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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급스러운 카펫과 쿠션으로 장식된 티 룸에는 만드는 데 족히 10년은 걸렸을 것 같은 어마어마한 태피스트리가 걸려 있었다.
“아버지야, 황제야?”
로하나가 얼굴을 가리던 청록색의 베일을 벗으며 무심하게 물었다.
“누가 보낸 거야?”
“누나.”
브란드는 지친 얼굴이었다. 짧게 자른 검은 머리카락이 더운 날씨에 살짝 헝클어져 있었고 눈은 조금 퀭했다.
“할 말이 있어서 왔어, 내가 직접.”
내가 어디 있는지 알고 샤톤웰까지 혼자 왔다는 걸 믿으라는 걸까? 로하나는 눈을 가늘게 뜨며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얘기해.”
사용인들이 독특한 향이 나는 차를 내왔다.
“미안해.”
순간, 딱딱했던 얼굴이 조금 어색하게 비틀렸다.
“애초에 누이가 이렇게 계약 결혼한 게 누구 때문인데.”
오렐리아 납치 사건. 잊고 있던 사건이 저 멀리에서 떠올랐다. 그때 브란드가 작전에 성공해서 오렐리아를 정말 ‘처리’했다면 일이 어떻게 흘러갔을까.
“전에는 바르디 렌트워스가 마음을 그따위로 바꾼 걸 누나 잘못으로 몰기도 했어.”
창백한 얼굴을 한 그는 양손을 마주 비비며 착잡한 목소리를 냈다.
“어렸을 때부터 내가 좀 모자랐잖아.”
“그런 소리 할 것 없어. 각자 선택이 달라졌을 뿐이야.”
침묵이 흘렀다.
“네가 남부럽지 않게 살 몫은 충분히 보냈고 남겨 놨다고 생각했는데…….”
로하나가 말을 이었다.
“왜 이렇게 얼굴이 안 좋아?”
그런 누이를 바라보던 브란드가 천천히 입을 뗐다.
“누나, 돌아가자.”
로하나가 시선을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갑자기 꼭 하고 싶었던 질문이 튀어나왔다.
“어디로?”
되묻는 질문에 브란드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나는 내가 갈 곳을 열심히 만들고 있어.”
불쑥,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본심이 흘러나왔다.
어려서는 참 사이좋은 오누이였더랬다. 로하나는 자신의 잘못을 대신 받던 욕받이에 화받이였던 어린 동생에게 미안해서라도 최선을 다해 살았었다.
그렇지만.
“브란드, 내가 지금 무슨 생각 하는지 알아?”
남동생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나는 지금도 네 배후가 누구일지 끊임없이 생각해. 왜 굳이 여기로 온 것일까, 그것도 편지도 없이? 데리고 온 일행에 위험인물은 누가 있을까.”
보랏빛 눈동자가 착잡하게 깜빡였다.
“그리고 너는 이렇게 생각하겠지. 이 누이가 무슨 생각으로 여기 있는 걸까. 원하는 게 있는 걸까. 정말로 그 남자한테 반하기라도 한 걸까.”
브란드의 얼굴에 금이 갔다.
“우리 사이는 이미 이렇게 되어 버렸어. 가문을 배신한 주제에 너에게 좋은 누나로 남겠다는 욕심도 부리지 않을게. 너도 이제 나를 버려. 나한테 미안해하지 마. 어쨌든 가문의 배신자잖아.”
브란드의 눈이 어두워졌다. 로하나가 진심으로 새삼 지난 세월을 반추하며 말을 이었다.
“아무리 망했어도 돈이라면 너의 손자가 탕진해도 닳지 않을 만큼 많잖아. 그냥 편하게 살아. 네가 원하는 대로, 나는 신경 쓰지 말고.”
“델클리프가 누나를 어떻게 꼬여 냈는지 몰라도…….”
“여기 남으면 죽게 될 거라고, 전쟁이 시작되면 애매한 나는 위험에 빠질 거라고 걱정하지도, 협박하지도 마.”
“그까짓 욕정은 언제든 꺼져.”
“알아.”
브란드의 말을 자르며 로하나가 끼어들었다.
“상관없어.”
“상관없을 만큼 사랑한다, 뭐 그런 거야?”
일그러진 얼굴을 보며 로하나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뗐다.
“아니.”
나비 같은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이제 그런 거 안 해. 나한테는 없을 일이더라고.”
전생에서는 부모로부터, 남편으로부터, 현생에서는 약혼자로부터, 또다시 가족으로부터. 그 흔하고도 유명한 사랑은 그녀로부터 항상 한 발자국 비켜 지나갔다.
“내 목숨은 내가 지켜. 그럴 수 있게 노력하고 있어. 실패해서 죽으면 그건 내 운명이 거기까지인 것뿐.”
로하나가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속사포처럼 쏟아져 나올 것 같은 진심은 애써 가슴에 담은 채 숨을 골랐다.
“그러니 그 사람 마음이 언제 꺼져 버리더라도 상관없어.”
‘그렇지만, 그렇지 않았으면 좋겠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가슴에 생채기가 난 듯 화끈거렸다. 남매의 눈이 마주쳤다.
“그러니 더는 나한테 어떤 협박도 하지 마. 걱정은 더더욱.”
담담한 목소리가 울렸다.
“만찬은 먹고 가. 이슬라 여왕이 꼭 부탁했어.”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운 그녀가 문을 닫고 나가도록 브란드는 앉은 채 미동이 없었다. 그때 창문에 똑똑,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브란드는 고통스러운 한숨을 내쉬며 창가로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
“이슬라 여왕 전하, 굉장히 재미있으시네요.”
일부러 밝게 한 목소리 톤, 과장되게 말하며 굳이 남동생에 대한 언급을 피한다라.
딱 보아도 그녀의 마음이 불안한 게 훤히 보였다. 케이든은 속으로 혀를 찼다.
“샤톤웰하고 이렇게 사이좋다고 왜 진작 말 안 했어요?”
무슨 대화를 했는지 몰라도 케이든은 당장 브란드를 수도로 돌려보내고 싶기만 했다.
“수도나 제국에겐 비밀이니까.”
아하, 하는 로하나를 보며 케이든은 우선 대화를 맞춰 주었다.
“히스의 고향이기도 합니다.”
“히스랑요? 어쩐지 아까 친해 보이더라니…….”
“음.”
동의의 뜻을 표한 케이든이 설명을 이었다.
“이슬라 여왕은 부친으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았었고, 남편은 일찍이 잃었습니다. 원래도 지병이 있던 남자였거든요, 셀저 공작은.”
로하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부산스럽게 손을 움직였다. 어쩐지 눈을 마주치지 않은 채.
케이든은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가 조용히 손을 그러쥐었다. 가냘픈 손이 아니나 다를까 불안하게 떨리고 있었다.
“로하나.”
케이든이 천천히 그녀를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뭐라고 한 겁니까, 그 친구가 또.”
케이든의 얼굴이 차분한 빛을 띠었다. 로하나는 입을 다문 채 어색한 미소를 조금 보이고는 다시 시선을 돌렸다.
화살과 화살집을 의미 없이 만지며 긴 의자에 앉는 그녀 옆에 케이든이 따라 앉았다. 사람의 몸 같지 않게 단단한 허벅다리가 옆에 와 닿았다.
“그만.”
케이든이 몸을 틀어 로하나를 향했다.
“그만 걱정해도 됩니다.”
순간, 로하나의 미간이 좁혀졌다.
“당신이 나를 모르나 본데.”
또다시 케이든이 내뿜는 특유의 고압감에 로하나는 숨을 멈췄다.
“나는 당신 생각보다 훨씬 치밀하고 집요해서 당신을 내 옆에 둘 방법을 수도 없이 생각해 놓았습니다. 최소한 그날 전까진.”
순간 다가온 얼굴이 닿을 듯 가까웠다. 내리뜬 눈은 그녀를 쳐다보고 있지 않은데도 충분히 유혹적이었다.
“정치니 뭐니 하는 것, 일전에 당하셨다시피 저도 꽤 해서요.”
‘사실 다 아무래도 상관없지, 방해하는 것들은 모두 죽여 버릴 테니까.’
본심을 삼킨 케이든이 한쪽 입꼬리를 올려 미소 지었다.
“제가 ‘당했’던가요?”
입 끝을 살짝 올리며 눈썹을 들썩이는 그녀의 표정이 조금은 기운을 차린 듯했다.
“무승부였다고 치죠.”
케이든의 커다랗고 섬세한 손가락이 가는 허리를 감쌌다.
“그러니까 당신은 마음 놓고 나랑 ‘연애’하면 됩니다.”
일전에 바르디와의 결혼을 강행할 거냐는 말에 그녀는 ‘연애’도 아니고 자신만의 일이 아니라고 대답했었다.
그 말까지 기억하다니.
“케이든, 우리 아무것도 장담하지 말죠.”
로하나는 감히 그를 상처 줄까 봐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장담은 아주 예전에 했습니다.”
케이든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유난히 큰 키의 남자는 다시 몸을 낮추더니 그녀 앞의 바닥에 앉아 로하나를 올려다보았다.
“누구와 약속을 하셨는지 자꾸 잊으시는 것 같네요.”
로하나는 곤란한 미소를 띠었다. 케이든은 그 미소를 보고 어느 정도 확신했다.
초여름날 그녀는 떠나려 할 것이다. 표정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뜨거운 숨을 토해 내는 순간에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여기에서 편안하지 않다.
제 옆에서도 늘 두렵다.
방해하는 자는 모두 죽여 버리겠다고 생각하지만, 단 한 명만은 막을 수가 없다. 로하나 그녀를 죽일 수는 없다.
마음이 복잡해지려 해 케이든은 전혀 모르는 척 자리에서 일어났다.
“만찬까지는 조금 남았는데.”
로하나가 그를 올려다보았다.
“잠깐 검술이라도 볼까요? 히스가 일전에 당신을 너무 혹사했다고 뭐라 하던데.”
그림 같은 몸이 유연하게 검을 올리자 얇은 셔츠 밖으로 팔과 가슴 근육이 대번에 두드러졌다.
“그럴까요?”
케이든이 턱을 기울이며 로하나를 일어서게 했다. 그가 바로 옆에 있던 검을 던지자 가까스로 로하나가 검을 받아 들었다.
“저기 이건 무거워서 들 수가 없는데…….”
“아, 죄송…….”
케이든이 긴 팔을 뻗어 로하나의 활과 검이 있던 마구를 들었다. 휙 튕기는 몸짓에 칼이 거짓말처럼 능숙하게 칼집째 손으로 빨려 들어왔다.
“자.”
검을 쥐여 주는 손이 작은 손을 폭 덮더니 이내 떨어졌다.
“마력 검술은 단순히 검술이 아닙니다. 집중하면 얼마든지 ‘기술’ 이상을 넘어설 수 있어요.”
챙, 하면서 로하나의 공격을 능숙하게 받아 낸 케이든이 말했다.
“잘하시네요.”
어쩐지 눈물이 날 것 같아 로하나는 빠르게 몸을 움직였다. 검이 부딪칠 때마다 새하얗게 밝은 빛이 홧홧 치고 올라왔다. 로하나는 지나치게 힘을 주고 있었다.
순간, 로하나가 힘에 밀리면서 검 손잡이까지 검날이 밀려 올라갔다. 다칠 뻔한 것을 케이든이 그대로 칼을 던져 놓으며 그녀를 붙잡았다.
“조심.”
아까 계단에서도 그녀를 잡던 안정적인 팔과 넓은 가슴이었다.
너무 안전한 것 같은 그 느낌에 자꾸 독하게 먹었던 마음이 무너질 것만 같았다.
그때였다. 뒤에서 그녀를 안았던 케이든이 그대로 몸을 숙여 그녀의 목덜미에 고개를 묻었다.
“가지 말까요, 만찬 같은 거?”
로하나는 오늘따라 케이든이 유난히 실없는 소리를 자주 한다 생각하며 피식 웃음을 지었다.
“아뇨, 어서 가요.”
그녀가 가지고 있던 아까의 무거운 분위기가 조금 누그러진 것을 보며 케이든은 아무도 모르게 조금 안도했다.
로하나가 먼저 나가는 것을 보며 케이든은 수도의 정보통에게 전서구를 날렸다. 수도의 상황을 알 필요가 있었다.
굳이 브란드 하노버가 여기 혼자 나타난 이유를 알아야 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