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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나.’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향긋하고 독특한 향신료 냄새가 코끝에 찡했다. 오색 찬란한 염색 천이 가게 곳곳에 드리워져 있었다.
새하얀 곡선의 돔형 지붕을 가진 왕국 궁전은 그렇게 크진 않지만 아름답고 우아했다.
“아르드골드 제국의 델클리프 공작 부부 드십니다.”
이 열 종대로 선 군인들이 지키고 있는 길에는 화려한 태피스트리가 깔려 있었다. 계단 위에 서 있던 세린 공주가 뛰어 내려오는 것이 보였다.
밝은 분홍색 머리카락을 한 갈래로 땋고 목깃은 높은데 어깨가 드러난 하늘하늘한 주름치마를 입은 모습이 정말 어여뻤다.
로하나가 반가운 마음에 걸음을 서둘렀다. 장시간 움직이지 않다가 움직인 탓일까, 긴 치맛자락에 갑자기 발이 살짝 걸렸다. 몸이 앞으로 확 숙어졌다.
순간, 그녀의 허리와 팔을 강한 팔이 안전하게 붙잡았다.
“조심.”
로하나는 저도 모르게 그의 팔을 풀어냈다. 아무래도 이런 스킨십은 익숙하지가 않았다.
“세린 공주님.”
로하나가 아무 일이 없었다는 듯 태연한 미소로 공주에게 인사를 건네는 순간, 공주 뒤로 동그랗게 눈을 뜬 여왕과 눈이 마주쳤다.
“먼 길 오느라 고생했어요.”
이슬라 여왕.
말로만 듣던 여왕은 놀랄 만큼 세린과 닮은 모습이었고, 놀랄 만큼 화려했으며, 놀랄 만큼 젊었다.
“공작 부인.”
로하나도 살짝 미소를 지어 인사를 올렸다.
“너무 젊어서 놀랐죠?”
“엄마, 하지 마.”
“오랜만에 뵙습니다.”
이어서 케이든이 인사를 올렸다. 우아하게 내민 여왕의 손과 팔에는 아름다운 문신이 가득했다. 특이한 문양이었다.
“케이든 델클리프 공작, 오랜만이에요.”
순간, 그 옆에 있던 히스에게로 여왕이 시선을 돌렸다.
“오랜만이야.”
히스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뜨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원래 로하나에게는 물론 모두에게 지나칠 정도로 다정다감한 인사를 하던 그치고는 의아한 행동이었다.
여왕은 잠시 히스를 눈에 담더니 다시 환하게 웃었다.
“들어가실까요?”
새하얀 주름치마가 바닥에 닿을 듯 닿지 않을 듯 경쾌하게 흔들렸다.
궁전은 오색의 대리석으로 알록달록하게 구성되어 있었다. 그곳을 앞장서 걷던 여왕이 몸을 홱 돌리더니 이어서 말했다.
“사실, 오늘 저녁부터 저희가 준비한 행사가 있는데.”
“설마 축제를 말씀하시는…….”
케이든이 미간을 좁히며 가까이 다가오자 이슬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실에 전부 준비해 뒀어요. 앞에서 기다릴 테니 얼른 나와요!”
“엄마, 나는!”
“아이는 다음에.”
세린의 화난 항의로부터 도망치듯 여왕은 빠른 걸음으로 사라졌다.
로하나가 조금 어리둥절해하며 뒤를 돌아보니 케이든과 히스가 나란히 난처한 얼굴로 서 있었다.
*
광장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시내의 고급 주점 2층 테라스에 넷은 자리했다.
“오늘이 만월의 축젯날이거든요.”
그래서 그렇게까지 시내가 화려했구나.
오색의 짙은 염색 천이 푸른 하늘 아래 화려하게 펄럭였고, 다양한 향신료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라틴 음악에 가까운 흥겨운 음악이 광장을 쩌렁쩌렁 울렸다. 심장이 쿵쿵 뛸 정도로.
“너무 좋은데요?”
로하나는 자기도 모르게 환하게 웃으며 케이든을 올려다보았다. 심기가 불편한 듯 미간을 좁히기만 하던 그의 얼굴에 흐린 미소가 드리웠다.
혹시 몰라 새하얀 천으로 머리카락을 숨기고 옅은 청록색 베일로 얼굴을 가린 제 모습이 로하나는 좀 낯설었지만, 아린족의 전형적인 외모를 하고 있는 로하나는 여기에서 너무 눈에 띄었다.
문제의 공작 부인이 굳이 눈에 띌 것까지는 없었으니까.
“세린이 누굴 닮아서 그렇게 당차나 했더니.”
“이건 당찬 게 아니라 무모한 겁니다.”
“너무 그러지 마.”
어두운 케이든의 목소리에 히스가 부드럽게 말했다. 그의 눈에 복잡한 뭔가가 서려 있었다. 로하나는 잠시 이슬라와 그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이 없으면 내가 어떻게 이렇게까지 편하게 놀겠어요.”
케이든의 무뚝뚝한 시선에 이슬라는 경쾌하게 어깨를 으쓱했다.
“안 그래요?”
세린 공주가 크면 꼭 이와 같겠구나, 로하나는 확신했다.
“뭐 어때요. 주위에 내 경비병들이 모두 잠복해 있는데 무슨 일 있겠어?”
로하나는 여왕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샤톤웰은 매해 이맘때 앞으로의 봄을 축하하고 좋은 해를 기원하기 위해서 만월의 축제를 열어요.”
사람들이 삼삼오오 광장에 모이기 시작했다.
“벌써 저녁의 춤이 시작됐네요!”
이슬라가 손뼉을 치며 말했다.
“히스.”
히스가 팔짱을 끼고 서 있다가 이슬라의 부름에 시선을 내렸다.
“춤출래요?”
히스는 예의 새물새물한 눈웃음을 짓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직도?”
“그건 아니고.”
순간, 둘의 시선이 복잡하게 얽혔다. 로하나는 단서라도 얻으려 케이든을 바라보았지만 케이든은 늘 그랬듯 태연하면서도 짙은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공작 부인, 같이 춤출까요?”
이슬라가 로하나를 자리에서 일으켜 세우다시피 했다.
“얼른 가요. 아, 공작께서 추고 싶으실까요?”
춤을 추느니 죽겠다는 표정을 하는 케이든을 보며 이슬라는 씩 웃었다. 얼떨결에 끌려 나왔지만 로하나는 난처했다.
“어떻게 하는지 전혀 모르는데요.”
“그냥 춤일 뿐이에요.”
왈츠가 아닌 춤은 정말로 오랜만이었다. 그래도 어쩐지 익숙한 라틴계 리듬에 로하나는 절로 심장이 뛰었다.
이슬라는 이내 춤을 추는 군중들 속에 가세했다. 유연하고 관능적인 움직임이었다.
오랜만에 소리 내어 웃음이 나왔다. 부드럽게 몸을 움직이자 샤톤웰의 하늘하늘한 천이 자유롭게 흔들렸다.
“잘하면 우리 가족이 될 뻔했는데.”
로하나는 오래 잊고 있었던 정략결혼을 떠올렸다. 이윽고 주변 사람들을 따라 팔을 엇갈려 끼우며 로하나가 대답했다.
“여왕께서도 아시는 일이었나요?”
“드레고리 하노버가 발이 좀 빨라야죠.”
“그건 그렇죠.”
“잘 아시겠지만 ‘우리’ 입장에서는 그 결혼도 특별히 나쁠 건 없었는데…… 굳이 델클리프 공작이 무리하길래 저는 혹시 케이든이 부인을 진심으로 좋아하나 했어요.”
순간, 로하나의 얼굴이 조금 당황하듯 굳었다. 여왕은 녹안을 동그랗게 뜨고 긴 목을 빼 케이든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뚫어지게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기민한 그녀의 관찰력에 따르면 정확히는 로하나를.
설마 정말?
실로 놀라웠다, 그 동부의 왕자가.
그때 두 줄로 원을 만들어 춤을 추는 대형이 만들어지면서 두 사람은 서로 떨어졌다.
로하나는 새롭게 마주한 다른 사람과 손을 엇갈려 끼웠다. 경쾌하고 리드미컬한 음악에 절로 머리카락이 나부낄 정도로 속도와 흥이 났다.
테라스를 올려다보며 로하나가 손을 흔들자 케이든은 가만히 있었고, 히스는 여느 때처럼 부드럽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한층 빨라진 리듬과 큰 음악 소리, 사람들의 떠드는 소리와 함께 발을 구르는 소리에 로하나는 오랜만에 함박웃음을 지었다.
두 번째 사람과도 춤을 마치고 다음 사람이 눈앞에 섰다. 로하나가 환하게 웃으며 팔을 끼운 순간이었다. 올려다본 얼굴에 그녀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저와 같은 보랏빛 눈동자.
“어, 멈추지 마.”
사람들이 발맞추는 소리가 쿵쿵 울렸지만 로하나의 발은 언제 그랬냐는 듯 땅에 박히듯 섰다. 음악은 여전히 흥겹게 울렸다.
“네가 어떻게…….”
그 순간, 어느새 나타난 케이든이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조금 거친 손길이 로하나의 허리와 어깨를 감쌌다.
“그렇게까지 놀라실 건 없잖아요, 델클리프 공작 부인.”
익숙한 목소리가 자연스럽게 투정을 부렸다.
“동생을 만났는데.”
눈앞의 사람이 두건을 벗자 부쩍 짧게 자른 검은 머리카락이 푸른 저녁 빛에 빛났다.
“오랜만이에요, 누님.”
브란드 하노버가 왜 여기에? 혹시 몰라 어느새 여왕 옆에 자리한 히스도 인상을 찌푸렸다.
“네가 왜…….”
“너무 그러지 마. 전에는 나한테 인사도 안 하고 가더니…….”
훌쩍 키가 큰 사람들이 모여 있으니 주변의 시선이 모였다. 로하나는 케이든과 모두를 손으로 물리며 브란드를 구석으로 데려갔다.
흥겨운 음악도, 사람들과 함께 웃던 왁자지껄함도 순식간에 아무 상관 없는 것이 되어 버렸다. 그것이 익숙하게 마음을 바닥으로 끌어내렸다.
“무슨 일이야?”
어이없다는 듯 짧은 숨을 내쉬는 누이를 내려다보며 브란드는 작은 한숨을 쉬었다.
“누나.”
“어떻게 여기까지 왔어?”
“로하나.”
그때 놀랄 만큼 따뜻한 손이 뒤에서 로하나를 감쌌다. 케이든이었다. 서늘한 눈매가 당황하는 기색 없이 제 처남을 내려다보았다.
“브란드 대위, 일행은 어디 있나.”
“저 혼자 왔습니다.”
“정말로?”
못 믿는 목소리를 내는 로하나에게 브란드는 피식 웃었다.
이슬라는 조금 일그러진 미소를 띠고는 브란드를 바라보았다. 아직 여왕의 얼굴을 모르는 브란드는 그녀를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아……. 혹시?”
그제야 그녀의 정체를 눈치챈 브란드가 아는 체를 했다. 로하나가 원래 알던 동생의 모습이 아니었다. 훨씬 위험해져 있었다.
“괜찮아요, 공작 부인. 손님의 손님은 제 손님이기도 하니까.”
툭툭 어깨를 치고 여왕은 히스와 먼저 몸을 돌려 걸었다.
로하나는 심란한 한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