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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빌어먹을!”
간신히 목숨을 부지한 드레고리가 욕을 내뱉었다. 박살이 난 마차 주위에서 부상을 입은 경비대들이 신음을 흘렸다.
“프란츠 소예…….”
남부의 후작 프란츠 소예가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지금 뭐 하는 짓이야!”
작전은 완벽했다. 혼란을 가중시킨 상태에서 샤톤웰이 국경을 넘을 때를 기다려 기습하는 것까지도.
심지어 그 꼬마 여자애가 조금이라도 수작을 부릴 수 없게 만들었던 수갑까지 R. D.한테 받아 놓은 상태였다.
복면을 두른 새카만 자들이 기절한 공주를 안아 올리는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드레고리는 아직 충돌의 충격으로 윙윙거리는 이명을 견디고 있었다.
그때 선뜻한 새하얀 칼날이 목에 다가왔다. 드레고리는 끝까지 복면한 자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그때였다.
“살려 둬.”
어디선가 들어 본 목소리였다. 남색 망토를 두른 여자가 말했다. 망토 사이로 언뜻 보이는 금발.
“하.”
드레고리는 한숨을 내쉬었다.
오렐리아 브리.
사라진 파면 황후.
“오랜만이야.”
빙긋이 웃던 여자가 드레고리에게 고삐를 쥐여 주었다.
“이 정도면 충분해요. 케이든도 샤톤웰도 깜짝 놀랐을 테니까.”
“감히……!”
“어서 가요. 수도로 돌아가서 R. D.한테 당했다고 솔직하게 말해.”
이미 주위의 모든 사용인과 군인들은 모조리 죽은 후였다. 카르크족들로 보이는 검은 복면의 사람들은 제 검에 흐르는 피를 아무렇지 않게 닦아 내고 있었다.
“감히 네놈들이!”
“치사한 짓거리에 우리가 숟가락 좀 얹었기로서니 이렇게 화가 나실까.”
프란츠였다.
“네놈 새끼는 도대체 뭐가 아쉬워서…….”
“아쉽긴, 누가 아쉬워서 이런 일을 해.”
남부의 프란츠가 물고 있던 입을 뗐다. 굵은 사각 턱이 유난히 돋보였다.
“이길 거니까 하는 거지.”
신랄한 목소리에 드레고리가 미간을 좁혔다.
오렐리아가 낭랑하게 조곤조곤 입을 뗐다.
“어서 가세요. 가서 알려, 바르디 얼굴을 직접 못 보는 걸 내가 정말 아쉬워한다고. 인질극도 실패하고, 굳이 왕국까지 쳐들어갔다가 지는 것 기대하겠다고.”
드레고리는 진흙이 잔뜩 묻은 옷을 털어 내며 손에 쥔 고삐를 꽉 움켜쥐었다.
“그럼 난 이만 R. D.에게 가 있을게. 전서구 날려.”
마력으로 재운 공주를 소중히 안은 소예가 말하자 오렐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난 여기서 케이든을 기다릴게.”
드레고리는 둘의 대화를 들으며 새하얀 황실의 말에 올라탔다. 바르디 황제가 지금쯤 있을 곳으로 빨리 가야 했다.
샤톤웰의 서부 성벽으로.
*
케이든은 괴물 같은 속도로 남부 경계에 도달했다. 일당이 흔적을 가린 솜씨가 대단했다. 그에겐 소용없었지만.
괜찮은 솜씨를 가진 카르크족의 도움을 받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한쪽 입꼬리를 비틀며 속도에 박차를 가는 순간이었다. 케이든은 그대로 달리던 말을 멈추었다.
마력의 흔적이 끊기고 대신 인간이 도망친 흔적이 시작되고 있었다.
뭔가 여기에서 벌어졌다.
조용히 바닥과 주위를 살피던 케이든이 낮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나와라, 성가시게 하지 말고.”
빼 든 굵고 긴 검이 새파랗게 빛났다. 그때 고요한 공기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애를 썼지만.’
케이든이 한발 빨랐다. 다시 나무 위로 이동하려는 사람의 형체가 케이든의 시야에 보이자마자 그 사람의 옆구리와 목 두 군데가 그대로 뚫리며 피가 분수처럼 솟았다.
죽이지는 않았다.
입을 열게 해야 하니.
이어서 던진 창에 나무 위에 있던 둘이 떨어졌다. 고통에 찬 비명이 숲을 울렸다.
또 한 명.
단검을 내던지려는 그 순간이었다.
“어쩜.”
간드러진 여자 목소리.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였다.
“역시 저희가 상대가 안 되네요.”
무성해질 듯 파릇파릇하고 큰 나무들 사이로 익숙한 인영이 눈에 들어왔다. 케이든은 기가 찬 실소를 터뜨렸다.
오렐리아 브리였다.
“그쪽 카르크족은 너희가 대 준 모양이지?”
주로 풀고 있던 금발을 높게 틀어 올린 오렐리아가 푸른 망토를 두른 채 서 있었다.
“너무 신기해. 어쩜 매번 그렇게 다 알아차리실까.”
황금빛 눈동자가 곱게 접혔다.
‘내 마음은 모르면서.’
그 와중에 그가 반가워 오렐리아는 이를 악물면서 미소를 지었다. 황금빛 눈동자가 화려하게 반짝였다. 인형 같은 이목구비에 투명한 피부는 세상 근심 없는 듯 맑았다.
“대단하군, 하다 하다 황제와의 합작이라니.”
케이든이 저벅저벅 걸어 나서는 순간, 오렐리아가 작은 손에 하얀 천 조각을 들어 보였다.
“카르크족을 위해 아린족을 잡아 죽이길 반복하더니, 고작 이 정도 쇼를 위해 황제를 도와?”
채 움직일 틈도 없이 차가운 단검이 오렐리아의 목에 겨눠졌다. 싸워 봤자 소용없는 걸 알아서인지, 믿는 구석이 있어서인지. 오렐리아는 본능적으로 조금 놀란 기색이었을 뿐 침착함을 잃지 않았다.
느른한 목소리는 마지막 경고인 듯 차가웠다.
“세린은 어딨어.”
“공주님은 안전해요.”
“아린족들 주제에 흔적을 잘도 숨겼다 했더니, 네놈 쪽에서 심은 놈이 있던 모양이군.”
오렐리아는 바로 눈치채는 케이든을 보며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단검을 목에 가져다 대느라 두껍고 큰 손이 가느다란 목 언저리에 닿았다. 오렐리아는 그조차 소름 끼칠 만큼 반갑고 설렜다.
“조건은 간단해요.”
오렐리아가 입을 뗐다.
“우리랑 손을 잡아요. 전 이게 왜 조건씩이나 되는지 모르겠지만.”
험악해지면서도 흔들리는 케이든의 눈을 본 오렐리아는 역시 라자르가 옳았음을 느꼈다.
약자를 잡으면 반드시 꺾을 수 있을 거라고. 그가 제 쪽으로 오게 하기 위해서는 더 역겨운 적을 조금은 도울 필요도 있다고.
그 역겨운 황제는 어차피 다 R. D.의 탓으로 돌리겠지만 R. D. 입장에서는 그것보다 케이든이 자기네들과 확실하게 손을 잡는 것이 필요했다.
오렐리아가 핑크빛 입술을 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손을 잡다니?”
“R. D.는 당신과 함께 아린족과 싸우고 싶어요. 나쁘지 않은 조건 같은데.”
어디로 튈지 모르는 조직이다. 케이든은 미간을 좁혔다.
“설마 이 조건을 안 받아들여서 공주님을 위험하게 만들진 않겠죠?”
두 사람의 눈이 위험하게 맞부딪쳤다.
“잘 지냈어요?”
오렐리아가 케이든에게 아주 살짝 몸을 기대며 물었다.
“난 잘 지냈어요.”
살벌한 눈빛에 돌이킬 수 없어진 현재가 새삼 실감 났다. 오렐리아는 짧은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승낙하면 중요한 정보를 하나 더 알려 드리죠.”
“그래서 그 정보란 건?”
“에이, 승낙을 해 주셔야 해요.”
케이든은 긴 한숨을 몰아쉬며 생각에 잠겼다. 과연 지금 R. D.가 던질 정보가 뭐가 있을까. 바르디 옆에 붙어서 알 수 있었던 정보란.
그때였다. 케이든은 익숙한 기시감에 미간을 좁혔다.
지금도 히스와 로하나는 성안에, 그는 밖에 나와 있다.
파인체이서 때와 같은 수법.
그를 떨어뜨려 놓고 본진을 치는 방식.
하나의 아이디어가 케이든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 ‘숨어든 R. D.’가 바르디에게 전략을 조언했군.
“황실군이 샤톤웰을 치는 모양이군.”
오렐리아는 저도 모르게 탄성을 뱉었다.
“샤톤웰은 이미 불바다일걸요?”
케이든의 얼굴이 얼음처럼 굳었다.
그럴 리가.
바르디는 명목 없이 황실 군대를 움직일 자가 아니다. 그러나 이내 낮은 탄식을 흘렸다.
“하…….”
당연하지. 왜 진작 생각 못 한 거냐. 케이든은 속으로 혀를 찼다. 으르렁거리는 굵은 목소리가 섬뜩했다.
“애초에도 공주를 구한답시고 설치면서 오고 있었겠고, 보다 좋은 명목은 샤톤웰 군인들의 제국의 국경 침범이 되겠군.”
“수색한다고 물불을 가리지 않더라고요.”
오렐리아가 빙그레 웃었다.
“라자르의 계획인가?”
쓰고 있던 두건을 벗으며 오렐리아가 상큼하게 말했다. 금발이 햇살에 밝게 빛났다.
“공주님을 데리고 돌아가셔야죠, 전하. 시간이 없어요. 황실 정예 군대가 갔어요. 심지어 바르디 황제까지도.”
케이든이 미간을 좁혔다.
“세린은 어디 있지?”
오렐리아가 미소를 지었다.
“그럼 협상한 거로 알게요.”
케이든의 머릿속에 로하나의 얼굴이 떠올랐다. 일전에 오렐리아를 공작저에서 본 것만으로도 무너졌던 그녀였다. 바람직한 상황이 아니지만.
지금은 세린의 목숨이 걸린 일이었다. 시간을 둔 도박.
오렐리아의 손끝에서 세린의 것으로 보이는 잘린 새하얀 치맛자락이 바람에 팔락였다.
로하나는 괜찮다고 할 것이다. 아마 세린의 얼굴을 보면 오렐리아를 봐도 어쩔 수 없어 할 것이다.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늘 그렇게 참고, 또 참으면서 살았으니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케이든은 속이 울렁거렸다. 몇 번이고 욕을 내뱉어도 속이 시원하지 않았다.
‘세린을 데려가지 못해도 안 되지만 오렐리아나 R. D.와 손을 잡는 것도 그녀에겐…….’
그녀가 괜찮다고 해도 그 자신이 괜찮지 않았다. 세상천지 모두가 그녀에게 희생을 요구했는데, 결국 그도 그런 사람 중 하나가 되는 순간이었다.
감았다가 천천히 뜬 흑안에 오렐리아가 비쳤다. 미간을 좁히며 결정을 내린 케이든이 입을 뗐다.
“데려와, 지금 당장.”
“샤톤웰로 가면서 얘기해도 좋아요.”
오렐리아가 호루라기를 불자 저 높이 나무 속에 몸을 숨기고 있던 전서구가 휙 날아갔다.
“지금 여기에서 내 손에 넘겨.”
“그럴 시간이 되겠어요?”
“그건 네가 알 바 아니고.”
“황실의 군대가 갔는데 고작 샤톤웰의 군대나 히스로 되겠어요?”
케이든이 입 끝을 올리며 웃었다.
“시간이 없어서 곤란한 건 네놈들도 마찬가지야.”
오렐리아가 순간 움찔했다. 케이든이 칼을 거두며 느긋하게 몸을 뒤로 빼자 오렐리아는 멈췄던 숨을 내쉬었다. 가슴이 크게 올랐다 내렸다.
“서둘러, 조금이라도 내 마음을 기울이고 싶으면.”
케이든이 날카로운 턱을 기울이며 여유롭게 경고했다. 급한 건 그들이 알 것 없으니까.
‘로하나.’
케이든은 웬만해서는 느끼지 않는 불안함을 오랜만에 느꼈다.
‘조금만 버티십시오.’
그가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뻔뻔스럽지만, 나는 당신에게 다시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