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를 죽일 흑막과의 계약결혼-78화 (78/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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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틴!”

“공작 부인.”

사람 좋은 미소를 띤 그는 일전보다 금발을 깔끔하게 올리고 있었다.

“세린 공주가 방에 없습니다.”

“또 안 계십니까.”

익숙한 듯 한숨을 푹 내쉬는 그를 보며 로하나는 제가 괜한 법석을 부렸나 싶었지만 느낌이 좋지 않았다.

“오스틴, 방에 없으면 공주가 있을 만한 데가 어디예요?”

다급한 그녀의 얼굴을 본 오스틴은 어쩐지 불안한 표정을 지으며 큰 걸음을 걸어 내실로 들어섰다.

“공주님! 숨지 말고 나오십시오. 아까 삐치신 것 백분 이해합니다. 공작 부인도 오셨어요.”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남자의 목소리가 허한 공간을 채웠다.

그때 여유가 만만하던 오스틴의 얼굴이 낯설 정도로 딱딱하게 굳었다.

“공작 부인.”

“네.”

“혹시 창문을…… 여셨습니까?”

“창문이요?”

숨 막히는 현기증이 일었다.

침실의 낮은 창문이 열려 있었다.

“아니요.”

너른 걸음으로 창가로 가는 오스틴을 뒤따르며 로하나가 다급하게 대답했다.

불길했던 예감이 확신으로 바뀌고 있었다.

오스틴이 손으로 현장을 더듬기 시작했다. 마력을 사용하는지 푸른빛이 일렁였다. 순간, 송골송골한 땀이 그의 이마에 맺혔다.

“어떻게 된 거예요?”

“공작 부인, 델클리프 경에게 가십시오, 지금 당장.”

굵은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보고는 제가 합니다.”

급한 마음에 로하나를 거의 치다시피 지나친 그가 고함을 질렀다.

“전체 성을 걸어 잠가라! 궁은 물론 성까지 다.”

사용인들이 재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로하나는 온몸에 핏기가 빠지는 걸 느꼈다.

“공작 부인!”

세린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일렁였다. 그 어여쁘던 모습도.

설마.

로하나는 그대로 달렸다.

“공작 부인!”

“부인, 안전한 곳으로!”

만찬장으로 가는 길이 유난히 길고 멀게 느껴졌다. 쿵쾅거리는 심장과 함께 남동생의 얼굴이 떠올랐다.

또.

또!

순식간에 시야가 흐려지고 숨이 막혔지만, 침착해야 했다.

침착해.

오스틴과 거의 동시에 만찬장에 도착했다. 오스틴의 보고가 채 있기도 전에 로하나의 시선이 손님석에 앉은 브란드를 향했다. 로하나가 브란드를 거칠게 일으켜 세웠다.

“왜, 왜 그래, 누나.”

“어디 있어.”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큰 눈동자가 더 크게 떠졌다.

“무슨 짓을 한 거야.”

멱살을 잡는 손에 브란드는 도대체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는 듯 놀란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기만 했다.

“로하나, 왜 그러십니…….”

케이든이 달려와 그녀를 붙잡았다.

그때였다.

창문에서 똑똑 소리가 났다.

전서구.

붉은 깃털의 전서구였다.

로하나는 쥐고 있던 브란드의 멱살을 던지고 신경질적으로 창문을 열었다. 덜컹 소리를 내며 유리가 흔들렸다.

“누나, 도대체 이게 무슨…….”

전서구는 약속이나 한 듯 브란드에게 날아가 앉았다.

그때 오스틴의 목소리가 공간을 울렸다. 공주의 소식에 이슬라 여왕이 순간 쓰러질 뻔하는 것을 히스가 서둘러 안았다. 여왕이 천천히 의자에 앉았다.

“열어.”

브란드는 조금 떨리는 손으로 전서구의 다리에 매인 쪽지를 꺼내 들었다. 순간, 그의 눈이 어두워지는 것을 보기도 전에 로하나가 그것을 낚아챘다.

읽어 내려가던 로하나의 얼굴이 더 새하얗게 질렸다.

“너…….”

“누나, 난 이건 정말 모르는 일이야.”

“너 정말.”

소금으로 상처를 문질러도 이럴까. 오렐리아 때도 그렇고.

또 그렇게 무장도 하지 못한 약자를.

“어디 있어.”

브란드가 믿을 수 없는 표정을 하며 어이없는 듯 실소를 터뜨렸다.

“난 정말 모르는 일이야. 난 그냥 누나가 잘 있는지 보고 오라고만 해서.”

“케이든!”

로하나가 부르는 소리에 멀리 있지도 않던 그가 다가와 로하나의 손에서 종잇조각을 받아 들었다. 그의 얼굴이 곧 사람을 죽일 살의를 띠었다.

“누나!”

“히스.”

히스가 능숙한 마력으로 브란드를 그대로 붙잡아 넘어뜨렸다. 쾅, 하는 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실내에 울렸다.

군인들의 빠른 보고와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곧 소란스럽게 퍼졌다. 로하나는 군인들이 끌고 가는 브란드를 보다 이슬라 여왕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세린 공주와 꼭 닮은 눈동자가 충격에 흔들리지도 않고 멈춰 있었다.

“여왕 전하.”

“델클리프 공작.”

이슬라는 로하나에게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은 채 떨리는 목소리로 케이든을 불렀다.

“나한테도 보여 줘.”

케이든이 정중하게 종잇조각을 전했다.

<세린 공주의 실종이 R. D.에 관련되어 있다는 내부 정보를 받은바, 제국은 대륙의 공익을 위해 출정할 것을 고지하는 바이다.>

당장 고함이라도 지르거나 패닉에 빠지지 않을까 싶었지만 여왕은 침착했다.

“모두한테 흥분하지 말라 해.”

사람들의 비명과 눈물 어린 중얼거림, 빠른 군화 소리와는 대조적으로 여왕은 여왕의 모습으로 일어섰다.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 얼굴은 창백했지만, 그녀는 꼿꼿하게 선 자세를 유지했다.

끌려 나가는 브란드의 목소리가 한데 뒤엉켰다.

로하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지금 누구보다 두려운 것은 공주의 어머니인 이슬라다. 이슬라보다 당황해서는 안 된다. 그럴 자격이 없으니.

로하나는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기억을 되짚었다.

그가 어떤 인간이더라.

바르디 렌트워스가 어떤 인간이더라.

일련의 사건들이 스쳤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붉은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잘…… 모르겠습니다.”

목소리가 갈라졌다.

<미안해, 네가 필요했어.>

라자르의 목소리가 어쩐지 저 멀리서 들리는 듯했다.

<문제를 악화시킬 사람으로, 네가 반드시.>

하지 않았던 말까지도.

말아쥔 주먹에 손마디가 새하얗게 질렸다.

그때 낮은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R. D.가 이런 짓을 하진 않을 겁니다. 그런 것치고는 제국이 주제에 정보가 너무 빨랐어.”

케이든이 이슬라를 향해 걸으며 말했다. 여왕의 초록빛 눈동자에 가득 찬 눈물이 떨어지지 않은 채 천천히 흔들렸다.

히스의 손에서 전서구 여러 마리가 빠르게 날아갔다.

“세린은 내가 구합니다. 아마 로하나로 부족하다고 느낀 모양이죠.”

“전쟁의 시발점으로?”

잠시 케이든을 올려본 이슬라가 탁한 소리로 말했다.

케이든이 천천히 검을 빼 들었다. 이슬라와 케이든의 눈이 다시 마주쳤다.

“바르디는 이렇게 해서 왕국에 대한 경고와, 저에 대한 도발과, 로하나에 대한 의사 전달까지 하고 싶었던 모양인데.”

이슬라가 작게 탄식했다.

“걸린 게 많은 만큼 공주를 쉽게 해하진 않을 겁니다.”

“난 세린만 돌아오면 돼요.”

이슬라가 로하나로 시선을 돌렸다. 오랫동안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은 원망의 시선에 로하나는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이제 그만 집으로 돌아가시죠, 공작 부인.”

로하나는 조용히 그녀의 말을 듣다가 이내 고개를 숙이고 발걸음을 돌렸다.

“우리 측 추격을 붙였어. 노프탈에서도 군대가 출발했다.”

히스의 목소리가 멍하게 귀에서 울렸다. 로하나는 천천히 발걸음을 돌렸다.

“나가는 건 내가 한다.”

케이든이 말했다.

“너는 이슬라 옆에 있어. 연락을 받을 때까지 샤톤웰에서 대기해.”

히스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케이든이 맹세의 뜻으로 들었던 검을 칼집에 넣으며 거칠고 빠른 발걸음으로 만찬장을 벗어났다.

순간, 익숙한 뒷모습이 보였다. 이미 저 멀리 빠른 속도로 멀어져 가고 있는 로하나였다.

“제기랄.”

욕을 내뱉으며 케이든이 샤톤웰의 근위대장에게 우선 출발을 알렸다.

케이든은 빠른 걸음 몇 번 만에 뛰고 있던 로하나를 따라잡고는 그녀를 거의 들듯이 붙잡았다. 케이든의 얼굴을 보자마자 로하나의 입이 열렸다.

“내가 가요.”

“로하나, 지금 당신이…….”

“내가 수도로 가요.”

케이든은 욕을 지껄이며 인상을 썼다.

“장난하지 마. 이럴 시간 없어.”

“케이든!”

로하나가 처음 내지른 고함에 케이든이 잠시 멈추어 섰다.

“이성적으로 생각해요. 간단한 해결책을 두고 상황을 어렵게 만들지 마요.”

케이든의 미간이 좁혀졌다.

“어림도 없어.”

“아이를 걱정하는 어머니 앞에서 우리 고집을 피울 거예요?”

“바르디가 당신을 훤히 들여다보는 게 안 보여? 조디 일과 유사한 이번 사건에, 브란드에게 뒤집어씌우듯 메시지를 보낸 것을 보면 몰라?”

윽박지르는 목소리에 미간을 찌푸리던 로하나가 언성을 높였다.

“내가 가면 다 끝나. 필요하면 전서구라도 날려요, 이슬라 여왕 전…….”

순간, 케이든이 로하나를 그대로 복도 밖 정원 뒤편으로 끌었다. 로하나는 질세라 뿌리쳤지만 소용없었다.

“케이든!”

“진정해.”

로하나는 포기하지 않고 몸을 움직였다.

“당신 이렇게 모자란 사람이야? 정신 차려.”

매서운 소리에 로하나의 얼굴에 분노가 일렁였다. 아니, 정확히는 공포였다.

“나 때문에 또 이런 일이 생기면…….”

어디서부터 어떻게 잘못된 걸까.

왜 이렇게 된 걸까.

그저 원작에서 비켜나 조용히 살고 싶었을 뿐인데.

그때 일갈하는 고함이 귀에 울렸다.

“당신 탓이 아니잖아!”

케이든에게서 거친 한숨이 새어 나왔다.

“미친 황제가 전쟁 중에도 하지 않을 행동을 한 것에 너나 내가 이렇게 요동을 쳐서야 되겠어?”

사포로 긁은 듯 거친 목소리에 일그러진 험악한 얼굴이 로하나를 내려다보았다.

“세린은 내가, 우리가 구합니다.”

낮은 목소리가 으르렁거렸다. 다시 벌어지는 로하나의 입을 막으며 케이든이 간격을 좁혔다.

“당신 탓이 아니야. 당신이 이럴 일이 아니야.”

로하나의 심장이 터질 듯이 두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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