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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죽일 흑막과의 계약결혼-70화 (70/125)

70

*

로하나가 흠칫 몸을 떨었다. 케이든이 놀란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로하나?”

“그 소리예요.”

케이든은 고개를 기울이며 미간을 좁혔다.

“그 소리라니…….”

“그 하얀 새.”

케이든이 인상을 쓰며 그녀에게서 떨어졌다. 로하나도 누웠던 몸을 일으켰다.

성큼성큼 너른 걸음으로 걸어가 창을 한 손으로 열어젖히자 차가운 바람이 들어오며 순식간에 공기를 바꾸었다.

새파랗게 밝은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찾았다.”

케이든이 눈을 가늘게 뜨며 나지막이 내뱉었다.

로하나가 쳐다본 곳에도 ‘그것’이 있었다. 어느 때보다 가까워서 처음으로 형체가 보였다.

비둘기처럼 새하얀 몸집에 길고 뾰족한 부리, 사람의 몇 배는 될 것 같은 날개가 창공을 갈랐다.

“지금도 들립니까?”

낮은 목소리에 로하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케이든은 그대로 그녀를 데스크에서 안아 내렸다.

성큼 걷던 케이든이 능숙하게 검을 집어 들더니 나머지 한 손으론 로하나의 손을 잡아 발걸음을 돌렸다.

응접실 문에 도달하자마자 거의 동시에 문이 열렸다.

“전하.”

이즈였다. 그녀는 이미 완전히 무장한 차림새였다.

“부대 배치해. 나는 로하나를 대피시킨다.”

이즈는 고개를 끄덕이고 빠르게 사라졌다. 뒤에서 얼굴이 붉게 달려온 갈레드가 바로 경례를 붙였다.

케이든은 가야 했다.

로하나는 제 손목을 꼭 붙잡은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끊임없는 보고를 받고 빠른 발걸음을 하면서도 손은 놓지 않았다.

로하나는 마음을 굳게 먹었다. 본능적인 직감이 불쑥 튀어나왔다.

“같이 가요.”

빠른 발걸음이 우뚝 멈췄다. 케이든의 당황한 흑안이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저 소리, 나만 들을 수 있다는 건 내가 뭔가 할 수 있는 게 있을 거라는 거죠.”

빤한 눈동자가 그녀를 보더니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위험합니다.”

“그래서 지금 나랑 여기서 둘이 숨어 있게요?”

로하나가 케이든을 끌어당기며 속삭였다.

“활 정도는 챙겨 줘요. 혹시 모르니까.”

간단한 드레스를 입고 있길 다행이었다. 페티코트까지 있는 것이었다간 움직이기 더 힘들 뻔했다.

“안 됩니다.”

“돼요.”

로하나가 다시 고집스럽게 그를 올려다봤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주위의 부하들이 보고를 멈추었다.

시간이 없다.

케이든은 하는 수 없이 그녀의 손을 다시 잡았다. 어쩌면 그녀가 제 옆에 붙어 있는 편이 더 안전하다고 생각한 것일지도 몰랐다.

“우선, 본부로 갑니다.”

그는 단호했다.

“아직 피해 상황은 없습니다.”

갈레드가 작은 전서구에 묶여 있는 종잇조각을 펼치며 말했다.

노랫소리는 계속되었다. 노랫소리라기보다는, 뭔가를 부르는 듯 짧게 끊어지는 음색이었다.

로하나가 이 노랫소리를 들은 적이 벌써 세 번째인데,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공격할 의사가 없는 것 아닐까.

다른 의미가 있거나.

일행은 걸음을 빨리했다. 병사들이 각 잡은 발소리를 울리며 다가왔다. 사용인들조차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물건을 나르거나 기본적인 무기를 들고 움직였다.

“이쪽으로.”

궁수대와 창호병이 공작저 앞에 사열하는 것이 보였다. 케이든과 일행들의 빠른 걸음을 쫓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로하나는 재게 움직였다.

높은 성벽으로 둘러싸여서 밖에서는 도저히 볼 수 없는 좁다란 나선형 계단에 도달했다. 바깥 공기가 차가웠다.

“여기를 올라가야 합니다. 갈 수 있겠죠?”

그 와중에도 케이든은 침착한 눈빛이었다. 그때였다. 소리가 멈췄다.

“소리가 멈췄어요.”

모두가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때 이즈의 목소리가 울렸다.

“주탑 쪽입니다.”

과연 고개를 들어 보니 새하얀 새는 얌전히 주탑 위에 앉아 있었다. 그 새의 눈에는 저들이 보일 것이었다.

“소리가 안 들린다고요?”

“들리지 않는 게 아니라…… 말 그대로 멈췄어요. 뭔가를 보고 있는데…….”

로하나가 눈을 가늘게 뜨며 주탑에서 보일 법한 주변을 돌아보았다. 일행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케이든이 로하나의 손을 잡았다. 돌계단이 미끄러운 순간에도 그의 손아귀의 힘에 로하나는 흔들리지 않았다.

나선형 계단을 타고 올라가며 건너가야 하는 복도가 나타나는 순간이었다.

코너를 돌자마자 케이든이 덜컥 멈추어 섰다.

낮은 욕지거리가 귓가에 울렸다. 로하나는 그의 등에 부딪혔다가 앞을 바라보았다.

시야에 한 소년이 들어왔다.

칠흑같이 어두운 검은 머리카락에 이상하리만치 빛나는 붉은 눈동자.

로하나는 잠시 숨을 죽였다.

“라자르.”

케이든이 내뱉는 말에 갈레드의 얼굴이 대번에 사색이 되었다.

“그…… 그 라자르 말입니까?”

케이든이 칼을 꺼내는 소리가 섬뜩하게 울렸다.

“로하나, 무조건 내 뒤에만 있어.”

“케이든.”

소년의 앳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작디작은 체구에 비해서 이상하리만큼 성량이 컸다.

그 순간, 로하나는 익숙한 두통을 느꼈다. 이상한 기시감이 몸을 휘감았다.

<미안해. 당신이 필요했어.>

차가운 아스팔트 바닥에 누워 괴로움에 몸서리치던 그때, 어떤 목소리가 분명 그렇게 말했었다.

로하나는 헉, 하고 숨을 몰아쉬었다. 다리가 땅에 붙은 듯 그대로 붙어 섰다.

죽고 나서 눈을 뜰 때까지 들었던 그 목소리였다.

이 목소리였다.

너무 선명해서 잊은 지 십수 년인 오늘 들어도 기억날 그 목소리.

케이든은 그녀를 자신의 등 뒤로 민 채 라자르를 주시했다. 케이든의 검에서 흰빛이 일렁였다.

“오랜만이야.”

하얀 새가 불쾌한 듯 날개를 퍼덕였다. 날카로운 노랫소리가 로하나의 귓가에 경고음처럼 울렸다.

“칼라드리우스는 내가 영 맘에 안 드나 봐.”

라자르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때의 목소리가 거짓말처럼 선명하게 그녀의 기억 저편에서 올라왔다.

“로하나는 정말 오랜만이네. 이제는 당신도 날 알게 되었어.”

수수께끼 같은 말을 하며 예쁜 미소년은 빙그레 웃었다.

<미안해, 미안해. 당신이 반드시 필요했어.>

“여기 삶은 좀 어때?”

이 사람이었다.

‘나’를 여기로 데려온 사람.

차가운 겨울바람이 그날의 기억처럼 뺨을 스쳤다. 비 오는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그에 대비되게 소름 끼칠 만큼 뜨거웠던 피 웅덩이의 감각도.

케이든의 날카로운 눈빛이 로하나를 향했다.

“저자를 압니까.”

날카로운 질문에 로하나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아느냐고?

그녀에게 짧게 머문 케이든의 시선은 다시 라자르를 향했다.

“로하나는 협상 대상이 아니라고 얘기했을 텐데.”

협상 대상? 로하나는 케이든을 올려다보았다. 표정 없는 눈에는 얼음이라도 쪼갤 듯 냉정한 기색이 역력했다. 라자르는 미간을 조금 좁히더니 한숨을 폭 쉬었다.

“에이.”

석류알 같은 붉은 눈동자에 실망이 비쳤다.

“아쉽네, 혹시 그사이 마음이 바뀌었을까 했는데.”

갈레드와 이즈가 흠칫 로하나를 쳐다보다 다시 라자르를 향했다. 둘의 표정이 심상치가 않았다.

갈레드는 아예 핏기라곤 없게 새하얗게 질려 있었고, 이즈는 동요하진 않은 듯했으나 그녀 역시 쥐고 있던 활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위험한 사람.

머리에서 본능적인 경종이 울렸다.

“로하나.”

라자르의 말에 다시 시선이 일제히 로하나에게 쏠렸다.

“그때 많이 아팠나요?”

끼이익, 하는 타이어 소리와 자신의 피로 만들어진 웅덩이에 질식하는 기분을 느끼던 그때를 이야기하는 건가.

로하나의 손이 약간 떨리는 것을 느꼈는지 케이든은 잡고 있던 손아귀에 힘을 더 주었다. 표정 없던 얼굴에 걱정의 빛이 스쳤다.

“당신이 할 일은 끝난 거 같아.”

할 일이 끝났다고? 로하나는 머릿속이 다시 복잡해졌다. 그게 무슨……. 내가 여기에 와서 한 일이 뭐가 있지?

평행 우주 같던 이곳.

뭐가 달라졌지? 뭐를 했지?

바르디와 오렐리아의 어릴 적 만남을 막았던 것?

‘아니, 그게 아니라…….’

그제야 로하나의 머릿속에 퍼즐이 어설프게 맞춰졌다.

‘설마.’

과거의 기억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샹들리에, 이상한 협박과 계약 결혼, 그와의 키스와 밤, 어제의 고백까지.

그리고 이 모든 것의 시작이었던 어린 시절 보름달 아래에서의 피투성이 기억.

하얀 새가 커다란 날개를 퍼덕였다. 마치 그녀의 복잡한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오묘한 오팔색의 눈동자가 다양한 색깔로 번뜩였다.

“당신 세계에서는 너무나 당연한 단 한 번의 선의였을 뿐인데, 그렇지?”

그의 몸에 나 있던 수많은 상처, 원작에서는 언급된 적 없는 그의 유년 시절에 대한 비밀들도.

라자르가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석류알 같은 눈동자가 핑그르르 돌았다.

“생각보다 일이 성가셔졌어.”

로하나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그러니까, 일부러 나를 불러내서 그를 구하게 했다는 건가. 황실에서 정말 죽을 뻔한 그를 구해 내는 역할로?

그때 로하나는 제 눈을 의심했다. 소년의 모습을 했던 라자르가 그대로 성인의 모습으로 ‘변했다’. 아니, 애초에 그랬던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마르고 낭창한 몸에 새하얀 망토, 짙은 흑발에 새빨간 루비 같은 눈동자는 그대로였다.

사람이 아니었구나.

“당신 뭡니까.”

갈레드가 떨리는 목소리로 로하나를 올려다봤다.

“공작님, 이 사람 라자르랑 애초에 처음부터!”

“그러라고 불러 놨지만 그게 이렇게 흐를 줄이야…….”

라자르가 입 끝을 올리며 웃었다. 케이든은 로하나를 더 제 등 뒤로 밀어 넣으며 갈레드에게 명령했다.

인내심이 한계에 달한 목소리였다. 거친 목소리에 달라진 표정이 낯설었다.

“갈레드, 로하나를 보호해.”

“공작님!”

케이든의 얼굴이 전에 없이 살벌하게 굳었다. 가늘어진 눈이 짐승의 것처럼 번뜩였다.

“판단은 내가 한다.”

갈레드는 이를 아득 물면서 분한 얼굴로 로하나를 바라보았다.

“시공간의 영향을 받지 않는 나를 어떻게 없애게?”

“두고 볼까.”

케이든이 느긋하게 대답했다.

“누가 죽고 누가 살지.”

검에 흰빛이 일렁였다.

“아, 맞다. 그리고…….”

라자르가 쓰게 웃더니 천천히 입을 뗐다.

“이만 나와.”

순간, 기둥 뒤에서 누군가가 나타났다.

아, 제발.

로하나는 속으로 욕을 뱉었다.

오렐리아였다. 그런데 이어서 나오는 사람을 보고 로하나의 동공이 확장되었다. 숨이 턱 막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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