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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스!”
히스의 모양새가 엉망이었다. 눈에 띄게 창백한 얼굴에 뭔가에 속박된 양손이 보였다. 그림자 같은 것이 잔인하리만큼 그의 손목을 쥐어 잡고 있었다.
살기가 혈관을 타고 흐르는 것이 보일 정도로 케이든의 근육과 몸짓에 힘이 들어갔다. 파인체이서 공작가에서도 보았던 위험한 모습이었다.
라자르의 눈에서, ‘이제 이 흑막을 알아보겠어?’ 하는 눈빛이 흘렀다.
‘그러니 애매하게 애쓰지 말고 얌전히 운명을 수용해.’
로하나는 미간을 좁혔다. 케이든이 낮게 으르렁거렸다.
“뭐 하자는 거지?”
“꿩 대신 닭이라고, 로하나 하노버를 못 주겠으면…….”
라자르가 느릿하게 대답했다.
“오렐리아라도 데려가려고.”
라자르의 말이 막 끝난 순간이었다. 순식간에 케이든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뭐야?
순간, 쾅 소리가 나며 둘의 검이 마주쳤다. 케이든의 표정이 무서울 정도로 차가웠다.
그와 동시에 이즈가 갑자기 뛰어내렸다. 저도 모르게 입을 틀어막는 로하나의 시선이 순식간에 다시 하늘로 향했다. 새카만 새가 거꾸로 날아오르고 있었다.
‘말도 안 돼.’
로하나만이 들을 수 있는 소리로 노래하는 하얀 새에 비해서는 작았지만 굉장히 빨랐다.
순식간에 하늘로 솟아올랐던 이즈는 그대로 급강하하면서 라자르를 향했다. 순간, 라자르의 눈빛이 더 붉게 빛났다.
무언가에 부딪친 듯 이즈가 엄청난 소리를 내며 빠르게 떨어져 내렸다.
“이즈!”
갈레드가 창을 반대편 높은 탑 쪽으로 던지자 다시 떨어지던 이즈는 벽에 박힌 창을 밟고 다행히 다시 곤두박질치는 것을 피했다.
로하나는 빠르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런 사태를 대비해서 ‘키워 달라고’까지 했던 것인데.
그때 다시 노랫소리가 들렸다. 로하나가 시선을 올리자 주탑에서 오팔색 눈을 한 새가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로하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분명 할 수 있는 것이 있다.
라자르의 말대로 저 미친놈에 의해서 그녀가 여기에 온 것이고.
필요 이상으로 역할을 했다는 것은 그녀가 원작을 비틀다 못해 그가 원하는 방향으로 가지 못하게 했다는 것.
로하나는 건물 안으로 달렸다. 그때 뭔가가 로하나의 시야를 사로잡았다.
*
콰콰과과아아아아아앙.
순식간에 복도의 일부가 부서져 나갔다.
시공간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모든 시공간을 파악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즈의 잇따른 공격과 척후병, 궁수의 공격은 문제가 아니었다. 마력으로 얼마든지 무력화시킬 수 있었으니까.
이것들은 정신이 없기만 할 뿐.
다만, 케이든의 검술을 마력만으로 방어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라자르는 결국 검을 집어 들었다. 새빨간 루비가 박힌 검이 그의 눈처럼 빛났다.
그때 검으로 엄청난 힘이 부딪쳐 왔다.
쨍그랑, 하는 쇳소리가 겨울 공기를 찢었다.
아차 하는 사이, 케이든이 뒤에서 라자르의 목에 검을 들이댔다. 새하얀 빛이 일렁였다.
“이래 봤자 나는 도망칠 수 있어.”
“아, 그런가?”
그때 케이든의 검이 순식간에 새파란 빛으로 바뀌었다. 라자르가 미간을 좁히며 몸을 이동했지만 순식간에 목에 옅은 상처가 남았다. 피가 배어 나왔다.
“아직도 내가 그때 그 꼬마 같은가.”
케이든의 목소리엔 여유가 있었다.
“너무하네.”
“선을 먼저 넘은 건 너다.”
케이든이 쓰게 말했다. 두 남자의 시선이 부딪쳤다. 라자르가 피곤하다는 듯 한숨을 폭 쉬었다.
그때 기둥 뒤에 숨었던 오렐리아가 입을 뗐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거예요, 정말?”
시선이 일제히 그녀에게로 쏠렸다. 케이든을 올려다보는 눈에는 이상할 만큼 감성적인 눈물이 가득했다.
“여긴 로하나 대신 너를 쓰려는 것뿐이야. 필요할 때 라자르는 널 죽일 거다.”
냉정한 눈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럼 여기 남으면 날 살려 줄 거예요?”
작은 목소리에선 감정이 뚝뚝 묻어났다.
“내가 황후에서 쫓겨나면 바로 체포해서 영원히 가둘 거면서.”
“네가 한 일의 책임을 져야겠지?”
날카로운 턱이 비스듬하게 기울었다.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
오렐리아가 반항적으로 말했다. 갈레드와 이즈까지 돌아보는 그녀의 황금빛 눈이 형형하게 빛났다.
“R. D. 없이 싸워서 전쟁에 승산이 있을 것 같아요?”
갈레드와 이즈가 흠칫했다.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어? 사실상 당신의, 우리의 원수를 처벌하려는 것 말고 더 있어?”
갈레드의 미간이 좁혀졌다. 이즈 역시 조금 동요하는 것이 보였다.
케이든은 그제야 이즈가 지키고 섰는데도 오렐리아가 멀쩡히 공작저를 돌아다니는 것이 이해가 되었다.
“나는 R. D.를 인정한 적도 없을뿐더러…….”
케이든이 느릿하게 말했다.
“내 원수는 네가 알 바가 아니야.”
오렐리아가 입술을 깨물었다.
“특히 로하나 이름 한 번이라도 더 입에 올리면 너라도 예외는 없어.”
나비 같은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그럼 할 수 없네. 내가 갈 수 있는 가장 높은 곳으로 가는 수밖에.”
오렐리아가 말했다.
“저번에도 그랬고, 이번에도 그럴 거야.”
“마음대로 해.”
케이든의 목소리에 적의가 흘렀다. 옛정을 생각해서 봐주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네가 이렇게까지 알아서 끝까지 가 주니 나도 편하군.”
오렐리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때 순식간에 케이든의 칼이 움직였다. 오렐리아가 눈을 움찔했다. 순식간에 오렐리아 앞을 가로막아 선 라자르의 얼굴에 상처가 스쳤다.
간발의 차이였다.
“경고했을 텐데.”
라자르가 처음으로 당황한 얼굴을 했다. 다른 우주에서는 오렐리아에게 칼은커녕 눈빛도 차게 못 하던 그였다. 오렐리아의 놀란 눈에서 눈물이 뚝 떨어졌다.
“어차피 너도 R. D.도 없애기로 한 거니 그냥 여기에서 둘 다 끝내 줄 수밖에.”
순간, 멈칫하는 틈을 놓치지 않고 케이든의 날카로운 검이 치고 들어왔다. 빠른 검이 푸른빛을 내며 허리춤을 지나 가슴을 스쳤다.
그때, 뒤에 기대 보호받던 히스가 기침을 했다.
“내가 이 친구 잡고 있던 걸 깜빡한 것 같아.”
케이든이 인상을 썼다. 라자르의 마력은 보통의 것이 아니었다.
히스에게 걸린 마력은 무엇일까.
해제하기까진 시간이 필요했다.
공격하면서 그게 가능할까.
수많은 생각이 지나는 찰나의 순간, 이번엔 라자르의 역습이었다. 순식간에 던져진 흑마법에 갈레드와 이즈가 그대로 튕겨 나갔다.
갈레드는 검을 드는 것이 늦었고, 이즈는 변모하는 것이 늦었다. 겨우 떨어질 뻔한 것을 케이든이 마력으로 멈춰 세웠지만 절벽에서 둘은 아슬아슬했다.
다시 공격이 들어왔다.
“여기에서 한 발자국만 더 움직이면.”
라자르가 음험하게 말했다.
“악스톤의 아들이 죽어.”
케이든의 눈이 가늘어졌다. 히스의 손에 묶인 검은 수갑 모양의 속박이 더 강하게 그를 옥죄었다.
“케이든, 그냥 해.”
의식이 거의 없는 중에도 히스가 중얼거렸다. 케이든이 이를 까득 깨물었다.
그때였다.
엄청난 바람이 주변을 휩쓸었다. 거센 바람에 순간적으로 소리가 들리지 않을 지경이었다.
채 무엇인지 느끼기도 전에 먹먹한 공기를 뚫고 쐐액 하는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노란빛의 광선이 라자르를 뚫었다. 라자르의 놀란 눈동자가 주탑 쪽을 향했다.
도망을 위해 공간을 초월하는 그 순간, 라자르는 오렐리아를 향해 손을 뻗었다. 케이든의 손이 그녀를 향했지만 아슬아슬하게 닿지 못했다.
그 찰나의 순간, 번개처럼 둘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순식간에 침묵이 찾아왔다.
팽팽하게 마주하던 마력이 사라지자 이즈와 갈레드가 떨어질 뻔했던 복도의 절벽에서 겨우 올라왔다.
케이든은 쓰러지는 히스를 받으면서 고개를 들었다.
주탑 방향.
새하얀 새의 펄럭이는 날개와 오팔빛 눈동자가 그를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커다란 날개에서 이는 바람이 거셌다.
그리고 그 새 앞에 전혀 의외의 인물이 활을 들고 있었다.
조금 확장된 보랏빛 눈동자가 흑안과 마주쳤다. 아직 그녀의 손에 들린 활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분명 할 수 있는 것이 있다.
순간, 그녀의 눈에 방위병들이 쓰는 유난히 길고 강한 활이 들어왔다. 로하나는 빠른 발걸음으로 활 통을 스치며 하나를 집어 들고는 주탑 쪽으로 향했다.
세 번이나 마주쳤지만 여태까지 아무 일도 없었다. 거짓말처럼 두려움은 없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고 다리는 갑작스러운 뜀박질에 고통을 호소했지만 이상하게도 머리는 차분했다.
저렇게 모두가 사색이 되는 라자르가 나를 굳이 이 세계에 데려왔다면.
그러고도 지금 ‘로하나’가 제 뜻대로 되지 않아서 이러고 있는 것을 보면. 어쩌면 나에게 필요한 것은 제대로 된 반항을 하는 것뿐일지도 모른다.
주탑으로 향하는 곳에는 방위병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마님!”
로하나는 이런저런 말 없이 그대로 달렸다. 당황해서인지 잠시 모두가 어쩔 줄 모르는 틈을 타, 로하나는 그대로 인파를 뚫고 주탑으로 향했다.
순간, 엄청난 바람이 불었다. ‘하얀 새’, 라자르에 따르면 그 새의 이름은 칼라드리우스. 그것이 너른 날개를 활짝 펼쳐 바람을 일으켰다.
마치 인사를 하는 것 같아 보였다.
그리고 그 순간 오팔색 눈이 다시 번쩍였다. 뒤에서 놀란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소란스럽게 들렸다.
기이하게도 아무 걱정이 들지 않았다. 로하나는 천천히 케이든이 자신 덕분에 살아남았다는 것을 떠올렸다. 그러라고 불려 왔던 걸 떠올렸다.
칼라드리우스는 고고하게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보석 같은 오팔색 눈동자가 기괴할 정도로 선명했다.
괜찮아.
로하나는 주탑의 지붕 밑까지 걸어갔다. 하얀 새의 깃털이 닿을 듯 가까웠다.
사람의 다섯 배는 될 것 같은 커다란 몸에 또 그의 몇 배는 될 것 같은 길디긴 날개가 펴졌다 접혔다.
바람이 그녀를 피해 불었다.
챵!
그때 맞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로하나가 고개를 돌려 내려다보자 그곳에 케이든과 라자르가 대치한 것이 보였다.
케이든도 케이든이지만 히스가 위험해 보였다.
로하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나머지들은 이미 무력화된 모양인지 간신히 석조 복도에서 떨어지지 않게 매달린 것이 보였다.
로하나는 천천히 활을 들었다.
시공간의 영향을 받지 않는 마법사라고 했던가.
‘어디 한번 해 볼까.’
로하나는 천천히 시위를 당겼다. 칼라드리우스가 다시 날개를 펄럭였다. 엄청난 바람이 불었다.
‘어차피 나도 이 세계에서 보통 인간은 아니니까.’
단호하게 놓은 활이 놀라울 정도로 빠른 속도로 날아갔다. 샛노란 빛을 일렁이며 날아간 활이 그대로 라자르에게 꽂혔다. 그와 동시에 오렐리아와 라자르는 거짓말처럼 시야에서 사라졌다.
손이 가늘게 떨렸다. 바람 소리만이 침묵을 채웠다.
케이든은 처음 볼 정도로 낯설게 굳은 얼굴로 로하나를 올려봤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 뒤섞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