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를 죽일 흑막과의 계약결혼-74화 (74/125)

74

여자는 크게 휘적여 걷던 다리를 대번에 멈추었다. 뒤를 돌아보자 저와 똑 닮은 딸아이가 못마땅한 얼굴로 그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오스틴 좀 말려 봐!”

뒤에서 금발의 큰 몸을 가진 남자가 쩔쩔매며 진분홍빛 머리칼을 가진 소녀를 내려다보았다. 아까의 집중하던 얼굴은 간데없이 여왕의 표정이 순식간에 풀어졌다.

“무슨 일이에요, 우리 딸?”

“여왕 전하, 저는 단지…….”

이슬라가 고개를 들어 오스틴의 말을 막았다. 능숙하고 요염한 미소가 입 끝에 걸려 있었다.

“세린 공주, 좋은 소식이 하나 있어.”

세린은 여전히 부루퉁한 얼굴로 심드렁하니 제 어머니이자 샤톤웰의 여왕인 이슬라를 올려다보았다.

“또 엄마와의 즐거운 쉬는 시간 같은 소리 하면 정말로 화낼 거야.”

이슬라가 살짝 고개를 저으며 천천히 입을 뗐다.

“델클리프 공작 내외를 여기로 초대할까 하는데?”

세린의 초록빛 눈동자가 순간 커다래졌다. 놀라면서 웃음이 번지는 얼굴을 보며 이슬라는 함박 미소를 지었다.

“이번엔 정말로 좋은 소식이지?”

즐거운 비명이 궁전에 울려 퍼졌다.

*

케이든은 늦은 밤이 다 지나서 서재로 돌아왔다.

분쟁 지역을 이렇게 무리해서 오가는 것은 좋은 버릇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공작저를 비우는 건 마음이 너무 불편했다.

“케이든.”

그때 히스가 들어왔다. 라자르에게 흑마법으로 당한 이후로 그는 미묘하게 야위어 보였다.

“로하나는?”

“레이디는 내가 숨겨 놓았지.”

쓸데없는 소리를 하는 걸 보니 기운이 좀 나는 모양이었다.

“일찍 쉬러 들어가셨어. 오늘 아침부터 한시도 안 쉬고 활을 쏜 모양이던데, 맞아?”

케이든은 속으로 뜨끔했다. 어떻게든 그녀가 위험한 마력을 사용하는 것을 막으려 미루고 미루다 나간 것이었는데, 막상 연습을 시작하니 그런 것 따위 까맣게 잊었다.

“늘 얘기하지만, 세상 사람이 다 너 같은 괴물은 아니다.”

케이든이 이례적으로 꽤 고분고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히스는 그와는 달리 섬세해서 매사 다른 방식으로 케이든에게 도움을 주곤 했다.

“다른 일은?”

히스가 천천히 입을 뗐다.

“두 가지 소식이 있어. 하나는 안 좋은 거고, 하나는 그냥 그런 건데.”

“그냥 둘 다 빨리 얘기해.”

케이든이 아까의 고분고분함을 그새 던져 버리고 제 모습으로 돌아와 퉁명하게 말했다.

“왜 노프탈의 영주가 굳이 하노버 영애와의 혼인을 유지하는지에 대해서 원성이 점점 높아진다나 봐.”

히스가 제 수하로부터 받은 보고서를 전하며 말했다. 케이든의 미간이 좁아졌다.

“리프, 샤르, 로즈힐, 코스날, 체리크, 타이즈넌까지 대규모 폭동이 일어나고 있고…… 노프탈도 여기에 지지 서명을 보내자는 게 각종 길드와 상단의 뜻인데.”

히스는 잠시 제 주군을 올려다보았다. 피곤한 얼굴에 심란함이 가득한데도 그의 얼굴에는 일전에는 없던 뭔가가 있었다.

의자에 앉은 그는 눈자위를 누르더니 다시 서류로 시선을 돌렸지만.

오로지 카르크족의 안정, 그리고 노프탈에만 온 신경을 끌어모으던 그가 이제 다른 생각을 하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그 사실이 갑자기 미묘하게 히스의 신경을 긁었다.

“케이든, 뭐 하나만 묻지.”

계속하라는 듯 케이든은 고개를 끄덕이며 보고서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왜 하노버였지?”

순간, 보고서를 넘기던 손이 멈추었다.

“샤톤웰 견제 같은 외교적 소리는 나한테 하지 말고.”

딱딱하게 굳은 얼굴이 히스를 쳐다보았다.

“샤톤웰은 언제든 노프탈의 독립이나 카르크족의 전쟁을 위해 우방으로 나서 줄 거라는 걸 네가 제일 잘 알고, 나도 알아.”

보고서를 내려놓은 케이든은 몸을 깊숙이 의자에 기댄 채 양손을 마주 깍지 꼈다.

“드레고리를 거꾸러뜨린 지금, 굳이 결혼을 유지할 이유가 있나?”

잠시 둘의 시선이 마주쳤다.

“레이디에 대해서 나쁘게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니야.”

“알아.”

케이든은 입을 꾹 다문 채 잠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미간이 좁혀지고 턱이 단단하게 굳었다.

“다른 하나는?”

“샤톤웰 왕국에서 온 초청장이야.”

“그렇군.”

케이든의 목소리가 낮게 깔리더니 말을 이었다.

“전자의 건은 너무 걱정하지 마.”

히스는 찬찬히 주군을 바라보았다. 짙은 흑안이 오묘한 빛깔로 일렁였다.

“네가 그렇게나 원하던 전쟁도 당연히 할 생각이고.”

케이든이 깊숙이 의자에 앉았던 몸을 꼿꼿이 세웠다. 은발 밑의 눈매가 전에 없이 날카로웠다.

“필요하다면 황위까지 탈환할 거다.”

순간, 히스의 미간이 좁혀졌다. 바로 세운 몸에 힘까지 들어가니 케이든은 앉아 있는데도 위압감이 상당했다.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그가 솔직하게 황위 찬탈을 말했다. 황궁으로 다시 발걸음조차 못 하던 그가.

“황위라고.”

케이든은 고개를 끄덕였다. 느른한 눈빛은 여유까지 돋보였다.

이 세상 대부분의 것을 포기한 얼굴을 했던 상처투성이의 소년이 이제는 당당해 보이는 얼굴로 이 세상을 가지겠다는 말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뭐 하나만 부탁하지.”

“뭔데.”

“혹시라도 그녀가 그때가 되어 진심으로 떠나려고 한다면…….”

히스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잠시 망설이는 듯 케이든의 미간이 좁혀지더니 천천히 입술이 열렸다.

“그 사람을 도와줘, 나는 막고.”

깔끔하게 올린 은발 아래 수려한 눈이 가늘어졌다.

“나도 내가 그 사람을 어떻게 할지 자신이 없거든.”

이내 비릿한 미소가 그의 얼굴에 떠올랐다. 낮디낮은 목소리는 섬뜩할 지경이었다. 히스는 잠시 숨을 죽였다.

“오늘같이 말로만 해서는 어림도 없을 테니 죽일 각오로 막아야 할 거야.”

히스는 차분하게 그를 바라보다 조용히 입을 뗐다.

“노프탈도 카르크도 걱정한 적 없어. 그런 걸 걱정했다면 우리 사이가 애초에 이렇게 되지 않았겠지.”

R. D.를 떠난 것도, 샤톤웰로 가지 않은 것도 그가 케이든을 선택했기 때문이었다. 악스톤의 죽음을 케이든의 공으로 돌린 것도 히스 자신의 아이디어였다.

그렇게 해서 좋은 때를 기다리자고 했고, 케이든은 결국 악스톤의 등에 칼을 꽂아야 했다.

그런 모습을 볼 정도로 평생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런 그가 로하나 하노버에게 다르게 구는 것은 이상하리만큼 불안했다. 그래도 그는 결국 로하나 하노버를 보낸다고 했다. 그러니 괜찮을 것이다.

히스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문을 닫았다. 내달리는 마음을 잡을 제대로 된 고삐가 필요했다.

*

“오늘도 늦었네요.”

자정을 훌쩍 넘겨 서재가 아닌 침실 내실로 들어오는 케이든을 보며 로하나가 말을 붙였다. 달빛이 유난히 환한 밤이었다.

“네.”

“굳이 그 먼 거리를 이렇게 다니시려면 힘드실 텐데요.”

“뭐 그 정도야.”

케이든이 응접실의 수많은 소파 중 굳이 그녀의 옆에 앉으며 말했다.

“이제 공작저가 위험할 일도 없는데 무리하지 마세요.”

“무리하는 거 아닌데.”

태연한 미소를 지으며 가늘게 눈을 뜨는 그는 거부하기 힘든 분위기를 내뿜었다. 로하나는 저도 모르게 큰 숨을 내쉬었다.

“칼라드리우스에 대해서 알고 싶으시겠죠?”

의외의 말에 로하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네.”

“이번에 샤톤웰에서 초청 건이 왔습니다.”

케이든의 말에 로하나가 눈썹을 치켜떴다. 원작이 오랜만에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이렇게 둘은 세력을 잡아 제국의 반란군이 된다.

“그렇군요.”

“그래서 곧 출발하려고 합니다.”

“잘 다녀오…….”

“같이.”

케이든이 날카로운 턱을 쓸며 말했다.

“같이 가죠.”

“그럼 저도 좋죠.”

“아마 관심을 가지실 만한 것들이 좀 있을 겁니다.”

그게, 뭔데요? 하고 로하나가 입을 열려는 그 순간이었다. 순식간에 뜨거운 열기가 그녀를 덮었다.

비현실적일 정도로 단단한 팔과 가슴이 그녀를 끌어안았다. 쥐다시피 끌어안은 그의 힘에 순간적으로 다리가 들릴 정도였다.

로하나는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천천히 눈을 뜨자 흐트러진 은발 아래로 짙은 눈동자가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마치 온몸을 확인하듯 조심스럽게 그녀를 쓰는 손길과 집요한 눈길이 우아하고 섬세했다.

머리카락과 귀를 지나 목, 가슴 윗부분 그리고 허리에서 그 밑으로까지.

로하나는 숨을 죽였다.

“칼라드리우스랑 샤톤웰이 무슨 관계가 있는 거죠?”

로하나가 양손으로 그의 양팔을 쓸며 잡았다. 그의 입술이 멈췄다. 아직 심장 박동도 제대로 진정되지 않은 그였다. 그녀 역시 그러했고.

“그건 가서.”

이번엔 그녀의 가느다란 손끝이 천천히 그의 가슴과 팔을 더듬었다. 땀이 식어 차가운 몸에서 강한 박동이 느껴졌다.

그의 몸을 더듬던 손 위로 커다란 손이 덮이며 깍지를 끼었다.

하나하나.

그렇게 양손이 잡히자, 로하나는 목을 한껏 들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아주 잠깐만.”

케이든이 깍지 꼈던 손을 재빨리 빼서 그녀를 제 위로 그대로 안아 올렸다. 심장이 이보다 더 빠르게 뛸 수 있을까.

허리와 무릎 뒤를 받치는 양손이 단단했다.

할 이야기가 많았지만.

그의 허리에 무릎이 닿을 듯 높게 안긴 로하나는 고개를 숙여 그를 찾았다. 입술이 부드럽고도 강하게 그녀를 덮쳤다.

뭐라 설명할 수 없는 안도감과 놓치고 싶지 않은 불안이 뒤엉켜 입술이 얽혀 들어갔다.

로하나도 속으로 동의했다.

아주 잠깐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