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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브와 다양한 색깔의 포도가 꽃장식처럼 잔뜩 놓인 샤톤웰의 만찬 테이블은 옛 생각을 떠올리게 했다.
히스가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이슬라 여왕이 천천히 만찬장으로 들어왔다.
“벌써 와 있었어?”
“확인차.”
히스가 팔짱을 끼며 대답했다. 이슬라는 그런 그를 가만 바라보았다.
정교하게 재단된 흰 셔츠, 딱딱하고 군기가 가득한 그는 예전과 많이 달랐다. 여전히 모두에게 부드럽고 자상했지만.
이슬라가 천천히 입을 뗐다.
“하노버 영식이 왜 온 것 같아?”
“뭐…… 이런저런 설득?”
“우리의 왕자님은 무슨 생각인 거야?”
히스가 미간을 조금 좁혔다.
“아까 계단에서 올라올 때부터 눈치챘어. 고작 부인이 넘어질 뻔하는 것에 놀라더라고, 공작이……. 눈앞에서 사람 목이 날아가도 신경 쓰지도 않던 사람 맞아?”
이슬라가 부러 호들갑을 피웠지만 히스는 말이 없었다.
“못 본 사이 말수가 줄었네?”
“너랑 말을 안 할 뿐이야.”
빙그레 웃으며 잔인한 말을 던지는 미남.
“너라니……. 여왕에게 예를 갖춰라.”
농담을 하는 초록색 눈동자가 반가워하면서도 서글픈 빛을 띠었다.
“이제 우린 정말 친구인가 보네.”
“친구라도 되면 다행 아닐까.”
잔인한 말을 참 부드럽고 달콤하게 한다. 이슬라는 어깨를 으쓱했다.
“너무하네.”
“끝난 건 끝난 거니까.”
이슬라는 옆에 선 미남을 속절없이 올려보다 시선을 돌렸다.
끝난 건 끝난 거지.
이슬라는 다시 기운을 실어 말을 이었다.
“그래서 케이든 델클리프는 어떻게 할 생각이래?”
이슬라가 고개를 기울였다.
“뭘?”
“계속 혼인을 유지할 거래?”
“그렇겠지? 둘은 부부니까.”
“부부라…….”
부부라는 단어가 불편해 이슬라는 입술을 아무도 모르게 깨물었다.
“직접 물어봐, 나한테 이렇게 묻지 말고.”
“너무하네. 옛정을 생각해서라도 정보를 좀 주셔요.”
빙그레 웃는 히스의 미소가 공허했다. 이슬라의 눈이 가늘어졌다. 순간, 그녀는 무슨 영문인지 가슴이 찌르르, 어딘가 베인 듯 아팠다.
그의 눈에 다른 것이 보였다.
이슬라가 다시 입을 열려는 찰나, 차분한 목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세상에, 테이블 세팅이 너무 예뻐요.”
로하나가 화사하게 웃으며 들어왔다. 케이든도 뒤따라 예의 무감한 얼굴로 들어왔다. 그런데도 그의 시선에선 로하나가 잠시도 쉽게 떠나지 않았다.
이슬라는 잠시 제 과거를 떠올리며 본의 아니게 질투 아닌 질투 같은 감정을 느꼈다.
히스, 당신은 괜찮아?
나처럼 그걸 포기한 사람은 가끔 그걸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을 보면 화가 나던데.
“세린 공주 방이 어딜까요? 아까 서운해하는 것 같아서 제가 다 미안하더라고요.”
저렇게 순한 성격으로 어떻게 여기까지 온 것인지.
라자르를 향해 무려 활을 쏘았다고 했다. 칼라드리우스가 비호를 한 것 같다는 보고까지 있었다.
도대체 뭐 하는 사람일까.
이슬라는 복잡한 생각을 미뤄 두고 환하게 웃었다.
“3층으로 가시면 바로 보일 거예요. 가장 중앙의 가장 예쁜 문입니다.”
로하나는 웃으며 케이든의 팔을 쓸더니 걸음을 옮겼다.
케이든은 그녀가 나가는 것을 끝까지 보고는 다시 시선을 돌렸다.
훤칠하게 큰 키와 넓은 등, 은발의 머리카락과 수려하게 우뚝한 콧대와 날렵한 턱선은 그대로였는데.
평생 표정은 짓지 않던 그가, 언뜻 옆모습뿐일지라도 표정이 보였다.
‘큰일이네. 질투가 날 것 같잖아.’
이슬라는 길고 짙은 속눈썹을 느리게 깜빡였다.
*
세린 공주는 제 방 침대에서 뒹굴었다. 아직 입이 한 자는 튀어나와 있었다.
“그까짓 축제가 위험하면 얼마나 위험하다고, 정말 너무해.”
오스틴한테 있는 성질 없는 성질 다 부려서인지 그조차도 고개를 저으며 잠시 나갔다 오겠다고 했다.
실제로 창문에는 축제를 기리는 마음으로 오색으로 염색한 천을 길게 늘어뜨리고 있었다.
“치사해…….”
정말 치사하기 그지없었다. 심지어 돌아오고 나서도 왔다는 말도 없다. 엄마야 늘 그랬고 케이든은 그런 성격이 아니고 히스는 웃기만 할 뿐 은근 냉정하니 그렇다 쳐도.
로하나는 아는 척해 줄 줄 알았다. 친해졌다고 생각해서 꽤 설렜었던 것이 억울하기 그지없었다.
‘꼭 서러웠다고 팍팍 티 내야지.’
분명 그러면 그 길고 예쁜 눈을 접으며 나한테 잘해 줄 거야. 세린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로하나는 똑똑하고 상냥하지만 제 엄마처럼 정신없지는 않아, 딱 그녀의 마음에 드는 어른이었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문이 아니라 창문 쪽이었다.
“응?”
세린은 구르다시피 넓은 침대를 가로질렀다. 작은 발이 높은 침대에서 내려와 소리 나는 창문 쪽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방은 무려 3층이었다. 두드리는 소리가 나긴 쉽지 않은 곳인데.
그때, 달칵.
창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
바르디는 팔짱을 낀 채 벽에 걸린 물건들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적갈색 머리카락이 저녁노을에 더 붉게 빛났다.
새하얀 여우 목도리.
새빨간 벨벳으로 만든 두껍고 고급스러운 왕의 망토, 황금빛으로 빛나는 강철 갑주가 황제를 상징하고 있었다.
저것들을 갖기 위해 꽤 오래 고난의 길이 있었다. 선황제의 죽음 전에 갖기 위해서는 더더욱 큰 노력이 필요했고.
로하나 일에 있어서는 그런 노력보단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바르디는 잘 알았다. 그래서 기다리기로 했었고, 기다렸다. 아주 오래.
그리고 이제 모든 준비가 마쳐져 있었다.
딱 한 가지를 빼놓고는.
노크 소리가 넓은 집무실에 울려 퍼졌다. 실비우스가 붉은 전서구를 데리고 들어왔다. 발목에 있던 작은 암호지에서 나온 종이가 손에 들려 있었다.
“황제 폐하.”
“그 일은?”
“드디어 준비되었습니다.”
겨우내 준비한 일이었다.
“브란드는? 뭐 하고 있다고 하던가?”
“당연히 모두 경계를 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러다간 아린족을 상징하는 ‘로하나 하노버’라는 말도 우습게 되겠어요. 누가 봐도 그쪽 사람인…….”
주절주절 말을 길게 늘이던 실비우스가 서늘한 기운에 멈췄다.
“실비우스.”
“예!”
“말조심해.”
“예.”
“그런 괴물들 사이에서 로하나가 뭘 더 어째야 하지? 우리가 조금이라도 빨리 구해 내지 못하는 걸 안타까워하지는 못할망정.”
순식간에 올라간 분노의 수준에 실비우스는 재빨리 무릎을 꿇었다.
“죄송합니다, 폐하! 제가 정말 실언을.”
“됐고.”
바르디는 시니컬하게 말하며 의자에 걸터앉았다. 빠르게 짧은 메시지를 써서 손에 들었다.
“브란드에게 전서구를 보내. 빨리 전달하도록.”
실비우스는 군인답게 각 맞춰 걸어와 쪽지를 받았다. 도르르 말린 종이는 아까의 전서구에게 매여 다시 하늘을 날았다.
잠시 과거를 생각하던 바르디가 다시 입을 열었다.
“로하나가 브란드의 말을 순순히 따를 리는 없겠지.”
가엾은 대위는 제 누이에게 더 철저히 버림받을 것이다. 그럼 그릇이 작은 브란드는 드레고리 하노버가 그러했듯이 황제인 자신에게 의탁할 수밖에 없을 것이고.
로하나는 철저히 혼자가 될 것이다.
‘그러나 이 일의 가장 아름다운 점은 그게 아니지.’
바르디가 씩 웃었다.
고작 시녀들이 아버지한테 맞는 걸로 매일 눈물 바람이었던 그녀였다.
‘죄책감이라…….’
그게 그녀를 흔들기 가장 좋은 감정이라는 것을 머리가 식고서야 깨달았다. 주위 사람들이 다친다면, 지금 그렇게 애틋한 케이든에게 본인이 진짜 폐가 된다면.
그녀는 반드시 돌아오게 될 것이다. 죄책감을 갖지 않아도 되는 곳으로.
오직 마음껏 미워만 할 수 있는 나의 곁으로.
설령 아무리 싫어도 제 곁을 선택할 것이라는 걸 로하나 하노버를 오래 보아 온 바르디 렌트워스는 자신할 수 있었다.
바르디는 책상에 놓였던 크리스털 잔을 들었다. 원래 하지 않던 술이 늘었다. 호박색 액체가 흔드는 대로 이리저리 흔들렸다.
‘이렇게까지 해서 미안해.’
바르디가 속에 없는 사과를 조용히 읊조렸다.
‘너도 언젠간 나에게 고마워할 거야.’
그러게, 고작 그런 천한 여자 때문에 왜 파혼을 말해. 너도 나만큼 바보였어.
바르디가 미간을 좁히고 질문을 던졌다.
“오렐리아는 여전히 못 찾았고?”
“라자르라는 작자가 아주 작정하고 숨긴 모양입니다.”
영지 곳곳에서 일어나는 반란의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R. D.의 존재나 라자르 또는 오렐리아의 거취를 알아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계속 찾아.”
바르디가 잔을 기울이며 말했다. 실비우스가 경례를 하고 돌아갔다.
*
“공주님.”
앞에 지키고 있던 사용인들에게 인사를 한 로하나가 천천히 문을 열었다.
넓은 응접실은 공주의 취향에 맞게 화려한 색깔로 꾸며져 있었다. 주로 그녀의 머리카락과 눈 색깔과 톤이 맞아 웃음이 날 만큼 그녀다웠다. 그런데도 뭔가가 이상했다.
“세린 공주님?”
침실에 노크했다. 두꺼운 나무 문이 통통 소리를 냈다. 앞에 서 있던 시녀가 의아한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기척이 없었다.
로하나가 천천히 문을 열었다. 아무도 없는 듯했다.
“공주님께서 여기 계시는 게 아니었느냐?”
시녀는 그럴 리가 없다며 고개를 가로젓더니 이내 당황한 듯 몸을 돌려 여기저기를 살피기 시작했다. 로하나가 이번에는 서재로 보이는 문을 열었다.
역시나 비어 있다.
순간, 심장이 불안하게 뛰기 시작했다. 로하나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덜컹.
덜컹.
그림 그리는 방, 드레스 룸, 각종 마력 도구가 즐비한 넓은 방.
어디에도 없었다.
앞에 서 있던 사용인들이 거세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때 복도에서 오스틴이 걸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