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를 죽일 흑막과의 계약결혼-79화 (79/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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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워서 이기면 돼.”

“쉽게 얘기하지 마요.”

“쉬운 적 없어. 어려운 만큼 오랫동안 미뤘던 전쟁을 하겠다고 말하는 것뿐이야.”

완전히 압박한 몸에 입을 가렸던 손이 떼어졌다. 혼란 속에서 빠르게 던져지는 단어가 하나하나 머리에 와 박혔다. 머리로는 알면서도 그녀의 입에선 하지 않아야 할 말이 튀어나왔다.

“전쟁을 하면 안 돼요.”

짙은 흑안이 그녀의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생판 억지인 것을 알면서도 답답한 마음에 아무 말이 튀어나왔다.

“뭐라고?”

“수적으로 너무 불리해요. 아린족이 스무 배는 넘을 텐데. 군대로나 뭐로 보나 아무리 마력이라는 힘이 있다고 해도 안 된다고요.”

원작에 나와요. 놀랍게도 전력에 있어서는 별로 달라진 게 없다고.

“당신도 사실 아는 거잖아, 제국과 싸울 수 없다는 거. 그래서 가만히 있었던 거잖아.”

속삭이는 목소리는 아프게 울렁거리는 마음과는 달리 차분하고도 냉정하게 흘러나왔다.

“싸우면 질 거야. 지게 된다고요.”

로하나의 중얼거림에 케이든이 한 걸음 더 밀착해 왔다. 낮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이제는 완전히 붙은 몸에서 흘러나왔다.

“재밌네.”

순간적으로 뿜어져 나오는 살기에 그녀의 몸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거스르면 안 될 것 같은 굵은 목소리가 말을 이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로하나는 말문이 막혀 질끈 입술을 깨물었다.

“나한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당신은 묻지 않았지.”

좁아진 미간에 가늘게 뜬 눈이 그녀를 잡아먹을 듯 가깝게 내려 보았다. 너무 가까워질까 봐 피했던 질문을 그가 콕 집어 말하니 심장이 다시 한번 내려앉았다.

“1년을 그 지하 감옥에서 사는 것보단 죽기를 바라면서 지냈었어. 내 몸을 봤으니 이미 짐작했겠지만.”

차마 묻지 못했던 과거를 털어놓는 그는 뜻밖에 그렇게 무너지지도, 그렇다고 괜찮지도 않아 보였다.

애써 두었던 마음의 거리가 이런 식으로 좁혀지길 바라진 않았는데.

그러나 케이든은 그것에 대해서 특별히 개의치 않는 듯 보였다.

“내가 그 옛날, 살려고 도망쳤던 것 같습니까?”

고통에 찬 깊은 눈이 그녀를 잡아먹을 듯 내려다보았다.

“그저 거기서 죽지 않으려고 했을 뿐입니다. 어디에서 죽든 거기에서 죽지만 않으면 됐어.”

그녀를 강하게 압박하던 손아귀에 힘이 더 들어갔다. 그의 눈빛의 험악한 빛이 조금 풀리더니 이내 낮은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당신이 지금 그래.”

속마음이 짙은 눈을 통해 흘러나왔다. 마지막 자존심으로 의미 없을 짓을 해 보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그러니까 못 보내.”

숨이 가빠졌다. 로하나는 도망치듯 옆으로 고개를 틀었다.

“난 괜찮을 거예요, 안 죽어.”

“아니.”

케이든이 그녀의 턱을 가볍게 잡아 저를 보게 했다.

“그렇게 살 수 있는 사람은 없어.”

가까운 숨결에 로하나는 울음을 삼켰다.

“나도 싸움을 미뤘지. 나만 지키면 그만이었으니까. 어이가 없게도 당신이 행복하게 지내고 있는 일상을 부수고 싶지도 않았고.”

로하나의 미간이 좁혀졌다. 노프탈을 지키면 그만이라고 생각했었다. 케이든의 짙은 눈매에 회한이 스쳤다.

돌아가고 싶지 않았고, 다시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히스에게도 모두에게도 사실 자기 자신에게도 털어놓지 않았던 해묵은 사실이 그의 가슴을 깊이 찔렀다.

“난 더 이상 물러나 주지 않을 거고 당신도 거기로 가는 일은 없어, 내가 살아 있는 한.”

케이든의 긴 손가락이 턱과 목을 타고 흘러내린 눈물을 거꾸로 닦아 올렸다. 밀착한 몸에서 심장 박동이 느껴졌다.

쿵, 쿵.

“나를 믿어.”

쿵, 쿵.

그의 심장 소리와 눈빛은 놀랄 만큼 안정이 되어 있었다.

그때 북새통을 뚫고 케이든의 흑마가 달려왔다. 궁전 안까지 우아하게 들이닥친 흑마는 높은 시선에서 둘을 내려다보았다. 케이든은 바로 말에 올라탔다.

“이번에는 내가 이겨.”

속삭이는 목소리. 로하나를 붙잡았던 손을 떼며 그가 만찬장을 향해 소리쳤다.

“히스!”

히스가 연회장에서 나왔다. 두 남자의 눈이 마주쳤다.

히스를 확인한 케이든이 그녀에게 몸을 훅 숙이더니 귓속말로 속삭였다. 살짝 내린 짧은 입맞춤과 함께.

로하나의 눈이 그를 다시 올려다보았을 때, 이미 그의 말은 속도를 내 달려 나가고 있었다.

히스가 다가오는 것을 보고 로하나는 서둘러 눈물 자국을 지웠다.

“여왕 전하는요?”

“이제 준전시 상태니 사령실로 이동할 겁니다.”

로하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정신 차려.

그만 흔들려.

그때 히스의 손이 로하나의 어깨를 감싸 쥐었다.

“레이디, 우선 진정해요.”

“내가 아니라 여왕께 가 보셔야…….”

케이든 앞에서 했던 긴장까지 합쳐져 몸이 자꾸 떨렸다.

“어디 안 가요. 걱정 끼치지 않을 테니까 저 신경 쓰지 마세요.”

한심해. 그렇게 훈련을 했건만 막상 위기 상황이 닥치니 별로 할 수 있는 일이 없어.

“그렇지 않습니다.”

“네?”

“지금 스스로를 한심하다고 생각했죠?”

히스의 목소리는 빠르고 부드러웠다.

“스스로에게 너무 각박할 것 없습니다. 동요하는 게 당연해요.”

로하나는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그런 어리광을 부릴 때가 아니었다.

“케이든이 좀 엄해야죠. 레이디에게 심한 소릴 한 모양이네.”

히스는 다 안다는 듯 차분한 눈으로, 그 와중에도 유머를 잃지 않으며 미소를 지었다.

“이슬라는 강한 사람입니다. 쉽게 무너지지 않아요. 그리고 우리가 반드시 이길 거니까.”

히스가 몸을 조금 낮춰 로하나와 눈을 맞췄다. 그의 부드러운 눈엔 한 번도 본 적 없는 살기가 등등했다.

“눈물 흘리지 마십시오, 레이디.”

그의 새물새물한 눈웃음이 일전과 비슷한 듯 달랐다.

“드디어 싸우게 되어서 저는 속이 다 시원한걸요?”

미묘하게 날이 섰을 뿐인데도 낯설었다.

“우선, 케이든 지시로 저희는 여기에서 방어합니다.”

로하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심호흡을 했다.

그때였다.

“로하나라고 불러도 될까요?”

뒤에서 여왕의 목소리가 들렸다.

새하얘진 얼굴과는 달리 자세나 목소리는 놀랄 만큼의 침착했다.

“여왕 전하.”

로하나는 그대로 고개를 숙였다. 다시 눈물이 날 것 같아 로하나는 부러질 듯 어금니를 깨물었다.

감히 울지 말 것.

“로하나, 물어볼 것이 있어요.”

로하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슬라.”

걱정이 가득 찬 히스의 목소리를 여왕은 손을 들어 막았다. 화려한 문양과 색감의 문신이 가득한 그녀의 팔이 가늘게 떨렸다.

“이 전쟁에서…….”

이슬라의 녹안이 여왕의 것으로 번뜩였다.

“어떤 입장을 취할 생각이죠?”

로하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전…….”

로하나의 머릿속에 오랫동안 부유하며 정리되었다가 다시 부서지곤 했던 수많은 생각들이 다시 천천히 모이기 시작했다.

케이든을 만나기 전까지 했던 숱한 다짐과 고함, 그리고 눈물이 드디어 끝인 듯 깔끔하게 정리됐다.

하나의 그림이 그려졌다. 덜덜 떨리던 몸이 천천히 진정됐다.

라자르에게 활을 겨누던 그 심정이었다.

이번에도,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것이다.

“세린을 구할 겁니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원작의 전쟁이 시작된다.

<나를 믿어.>

귓속말로 남은 찰나의 한마디. 로하나의 흔들리던 몸이 묘하게 평화로워졌다. 차분해진 그녀를 보던 이슬라가 천천히 입을 뗐다.

“칼라드리우스 소리를 듣는다고 했죠?”

히스조차 눈썹을 움찔했다.

“따라와요.”

이슬라가 몸을 돌려 걷기 시작했다.

“보여 줄 게 있으니까.”

로하나와 히스는 서로를 바라보고 그녀를 뒤쫓았다.

*

샤톤웰의 군대는 군의 규정을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개를 풀고 모든 길을 이 잡듯이 뒤졌다. 마력을 쓰는 자가 많은 만큼 기척과 흔적을 찾는 것에는 아쉽지 않은 실력자들일 텐데.

그러나 쉽지 않은 듯했다.

그쪽에 가담한 실력이 괜찮은 카르크족이 있는 모양이었다. 요즘 시국에 어떤 카르크족일까.

세린은 어디에 있을까.

‘생각하자.’

케이든은 미간을 좁히며 속도를 높였다.

‘어디냐.’

나무가 없이 고운 모래와 야트막한 들판이 많은 샤톤웰에서는 더 바람 같은 속도를 낼 수 있었다.

‘수도로 바로? 어차피 나중에 R. D.로부터 구출했다고 우기기만 하면 될 터이니.’

바르디는 로하나가 올 것을 기대한다. 그러므로 바르디는 수도에 있을 것이다.

흑안이 가늘어졌다. 거세게 이는 바람에 짧은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그런데 거기에 세린을 정말 데려다 놓을까?’

내가 작정하면 수도에서 세린을 무력으로 탈환할 것을 예상할 터. 케이든은 미친 듯이 달리던 흑마를 급하게 멈춰 세웠다.

바르디는 그런 위험을 감수할 인간이 아니다.

정정당당하게 인질을 교환할 인물은 더더욱 아니고.

‘분명, 세린은 다른 곳에 숨길 것이다.’

케이든은 가만히 그에게 가장 편안할 곳이 어디일지 생각하기 시작했다.

브란드를 사용했다. 로하나에게 정신적인 압박을 주기 위해서.

그렇다면 이러나저러나 행동 대장은 드레고리가 하고 있을 것이고.

케이든은 서쪽을 바라보았다.

수도가 있는 서쪽.

노프탈과 그 세력인 카르크족이 잔뜩 있는 동쪽과 북쪽.

그에 비해서는 평화로운 중립의 남부.

남부다.

케이든조차 탈주할 때 남쪽을 향했다. 날씨는 좋지만 땅이 척박하여 많은 인구가 모여 살지도 않아 적막한 그곳.

케이든은 남부의 소예 후작, 프란츠가 떠올랐다. 늘 그에게 이상하리만치 호의적이었고 다양한 것을 궁금해하던 금발의 미남자.

남부의 수도 격인 켈리가 그의 영지였다.

켈리로 간다. 납치된 시간을 생각하면 그렇게 멀리 못 갔을 것이다. 그것도 어린 공주를 데려가려면 그래 봤자 마차의 속도 정도로 이동했을 터.

케이든은 소환해 낸 전서구를 다시 날렸다.

<샤톤웰에서 켈리까지 마차가 다닐 길에 전체 수색 요망>

이즈가 하늘을 날아 도착하는 동안 자신은 땅으로 추격한다.

케이든은 다시 말의 옆구리를 차며 속도를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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