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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죽일 흑막과의 계약결혼-80화 (80/125)

80

*

“아저씨.”

세린이 조용히 입을 뗐다.

마차에서 정신이 들었을 때 이 상황이 납치라는 걸 모를 만큼 세린은 바보가 아니었다. 머리가 처음 느끼는 수준으로 무거웠다.

마력을 못 쓰는 아린족들은 이상한 약을 쓴다고 하던데 그런 모양이었다.

무섭지만 울지 않을 거야.

엄마가 찾고 있을 테니까. 엄마가 여왕이 되어서 나를 찾고 있을 테니까.

“물 좀 주세요.”

눈앞에 앉은 남자는 불쾌할 정도로 공작 부인과 많이 닮아 있었다.

무슨 영문일까.

“아저씨 이름은 뭐예요?”

“내 이름을 알아서 뭐 하게.”

그러나 떨떠름하게 짓는 냉소는 공작 부인과 전혀 달랐다. 같은 자색 눈동자에 검은 머리카락인데 느낌이 이렇게 다를 수 있구나.

“빌어먹을 일에 연루되게 하다니.”

남자가 잠시 뜸을 들이다 툭 던지듯 말했다.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거예요?”

샤톤웰 사람이라면 모두가 금지된다는 그 수도로 가게 되는 건가 봐.

“좀 조용히 하지.”

처음 듣는 살벌한 경멸의 목소리에 제아무리 세린이라도 주눅이 들었다. 세린은 고개를 돌렸다. 아무것도 듣고 싶지도 보고 싶지도 않았다.

케이든 공작님.

엄마.

얼른 와.

눈물이 날 것 같지만 그래도 꾹 참았다.

나는 샤톤웰의 공주니까.

그때였다.

콰콰아아아아앙.

괴성이 울리면서 마차가 뒤집혔다. 비명과 함께 세린은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

따라오라고 말한 이슬라는 저만치 먼저 몸을 돌려 걷기 시작했다.

“보여 줄 게 있으니까.”

로하나는 히스를 살짝 올려다보았다. 그는 조금 굳은 얼굴은 그녀를 안심시키듯 설핏 미소를 지은 뒤 다시 딱딱하게 굳었다.

여왕은 호위대를 거느린 채 빠른 속도로 지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지하는 어두웠지만 특이한 건축 구조로 곳곳에서 빛이 들어와 시야가 아예 가려지진 않았다.

높디높게 위로 뚫린 둥근 하늘의 모습이 기이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히스, 저희 어디로…….”

“저도 잘.”

히스가 말을 마친 지 얼마 되지 않아 곧 일행은 가장 밑의 층으로 보이는 곳에 도달했다.

두꺼운 아치형 문이 굳은 자물쇠로 잠겨 있었다. 여왕은 가슴께에 달려 있던 보석 목걸이를 풀었다.

휘익, 손에 감기는 순간 보석이 열쇠로 바뀌었다. 열쇠는 미끄러지듯이 자물쇠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들어와요.”

이슬라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들어가자 더 큰 돔이 위에 뚫린 채 유리창 안으로 빛이 쏟아졌다.

어둠이 순식간에 걷히면서 시야에 수많은 서적과 알 수 없는 기이한 물건들이 들어왔다.

“30년 전, 통일 전쟁 이후로 마력에 관련된 서적은 대부분 불타 없어졌죠.”

로하나는 입을 딱 벌렸다. 놀라울 만큼 정교하게 정리된 곳은 곧 바스러질 것 같은 종이부터 무겁디무거운 포탄까지 수많은 것이 놓여 있었다.

“이슬라, 이건.”

“아무도 몰랐던 곳이지요.”

히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런 것치고는 호위대들의 얼굴이 너무 태연해 보였기 때문이다.

“너 혼자…….”

“누구도 알아서는 안 됐으니까.”

기록을 지키는 것은 샤톤웰의 여왕으로서 카르크족의 후예로서 반드시 해야 할 일이었다. 이슬라의 옅은 녹안이 로하나를 향했다.

“그런 중요한 곳을 왜 제가 열었는지 아시겠어요?”

로하나는 천천히 걸어 여왕 앞에 섰다.

“어차피 전쟁은 시작됐으니까.”

로하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슬라는 턱을 강하게 다물더니 몇 걸음 뒤에 있는 탁자에서 작은 책자를 꺼내 들었다.

“칼라드리우스.”

이슬라의 시선이 로하나를 향하더니 이내 책을 던졌다. 히스가 대신 받아 로하나에게 건넸다.

여전히 가슴 위 팔까지 그에게 단단히 매여 있었지만 손으로 책을 펼칠 수는 있었다. 붉은 실로 표시되어 있는 곳.

<칼라드리우스는 황제의 새로 병마를 고치고 흡수하며, 때로 그를 다시 흩뿌리기도 한다.>

로하나의 미간이 좁혀졌다. 받아 든 책자에는 시리율이 이야기했던 내용으로 시작되는 곳이 있었다.

“마저 읽어요.”

고개를 드는 로하나를 보며 이슬라가 말했다.

“역시나 마물로서 그 어떤 인간이나 마법사, 예언자의 통제에서 벗어나 있다.”

머뭇거리며 읽어 가던 목소리가 점점 빨라졌다.

“그러나 오랜 켈리의 전설에는 그의 현신이 나타나 통제가 가능하다고 하는 이야기가 내려온다.”

당신이 그런 존재라면 ‘정말로’ 죽여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건데.

이슬라는 속으로만 생각하며 옛친구를 쳐다보았다. 히스의 얼굴은 동요 없이 단호했다. 로하나의 읽기가 계속됐다.

“현신이 위기에 처했을 때는 높고 아름다운 노랫소리로 그를 경고한다는 말이 내려온다. 검증 가능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는다.”

소름 끼치도록 아름다웠던 노랫소리.

오직 나한테만 들렸던.

‘그래서 그랬구나.’

둥둥 심장이 크게 뛰기 시작했다. 로하나가 마른 입술을 깨물었다. 그 순간이었다.

챙 하는 소리와 함께 로하나의 몸이 휘청였다. 그녀가 무슨 일인지 알기도 전에 히스의 숨결이 느껴졌다. 바로 가까이에서.

경비병들의 칼날이 그녀의 목과 옆구리를 아슬아슬하게 스쳤다. 히스의 몸이 강하게 로하나를 감쌌다.

마력인지 놀라운 공기의 흐름이 주위를 둘러쌌다. 놀랄 새도 없이 히스의 강한 왼팔이 로하나를 두르고 있었다.

“뭐 하는 짓이야.”

낯선 목소리였다. 예의 부드럽고 사근사근한 그의 목소리는 아예 사라져 있었다.

“너야말로 뭐 하는 거야. 어쩔 수 없다는 것 알잖아.”

이슬라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당장 안 물리면 모두 죽는다.”

로하나는 뒤통수를 맞은 듯 얼얼했지만 그러면서도 가슴으론 그녀가 이해되었다.

“공작 부인, 부인도 이해하시겠죠? 해칠 생각은 없어요. 그저 당신이 황제에게로 돌아가면 됩니다.”

당연하지 않겠는가.

제 딸이 납치되었는데.

좋은 무기가 될 수 있을 것 같은 자산은 잡고 보는 것이 맞다. 그래서 그녀도 아까까지만 해도 그냥 돌아가려고 했던 것이다.

“개인적인 감정은 없어.”

“누가 레이디가 간다고 순순히 세린을 돌려준다고 했어!”

“그거라도 해 봐야지!”

이슬라가 신경질적으로 반박했다. 히스는 좁혀진 미간을 구기며 눈을 감았다가 떴다. 얼음 같은 목소리가 그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경고한다.”

“히스, 네가 어떻게.”

이슬라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셋 셀 동안 모두 안 물리면 너를 제외하곤 다 죽일 거야.”

거칠고 냉정했다. 처음 듣는 그의 목소리였다.

“히스.”

로하나의 말에도 그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하나.”

순식간에 이슬라의 커다란 녹안에 눈물이 고였다. 딸이 납치된 것을 안 순간을 제외하곤 다시 냉정을 찾았던 그녀의 얼굴이 곧 울음을 터뜨릴 듯 일그러졌다.

“히스!”

“둘!”

히스의 검에서 새하얀 빛이 파란빛을 띨 듯 띠지 않을 듯 일렁였다.

살기.

“물러나. 너흰 상대가 안 된다.”

호위대가 망설이는 사이, 히스가 한 명의 목을 그대로 베었다.

“히스!”

오히려 로하나가 놀라 비명을 질렀다. 이슬라가 주먹을 꽉 쥔 채 다시 외쳤다.

“다 물러나래도!”

경비병들이 물러났다.

“네가 어떻게 이래?”

“나 원래 이런 사람인 것 네가 더 잘 알지 않나?”

“대단하군.”

이슬라가 입술을 비틀며 웃었다. 경비병들이 무기를 버리자 바닥에서 쨍그랑 소리가 났다.

“로하나 델클리프를 보호하는 것, 그게 내 지금 임무다.”

“하.”

기가 찬 듯 실소를 터뜨리는 이슬라의 눈에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이 스쳤다. 로하나는 히스에게 안겨 그를 올려다볼 수 없었지만.

심박으로 알 수 있었다.

그도 그만큼 아파하고 있었다.

“정말 그게 다야?”

“네가 상관할 일이 아니야.”

“미쳤구나.”

“내가 원래 극단적이잖아, 너도 알다시피.”

로하나를 감싼 팔이 더 강한 힘으로 그녀를 끌어안았다.

“독단적 행동은 그만해. 이래서 우리가 실패했던 거야.”

우리가 실패.

로하나는 빠르게 뛰는 히스의 고동을 느끼며 말을 되짚었다. 비릿한 그의 목소리에 이슬라의 눈물이 후두두 바닥으로 떨어졌다.

눈물을 보자마자 티가 나진 않을 정도였지만 그의 팔에서 약간의 힘이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이슬라…….”

여왕은 그대로 그를 쳐다보기만 할 뿐이었다.

“세린은 반드시 구해. 델클리프를 믿어.”

“당신은 참 잘도 믿는군. 그 긴 세월을 참아 내고 있고.”

낮은 목소리가 포기에 젖어 있었다. 로하나가 조심스럽게 참고 있는 숨을 내쉬는 순간이었다.

말을 잇지 못한 채 로하나는 고개를 들었다. 안겨 있던 모양새에서 그렇게 하자 히스가 의아한 눈으로 미간을 좁히며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말도 안 돼.’

보랏빛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시선은 둥글게 뚫린 천장을 향하고 있었다. 높디높게 뚫려 있는 둥근 천장에서 햇빛이 쏟아지는데 그때 휙, 뭔가가 지나갔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다시 그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칼라드리우스였다.

로하나는 황급히 고개를 돌려 히스를 올려다보았다. 당황이 가득 찬 그녀의 눈을 보며 히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슬라.”

이슬라는 대답 없이 히스를 바라보았다.

“잠깐만요!”

로하나가 두 사람의 말을 막았다. 다시 들리기 시작했다.

그 노랫소리가.

“이슬라, 우리 일단 올라가지.”

히스가 로하나의 시선을 좇으며 천천히 말했다. 그때였다. 탑 너머에서 나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둥둥, 북소리가 울렸다.

이슬라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습격입니다.”

경비병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히스가 그녀를 놓으며 계단을 달려 올라가기 시작했다.

이슬라는 몸에 지니고 있던 검을 꺼내 들었다. 찰나의 순간, 다시 냉정해진 그녀가 물었다.

“아는 것이 있어요?”

이슬라의 질문에 로하나는 고개를 빠르게 저었다.

“그렇지만 들려요.”

이슬라의 미간이 좁혀졌다.

“그 소리가 들려요.”

로하나의 대답에 이슬라는 저도 모르게 숨을 멈추었다. 로하나는 말을 마치자마자 바로 히스를 뒤따라 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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