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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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든은 우선 제 팔에 안긴 히스를 살폈다. 흑마법의 부작용인지 손목에는 심각한 후유증이 남아 있었다.
케이든은 속으로 욕을 내뱉었다. 그때 군인들이 크게 술렁였다. 로하나가 활도 내팽개친 채 뛰어오고 있었다.
“우선 이동합니다.”
케이든의 말에 로하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의 믿을 수 없다는 시선이 로하나를 뒤쫓았다.
공작저의 의원이 케이든이 들이닥침과 동시에 히스에게 달려들었다.
“우선 내가 한다. 지금은 급하니까.”
케이든은 이 추운 날씨에 흰 셔츠 하나 달랑 걸쳤음에도 온몸이 땀으로 젖어 있었다.
침대에 누인 히스의 얼굴이 창백했다. 케이든이 침대 위로 올라가 그 위에 자리했다.
“히스…….”
“공작 부인을 모셔라.”
그러자 군인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로하나를 붙잡았다.
“케이든?”
케이든은 로하나 쪽을 보지도 않으면서 짧은 단검을 꺼내 들었다. 순간 흰빛이 일렁였다. 그와 동시에 케이든이 단검으로 히스를 그대로 내리 찔렀다.
깜짝 놀란 로하나가 입을 틀어막았으나 놀랍게도 검은 그대로 허공에 머물렀다.
순식간인지 오래인지 모를 시간이 지나고, 히스가 거친 숨을 내쉬었다.
케이든이 단검을 다시 찔렀다. 이번에는 스치는 순간, 히스의 손목에서 선혈이 조금 비쳤다.
히스가 다시 기침을 했다. 그제야 의원이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케이든은 거의 올라타다시피 하던 자세에서 그대로 옆으로 떨어져 툭 하니 누웠다.
깊은 한숨이 토하듯이 흘러나왔다.
빠른 속도로 히스의 얼굴색이 돌아오고 있었다.
“대단하십니다, 전하.”
의원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케이든은 반응 없이 침대에서 내려오더니 양팔을 무릎에 올린 채 이마를 짚었다.
로하나는 거칠게 방위병들의 속박을 거부하곤 그들 사이에 서 있었다. 반항적인 눈이었다. 혼란에 가득 차 있기도 했고.
케이든은 최대한 이성적으로 물었다.
“다친 덴.”
로하나는 고개를 저었다.
“이상하게 보일 것 알아요.”
“그래.”
케이든은 알 수 없는 불안함과 불쾌감을 겨우 억누르며 로하나를 내려다보았다.
“얘기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군.”
케이든이 손가락을 맞부딪쳐 소리를 내자 로하나 옆에 바짝 붙어 있던 군인들이 물러났다.
그들이 문을 열고 나서자 상기된 얼굴의 시리율이 이즈 바로 옆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 새가 뭔지 알 것 같아요. 고작 한두 줄짜리 설명이지만 겨우 찾았어요.”
빛이 바래 글이 거의 보이지도 않을 것 같은 오래된 책을 들고 있는 그녀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지금은 다시 북쪽으로 종적을 감췄습니다.”
“피해 상황은?”
“이상 없습니다.”
갈레드가 다른 대장들의 보고를 취합해 왔는지 거친 목소리로 대답했다. 케이든은 조용히 목을 꺾으면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보고는 이따 받지. 나머지는 각자 자리에서 대기해.”
경례를 붙이는 소리가 절도 있게 돌바닥을 울렸다.
땀이 식기 시작해서인지 그의 몸에 셔츠가 불쾌하게 달라붙었다.
케이든은 걸으며 로하나를 바라보았다. 얇은 실내복 드레스가 역시나 엉망으로 흐트러져 있었다. 열이 식으면 감기가 들지도 몰랐다.
그 생각까지 하고 나서 케이든은 어이가 없어 속으로 피식 웃었다.
‘도대체가…… 당신은.’
내실에 도착하자 뜨거운 물을 마침 내려놓던 시녀들이 그들을 맞이하곤 조용히 문을 닫고 나갔다.
“돌려서 묻지 않겠습니다.”
로하나는 가만히 그를 올려다보았다. 가는 어깨와 팔에 비해서 활을 쏘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었다. 라자르랑 했던 그 이상한 대화는 말할 것도 없고.
로하나 하노버.
도대체 당신은 뭐 하는 사람이지?
“라자르랑 어떻게 아는 사이지?”
담백한 질문에 로하나의 눈동자가 당황한 듯 흔들렸다.
“대답하는 것이 좋을 겁니다.”
로하나는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내쉬기만 하고 대답이 없었다.
“분명 물러나 있으라고 했는데 굳이 라자르를 공격한 이유가 뭡니까.”
잇따른 질문에도 그녀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뜰 뿐이었다.
순간 설명할 수 없는 분노에 휩싸인 케이든이 그녀에게 다가갔다. 가까워진 거리에 숨이 막힐 듯한 긴장이 흘렀다.
“당신 뭡니까.”
케이든은 저한테 흐르는 낯선 감정에 혼란스러웠다. 악스톤 사건을 겪을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너무나 이상하고 수상한 사람인데도 사실 지금은 그녀가 안전하게 제 앞에 있다는 것에 마음이 편해져 버리고 마는 자신이 더 어이가 없었다.
“전…….”
쿵쾅거리는 서로의 심장 소리가 눈을 통해 온몸으로 전해졌다.
“라자르 수하라도 됩니까.”
“아니요.”
“그럼 누구의 지령을 받았습니까.”
“그런 것 받은 적 없어요.”
가늘어진 목소리가 파르르 떨렸다. 꼭 맞춘 두 눈이 붉게 충혈되었고 이유 모를 눈물이 고인 것인지 유난히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어느 편에 서 있는 겁니까.”
로하나가 잠시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꿈에서.”
그녀답지 않게 황당한 대답에 케이든의 미간이 좁아졌다.
“꿈에서 들었어요. 나한테 미안하다고 그랬어요, 저여야만 한다고.”
“당신이어야만 한다고?”
케이든은 미심쩍은 숨을 몰아쉬었다. 필히 그가 할 법한 소리이긴 했다. 더 미룰 수 없다. 전쟁을 일으켜야 하고, 그러려면 로하나 하노버가 희생타로 지금 제격이라고.
무슨 짓으로 남의 의식 속에까지 나타나는지 알 수 없었으나, 그를 인간이 이해할 순 없다는 걸 케이든은 잘 알고 있었다.
“늘 말했듯 나는 그냥 살고 싶을 뿐이에요.”
로하나의 핏대 선 눈이 진실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케이든은 알 수 있었다.
“아무도 필요 없을 수 있게, 혼자서.”
그 말이 라자르와의 관계를 의심했던 순간보다 더 아파서 케이든은 잠시 인상을 쓴 채 가늘게 뜨고 있던 눈을 질끈 감았다.
“그렇군요.”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어요. 내가 그 새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이유만 찾아내면 되지 않을까요.”
아린족인 로하나, 라자르가 알게 모르게 접근했던 모양이지. 고작 목숨을 구했던 인연에 대책 없이 굴지 않아야 할 때였다. 사적인 감정에 너무 오래 취했었다.
“어쨌든 덕분에 히스의 목숨을 건졌군요.”
케이든은 비릿하게 웃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케이든이 손가락으로 로하나의 턱을 살짝 들어 올리자 그녀 역시 담담한 눈빛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긴장이 풀리며 도리어 붉은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
혼인 무효를 알리는 황제의 서신이 전제국으로 빠르게 퍼져 나갔다.
바르디는 의자에 몸을 깊숙이 기댔다. 노프탈로 가는 길목에서 오렐리아가 목격되었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똑똑한 선택이었다.
그도 그녀가 당연히 그곳으로 향하리라 생각했다. 케이든이 당장에 그녀를 돌려보내지 않는 것도 예상했던 바였고.
케이든은 그 누구라도 어린 시절 자신과 같은 꼴을 당하게 하진 않을 테니까.
바르디는 천천히 상황을 되짚었다. 모든 것이 나쁘진 않았다.
딱 한 가지만 빼고.
웃을 때면 그림같이 호선을 그렸던 길고 큰 두 눈이, 알 수 없는 우아함이 서려 있어 시원시원하면서도 흐트러짐 없던 움직임 하나하나가 떠오르자 바르디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비틀었다.
관자놀이에서 뛰는 두통이 엄습했다.
‘도대체 얼마나 멍청했기에 그런 실수를 했던 건가.’
가만히만 있었으면 로하나는 제 것이었다. 처음부터 늘 그러했듯이. 전쟁이야 조디라는 계집년이 로하나를 해치려 했을 때 얼마든지 냈으면 되었다.
순간 선황제가 했던 말이 그의 뇌리에 스쳤다.
<너는 네 아비와는 달리 성정이 급하지 않고 여색도 밝히지 않아 정말 좋구나. 로하나가 천하의 절색이라 그런가?>
늘 그런 식이었다. 그래도 케이든에 비하면 늘 부족한 자신이었지만.
바르디는 쥐고 있던 펜대를 부서져라 움켜쥐었다.
나는 왜 오렐리아여야 했는가.
그땐 왜 그녀밖에 안 보였던가.
바르디는 펜대를 있는 힘껏 내리쳤다. 얇디얇은 금속으로 된 펜 끝이 그대로 박살이 났다.
노프탈에서 케이든 옆에서 떨어지지 않던 그 아이. 그녀가 그를 올려다보던 눈. 케이든이 아무렇지도 않게 친숙하게 대하던 그녀.
사실 세상이 칭송하는 아름다운 외모는 애초에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었다.
펜대를 깨뜨리며 박살 난 금속이 손에 상처를 남겼는지 종이에 피가 방울방울 떨어졌다.
결혼을 한 달 앞두었던 그날.
<케이든 델클리프에게 보내셨다고 합니다.>
바르디는 선황제가 매번 케이든에게 서신을 보냈다는 얘기를 듣고 노프탈로 갔다.
그 빌어먹을 보고를 하필 그때 받지만 않았어도 오렐리아라는 허상에 사로잡히지 않을 수 있었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쥐고 있던 펜대의 조각이 손가락 안으로 파고들었다.
바르디는 피투성이가 된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심호흡을 했다. 기다린다고 했으니, 기다린다. 그녀도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로 처음으로 눈가가 붉어지는 것을 느끼며 바르디는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지었다.
“황제 폐하.”
그때 부디에르가 들어왔다.
“그래, 진척 사항은?”
“이제 시작하려고 합니다. 샤톤웰 서부는 경계가 심해 쉽지 않을 것 같았지만 역시 다 방법이 있군요.”
“그래.”
바르디는 대답을 하며 창밖을 바라봤다. 한겨울이 깊어 가고 있었다.
“대략 걸릴 시간은?”
“아마, 봄은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주눅이 잔뜩 든 목소리로 부디에르가 겨우겨우 대답했다.
“그렇군.”
바르디는 천천히 손을 폈다. 펜의 조각이 살을 파고들고 있었다.
로하나.
조각을 꺼내며 바르디는 천천히 생각했다.
잠시만 기다려.
곧 죽어야 할 사람들이 죽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