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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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한 숲에는 박새가 지저귀는 소리만이 간간이 들려왔다. 로하나는 탄탄하고 넓은 가슴 앞에 바로 붙은 채 가는 숨을 내쉬었다.
걷어 올린 셔츠 소매 아래 드러난 단단한 팔이 근육 모양대로 깊게 갈라졌다. 손끝과 몸의 중심이 일치하면서 뜨거운 체온이 등을 덮었다.
“숨을 참고…….”
낮은 목소리에 로하나의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놓으십시오.”
탕, 하는 소리와 함께 빛나던 화살이 과녁에 명중했다. 화살에서는 드디어 자유자재로 새하얀 마력이 일렁였다.
로하나가 싱긋 미소를 지으며 돌아보자 케이든이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눈이 녹기 시작한 봄, 연한 녹색의 어린 순이 돋아나고 노란 생강꽃이 어지러이 들판을 수놓았다.
곧게 뻗은 콧대에 날카롭고 각진 턱, 짙은 눈매에 아름다운 목선이 초봄의 반짝이는 햇살에 빛났다.
그때 저 멀리서 히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디 가셨나 했더니.”
조금 길어진 머리를 반묶음을 한 히스가 경쾌하게 웃었다. 로하나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퍼졌다.
“히스!”
유난히 발랄한 목소리에 케이든이 미간을 찌푸렸다.
“오늘 데이트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오후에 저희 공작님께서 급한 일이 있으시다는데 제가 없으면 레이디 혼자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히스가 낭랑하게 대답했다.
“그냥 쉬면 되지 않았을까.”
케이든의 심드렁한 목소리를 무시하며 둘은 오늘 점심에 먹을 음식을 의논했다.
날이 조금 풀렸으니 콜드 샌드위치가 어떻겠냐는 로하나의 목소리를 들으며 케이든은 그녀의 활을 대신 들었다.
봄이 오고 있었다.
긴장이 풀린 탓인지, 체력이 바닥난 탓인지 로하나가 긴 눈을 나른하게 떴다.
“저는 나갔다 오겠습니다.”
“지금요?”
“보고도 받아야 하고, 확인도 해야지요.”
“칼라드리우스에 대해서 더 알게 된 건 없는 건가요?”
그 일이 있고 난 뒤, 케이든은 전에 없이 바빴다.
간간이 일어나는 과격한 시위를 최대한 다른 피해가 없도록 진화해야 하는 것도, 그 과정에서 여전히 ‘로하나 하노버’의 존재가 그의 정치적 입지를 곤란하게 한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더 이상 예전처럼 다가오지 않았고, 로하나는 심지어 ‘라자르’와도 관련이 있어 보이는 저를 그가 멀리하는 것이 충분히 이해되고 남았기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몸이 서로 끌어당기는 것을 거부하진 못했지만.
기묘한 우정으로 굳은 관계가 겨울을 지나 봄까지 이어져 갔다.
“애석하게도.”
태연하게 웃는 그의 얼굴은 처음 만났을 때처럼 그림 같기만 했다.
“그렇군요. 일단 최근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어요.”
“걱정할 건 없습니다. 당신의 도움이 필요한 상황은 만들지 않을 테니까.”
순식간에 어두워진 그가 로하나는 조금 낯설었다.
“케이…….”
허리께에 있던 손이 어느새 올라와 로하나의 얼굴을 감쌌다.
“약속대로 잘 키워 주고 있지 않습니까.”
그의 긴 손가락이 그녀의 턱을 지나 쇄골에 닿았다.
로하나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바르디 쪽에서 일단 숨을 고르고 있으니 우리도 우리 할 일을 하면서 있을 뿐이죠. 당신은 약속한 날 전에 계획대로 여기를 떠나면 되는 거고.”
로하나의 진지해진 표정을 감지했는지 케이든의 눈빛이 방어적으로 바뀌었다. 닿을 듯 아슬아슬했던 그의 입술과 가슴이 훅 멀어졌다.
갈라진 근육이 햇살에 그림자를 만들어 냈다.
“R. D.를 제압할 방법도 잘 알아보고 있어요.”
케이든이 가벼운 망토를 걸치며 말했다. 날렵한 턱 위로 엷은 미소가 띄워져 있었다.
“당신은 걱정할 것 하나 없습니다.”
로하나는 저도 모르게 조금 벌어져 있던 입술을 닫았다. 결국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고서야 케이든은 그녀의 이마에 짧게 입을 맞추었다.
“히스, 이거.”
케이든은 히스에게 로하나의 짐을 넘기며 마지못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녀오겠습니다.”
크고 거친 손이 부드럽게 등을 쓸었다.
로하나와 히스는 잠시 케이든이 멀어지는 것을 바라보았다. 겨울이 끝나 가도록 폭풍 전야인지 아닌지 모를 조용한 평화가 흐르고 있었다.
“오늘 데이트를 취소하게 되어서 어떻게 해요.”
로하나가 히스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별일 아니었습니다.”
히스가 눈웃음을 지었다.
그날 크게 다친 이후로 히스는 어쩐지 기운이 없어 보였다. 어째서인지는 딱히 꼬집어 말할 수 없었지만.
다만 최근 들어 예전처럼 다양한 영애들과 좋은 시간을 보내는 것 같기에 다행이라고 짐작할 뿐이었다.
“저랑은 오늘 그냥 노는 것은 어떠세요?”
“히스까지 이러기예요?”
케이든은 별로 성실한 선생님이 아니었다. 그런데 히스까지 이럴 줄이야.
“도대체 다들 지도 의지가 너무 없어요.”
히스가 미묘하게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도서관에서 간단한 마력 연습을 해 볼까요? 곧 비가 온다는 말이 있던데.”
안 그래도 봄비가 올 것같이 공기가 촉촉했다.
“오늘은 시리율이 없지 않나요?”
히스가 주머니에서 열쇠를 찰랑 꺼내 보이며 웃었다. 로하나도 빙그레 웃었다.
도착한 도서관엔 밝은 햇살이 긴 창문을 밀고 들어왔다. 깔끔한 원목의 슬레이브 책상 여러 개가 각각의 무늬를 빛내며 따뜻하게 빛났다.
히스는 시리율의 사무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여리여리한 몸이 부드러운 몸짓을 했다.
로하나는 시리율이 가져왔던 고문서를 꺼내 보았다. 로마 신화에서처럼 여기에서도 황제의 새인 칼라드리우스는 병마를 없애는 새라고 했다.
역시나 노랫소리에 대한 설명은 없었다. 분명 그녀한테만 들렸던 깨끗한 소리가 기록조차 없는 일이라니.
“궁술이 더 느셨던데요.”
“아직 멀었어요. 그리고 그땐 분명 황금빛이었는데 아직 흰빛 말고는…….”
다시 해 보려고 해도 그 황금빛은 다시 나오지 않았다. 아까 케이든의 도움을 받아도 흰빛이 나올 뿐이었으니.
“칼라드리우스가 도움을 줬던 것 같은데…… 어떻게 된 영문인지는 저도 아직 모르겠어요.”
도대체 그 순간의 그것은 무엇일까.
로하나가 생각에 빠져 있는 사이 히스는 주섬주섬 시리율의 책상에서 뭔가를 꺼냈다. 알록달록 화려한 색상의 포장지로 감싼 초콜릿이었다.
“초콜릿 드실래요?”
“시리율한테 혼날 것 같은데.”
“레이디께 드렸다고 하면 화 안 낼 겁니다.”
로하나는 히스의 너스레에 피식 웃었다.
긴 양 손가락에 작은 커피 잔이 들렸고 오른손에는 티포트와 초콜릿이 든 바구니가 들려 있었다. 그때 갈레드가 모아 놓은 편지함으로 로하나의 시선이 잠시 향했다.
“황제의 편지가 여전히 도착하는 모양입니다.”
히스가 먼저 말을 꺼냈다. 그가 내려놓은 커피 잔이 나무 탁자에 닿으며 편안한 소리를 냈다.
“뭐…… 그렇죠.”
심드렁한 목소리에 히스가 피식 웃었다.
“제가 불태워 드릴까요?”
로하나는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리며 잠시 고민했다.
“케이든은 여전히 모르나요?”
“네, 뭐 굳이…….”
로하나는 말끝을 흐렸다.
“케이든이 알면 안 될까요?”
“어차피 쓸데없는 소리만 가득한걸요. 전략에 도움 될 내용은 없는데 굳이 볼 필요 없겠죠. 속만 터지지.”
로하나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냥 저만 터지면 되니까요, 그 속은.”
히스가 피식 웃음을 지었다. 그때 빗소리가 차분하게 도서관에 내려앉았다.
굳이 사용인을 부르지 않고 이렇게 알아서 차려 먹는 다과상은 그 나름대로 맛이 있었다. 특히 히스의 능숙한 손놀림은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희한하게 편안했다.
“매번 이렇게 제 보모처럼 지내야 해서 어떻게 해요.”
케이든은 어떻게든 공작저에 머무는 시간을 늘리려 애썼지만, 원래도 하루 종일 밖을 돌던 그이니 영원토록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서서히 히스에게 다시 부탁하는 그를 보며 로하나는 케이든에게도 히스에게도 서글픈 미안함 비슷한 걸 느꼈다.
어서 더 강해져야 할 텐데.
“레이디 보모라면 언제든 환영인데요.”
늘 그렇듯 농담을 던진 히스가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었다.
“덕분에 목숨을 구했으니 이제 저는 레이디 것 아니겠어요?”
순간, 로하나의 시선이 히스를 향했다. 옅은 회색 눈동자는 찻잔을 내려다보며 차를 따르고 있을 뿐이었다.
“히스가 절 구한 것이 더 여러 번인걸요.”
로하나의 진심 어린 말에 히스는 다시 고개를 들어 생긋 웃어 보였다.
*
건조한 공기에 짙은 향신료 냄새가 은은했다. 붉은 수정들로 장식한 화려한 보석 팔찌가 가는 팔에 걸려 움직일 때마다 반짝였다.
“그래서…….”
옅은 자줏빛 머리카락의 여자가 느른하게 기대 있던 몸을 조금 일으켰다.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사태가 심각하다고 보면 된다고?”
보고서를 넘기는 긴 손가락에는 화려한 문신이 오색으로 새겨져 있었다.
“아, 여기 있구먼. 리프, 샤르, 로즈힐, 코스날, 체리크, 타이즈넌까지라.”
짙은 녹색에 가까운 눈동자가 흥미로운 빛을 내뿜었다.
“아르드골드 제국 전체가 난리가 납니다. 이대로라면 어느 쪽에서 먼저 무력 충돌이 나더라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 왕자님은 여전히 그 하노버 공녀인지랑은 결혼을 유지하고 계시고?”
“저희 조사에 따르면 하노버 공작가 자체가 지금 큰 위기랍니다. 그것에 이 공녀가 이바지했다는 소문이 자자합니다. 남동생인 브란드 하노버가 여기저기 욕을 하고 다니는 모양이에요.”
여자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래?”
여자는 긴 머리카락을 꼬며 천천히 생각에 잠겼다. 노프탈에 갑자기 나타났던 칼라드리우스와 라자르 때문에 케이든은 꽤 오랜 시간 그녀의 청을 거부해 왔다.
추이 파악을 하기 위함이니 충분히 이해하는 바였지만.
여자가 보고서를 툭 던지자 앞에 서 있던 남자가 서둘러 서류를 잡아 챙겼다.
“아무래도 우리가 다시 만날 때가 된 것 같네.”
여자가 굽이치고 있던 긴 자주색 머리카락을 어깨 너머로 넘기며 입을 뗐다.
“그럼 전서구를 보낼까요?”
“응.”
허리를 세우며 일어난 여자는 긴 다리로 빠르게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길게 올라오는 칼라는 목을 단단하게 감싸고 있었지만 팔과 등이 훤히 드러난 드레스는 허리와 다리 부분의 폭이 넓어 움직임을 크게 만들었다.
그때 뒤에서 경쾌한 아이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