더 하겠어? 이미 이번에도 그럴 뻔했고. 모두 내가 모자란 탓이지만.>

감정을 억누른 케이든의 얼굴은 어느 때보다 어두웠다. 히스는 입을 꾹 다물었다. 모자랐던 것은 라자르에게 당해 인질이 되었던 그였다.

침묵 끝에 히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럼 아예 가르쳐 드리지 않는 건? 그냥 모른다고 하면…….>

<그럴 자격이 있나.>

케이든이 공허하게 웃었다.

<거짓말도, 숨기는 것도 너무 많이 했어, 이미.>

케이든이 눈을 가늘게 내리떴다.

<그녀에겐 그녀의 뜻대로 살 권리가 있으니까.>

<그럼 어떻게 하고 싶은데?>

높은 콧대와 푹 들어간 눈매에 촛불이 깊은 그림자를 만들어 냈다.

<모르겠어.>

한참의 침묵 끝에 그가 한 대답은 그 한마디였다.

히스가 그에게 모르겠다는 말을 들은 것은 그날이 처음이었다.

<모르겠군.>

*

순간, 사람들의 비명에 정신을 번뜩 차렸다. 아비규환이었다. 부상당한 군인과 민간인들의 비명이 뭔가가 무너지거나 부서지는 소리에 묻혔다 울려 퍼졌다.

히스는 말을 탄 채 초조하게 시선을 움직였다. 로하나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이런 사태를 걱정한 것이었다.

케이든은 아주 처음부터. 히스 자신도 그때부터 쭉.

분명 ‘그 소리’를 듣고 이동했을 터인데 그는 그게 어디인지 알 수가 없다.

정말 잠깐이었는데.

심장이 불길하게 터질 듯이 뛰었다. 쥐고 있던 활에 땀이 찼다.

라자르의 흑마법에 당할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그때였다.

귀를 찢는 비명과 고함이 울려 퍼졌다. 찰나의 순간에 포착된 시야에 불타는 포탄이 날아오고 있었다.

단단한 팔이 서둘러 활을 겨눴다.

‘어느 것을?’

이미 여러 개가 동시에 날아오고 있었다. 빠르게 몸을 피할 곳을 보기 위해 눈동자를 굴리며 가장 높은 건물이 있는 쪽으로 화살을 날리려는 순간.

그때였다.

쩌저저저저저적.

무언가 얼어붙는 소리가 들리며 바닥에서 얼음이 치솟았다.

날아오르던 포탄이 그대로 얼음에 휩싸여 공중에 붙잡혔다.

사람들의 비명이 한 차례 더 크게 술렁였다.

히스는 천천히 강하게 당기고 있던 활시위를 내렸다.

사람들의 비명을 뚫고 말굽 소리가 울렸다. 빠르게 달려오는 말 위에서 검은 망토와 눈에 띄는 은발의 머리카락이 휘날렸다.

모두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땅에서 솟구친 얼음 기둥을 올려다보았다.

마력을 쓰는 자들이 많다곤 하나 이런 것을 본 적은 없었을 것이다.

“다친 덴?”

케이든 앞에는 진홍색 머리카락을 휘날리는 공주가 단단하게 안겨 있었다.

잠이 든 것인지 의식이 없는 것인지 세린은 눈을 감은 채 이 난리 통 속에 고요했다. 히스가 고개를 저으며 물었다.

“공주는?”

“괜찮아. 로하나는?”

히스는 참담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칼라드리우스가 나타났어.”

케이든이 욕을 내뱉었다. 이미 남쪽 하늘에서 그것이 날고 있는 것을 보고 오는 길이었다.

그때 히스의 눈에 이해가 안 되는 자들이 말을 타고 케이든의 뒤를 이어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저건 뭐야?”

R. D.라는 건 바로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맨 앞에 있는 자는.

“오렐리아?”

믿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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