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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하나는 다시 천천히 입을 뗐다.
“원래도 언젠간 끝낼 일이었다는 것 당신도 잘 알잖아요. 조금 일찍 끝내는 것뿐이에요, 공연히 서로 피곤해질 일 만들지 말고.”
로하나가 잡혔던 팔목을 빼며 한쪽 팔로 나머지 팔을 잡았다. 잡혀 있다가는 그렇게 하라고 말할 것만 같았다.
“오렐리아 일이라면…….”
케이든이 먼저 입을 열었다.
“죽여도 내가 죽이려던 겁니다.”
짙은 눈이 그녀를 응시했다.
“여기 있는 모습에 그렇게 오해가 되신 건가요?”
로하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때, 당신이 파혼을 얘기했던 날, 오렐리아와 내가 함께 있던 것 때문에 그러십니까.”
잠시 침묵이 흘렀다. 케이든 입장에선 그녀가 왜 오렐리아와 저 사이를 그렇게까지 생각하는지 의문인 모양이었다. 로하나가 천천히 입을 뗐다.
“왜 바르디가 오렐리아를 죽이기까지 할 거라고 생각해요?”
케이든의 얼굴에 살짝 금이 갔다. 살짝 벌어졌던 입술이 다시 다물리더니 그녀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아무리 황제라지만 출신을 감추었다는 이유만으로 죽일 순 없어요.”
“정말 그럴까.”
케이든이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뭔가 석연치 않은 기운이 그의 얼굴에 감돌았다.
로하나는 그의 몸에 있던 수많은 상처를 보았을 때처럼, 뭔가가 더 있다는 직감이 들었다. 쉬이 묻기 어려운 분위기인 것까지 그대로였고.
그의 상처에 대해 정확히는 몰라도 내 부친이 상당히 기여했다는 것만은 확실해.
나를 보는 것이 그에게 괜찮을 리가 있을까.
아무리 애틋하다고 해도.
아무리 ‘지금’ 그렇다고 해도.
그러니 내가 끝내 주는 것이 그에게도 나 자신에게도 옳아. 그녀는 여기서 애매하게 굴 생각은 없었다.
“무의미한 감정 소모는 멈추는 걸로 알게요.”
케이든은 미소 띤 얼굴을 동요 없이 그대로 유지했다.
“순리대로 해요, 우리. 더 나빠지기 전에.”
진심이었다. 그녀는 상황은 이미 진창이었지만 더욱 엉망이 되기 전에 이쯤에서 그만하고 싶었다. 아무 복잡한 일 없어도 쉽게 좌초되는 게 이런 마음이었다.
가시밭길인 것이 벌써부터 훤히 보이면 말해 무엇하겠는가.
그때였다.
케이든의 강철같이 단단한 팔이 갑자기 그녀의 허벅지 아래로 들어왔다. 순식간에 몸이 들려진 로하나가 책상에 앉혀졌다.
서류 더미가 바닥으로 후드득 떨어졌지만 그의 시선은 로하나에게서 조금도 떨어지지 않았다. 갑작스럽게 바뀐 위치에 당황한 보랏빛 눈동자가 흔들렸다.
“아니.”
케이든이 몸을 조금 숙여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난 모든 순간이 진창이었어서 그런가…….”
순간, 로하나의 가슴이 욱신했다.
“이 정도는 문제라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복잡하다고도 생각하지 않아.”
다시 내려가려는 로하나의 종아리를 잡으며 케이든이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아까의 말로 그가 할 일은 명확했다. 어제 새벽 악몽의 고통까지 아무것도 아닌 양 한결 가벼워졌다.
“이게 나한텐 순리야.”
처음 보는 여유가 그의 입가에 그려졌다. 그렇게 간단하게 무모한 소리를 할 때가 아닐 텐데. 로하나는 미간을 좁혔다.
“내가 싫다면요.”
그녀가 조금 날이 선 목소리를 내자 케이든이 살짝 미간을 찌푸리더니 그녀의 종아리를 잡고 있던 손을 조금 올려 무릎에 댔다.
“싫은 게 아닌 것 같다면.”
“네?”
“싫은 게 아니라 두려운 거잖아.”
흔들리는 그녀의 눈빛에 케이든이 조금 더 가까이 몸을 기울였다. 케이든은 그것 하나로 충분했다. 그 정도면 절대 지치지 않고 그녀에게 매달릴 수 있었다.
로하나는 케이든의 몸에서 순식간에 강하게 뿜어져 나오는 그 무언가에 취할 듯 몸이 굳었다.
“……그런 것 아니에요.”
무릎에 있는 손이 천천히 올라와 다리를 쓸고 허리를 감쌌다.
“이렇게 하죠.”
케이든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의 계약대로 초여름까지만.”
그의 흑안이 로하나를 올려봤다. 간절한 눈빛이었다.
“내 옆에 있어. 그게 원래 약속이잖아. 그 이후에도 떠나고 싶다면.”
케이든이 그녀에게로 몸을 굽혔다.
“그땐 나도 물러나지.”
점점 가까워진 얼굴과 턱 선이 그녀에게 닿을 듯 아슬아슬했다. 숨결까지 닿을 기세였다.
“나한테도 기회를 줘.”
속삭이는 소리에, 로하나가 크게 숨을 들이켰다.
다른 건 몰라도, 난.
케이든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긴 손가락이 그녀의 등을 타고 올라와 귓가를 지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넘겼다.
그녀의 보랏빛 눈동자가 천천히 깜빡였다. 내쉬는 가는 숨에 목이 간지러웠다.
당신이 없으면 이제 안 되거든.
로하나는 천천히 다가오는 그를 바라보았다. 눈을 한번 마주치면 숨을 수 없게 하는 짐승 같은 압도감이 전신을 휘감았다.
늘 그랬다.
다가온 입술이 스칠 듯 닿았다. 등허리를 지나 발끝까지 저릿했다.
입술이 겹쳐졌다. 낮은 탄식까지 삼켜 버리는 그의 입술에 로하나는 정신이 아득했다. 그의 신음 소리에 가슴속이 울렁였다.
등과 귓가를 감싸던 손이 그대로 로하나를 책상에 눕혔다. 몸이 밀려 올라갔다.
거친 신음이 흘렀다. 케이든이 당장이라도 녹을 듯한 눈빛을 한 채 잠시 멈춰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마치, 다시 허락을 구하는 듯이.
멈추라고 해도 멈출 수 있을 것 같지 않으면서.
로하나는 천천히 손을 뻗어 그의 얼굴에 가져다 댔다.
아, 큰일이다.
괴로운 마음에 손끝이 떨렸다. 케이든은 그런 손길을 느끼며 짙은 눈을 감았다.
그때였다.
갑자기 로하나의 몸이 화들짝 떨렸다.
“로하나?”
로하나는 재빨리 창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기묘하고 소름 끼치는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노랫소리 같기도 한 그 소리.
다시 그 소리였다.
*
히스는 조용히 어제의 일을 떠올리며 차를 내렸다. 누가 해 주는 것보다 작은 응접실에서 이렇게 직접 따라 마시는 것이 훨씬 편안하고 좋았다.
케이든의 명령 때문이었지만 로하나의 아침을 챙겨 주던 테이블에 앉으니 기분이 묘했다.
그때 익숙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나오면 안 되는 것 아니었나.”
“내가 누구 말 듣는 거 봤어?”
오렐리아가 간단한 숄을 걸친 채 히스 앞의 의자를 빼더니 앉았다.
“굳이 로하나를 제거하려고 노력한 이유가 뭐지?”
“어휴, 정말.”
오렐리아가 신경질적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도대체가 그따위 아린족 하나를 두고 왜 이 난리를 쳐야 하는지 모르겠네. R. D.는 전쟁 촉매제로 그 여자가 죽길 바랐고, 나로서도 나쁠 것 없어서 도왔을 뿐이야.”
“나쁠 것이 없다?”
“R. D.랑 적당히 타협하는 게 나한테도 유리했으니까.”
“협박 비슷한 걸 당한 거겠지. 황제에게 네 출신을 들킬까 봐.”
“황궁에 핫라인이 있는 셈인데 R. D.가 감히 날 어떻게 협박해. 친하게 지내려고 했지, 오히려.”
미묘한 알력 관계를 간파한 히스는 눈을 내리깔았다.
“마치 당신까지 내가 하는 행동에 유감이 있는 것처럼 보이네?”
히스가 옅은 회색 눈을 들었다.
“뭐?”
“공작님이야 왜 그러시는지 모르겠지만, 히스 당신까지 그러면 나 정말 카르크들한테 진심으로 실망할 것 같아.”
“전쟁이 나는 건 누구보다 나도 원하는 바야.”
기존의 다정한 태도는 어디 갔는지 모르게 살벌해진 히스가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단지 그 방법에 있어서 너나 R. D.가 우리보다 먼저 설치는 게 거슬렸을 뿐이야.”
“로하나 하노버만큼 좋은 대상은 없었어. 당신도 알면서. 이걸 당신 아버지가 알면 얼마나 가슴 아파하실까.”
순식간에 위험한 얼굴을 한 그를 보며 오렐리아는 움찔했지만 여기에서 멈출 생각은 그녀에게도 없었다.
“공작님께선 무슨 생각이신 거야? 로하나 하노버를 살려 두고 뭘 하고 싶은 건데?”
너무나 단순한 이유가 예상되어 히스는 눈을 가늘게 내리떴다. 그걸 굳이 그녀에게 말해 줄 생각은 없었다.
침묵이 흐르자 히스가 조금 기가 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것보다 너를 굳이 여기에서 보호하는 것이 더 이해가 안 되는군, 나는.”
히스는 저도 모르게 솔직한 말을 하며 차를 한 모금 했다. 오렐리아의 황금빛 눈이 가늘어졌다.
“글쎄.”
작은 고개를 갸웃하면서 목을 쓸어내리는 그녀의 손이 히스의 눈에 들어왔다.
“어쨌든 내가 있을 곳은 여기라고 말씀하시는 것 아닐까.”
히스의 눈이 왜 어두워지는지 오렐리아로서는 이해하기 힘들었으나, 그를 불편하게 하는 건 늘 재미있었다.
“나는 R. D.랑 같은 입장이야. 넌 카르크족을 저버리고 황후가 되기로 결정한 사람이다. 그러니 죽어도 거기에서 죽어야 옳아.”
히스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케이든은 결정적인 순간에 항상 마음이 약하더군.”
“동의하지 않을 순 없겠다. 로하나 하노버한테도 쓸데없는 동정심을 품는 걸 보면.”
동정심이라……. 히스는 속으로 쓰게 그 단어를 되씹었다.
“전쟁이 나면 나는 당연히 여기 편에서 싸울 거야. 카르크족에게는 비련의 왕비가 되겠지. 온 마음을 다해 황제를 사랑했지만 출신이 밝혀지면서 부당하게 버림받고 위기에 처한 아름다운 여자.”
오렐리아의 노래하는 목소리에 히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것도 좋겠군.”
“그리고 로하나는 그 반대급부에 있는 여자로 조용히 우리들 손에 죽으면 되는 거야. 돌아가신 당신의 아버지도 이 전략이 가장 옳다고 생각하실 거고.”
히스가 일어나 테이블 앞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어여쁜 얼굴과 닿을 듯 가까워졌다.
“난…….”
꾹 누른 목소리에는 그답지 않은 떨림이 있었다.
“케이든 델클리프의 명대로 해.”
“아버지를 죽인 자를 그렇게까지 사랑할 수가 있나.”
오렐리아의 말에 히스가 비릿하게 웃었다. 한참 어린 여자를 내려다보던 그가 다시 예의 느긋함을 되찾은 채 말했다.
“세상일은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단다.”
히스가 일그러진 오렐리아의 얼굴을 내려다보고 있을 때였다.
헉.
한순간 숨이 막혔다. 오렐리아조차 조금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뭐지.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그의 등 뒤에서 들렸다.
“오렐리아의 말에 동의를 해 줬다면…….”
꼼짝도 할 수 없는 그의 몸이 뿌리라도 내린 듯 바닥에서조차 흔들리지 않았다.
“내가 이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될지 몰랐는데.”
붉은 눈동자에 검은 머리카락을 한 존재.
라자르였다. 히스가 간신히 마력을 해제하는 그 순간이었다. 아무 소리도 없이 바로 코앞으로 다가온 라자르가 그에게 그대로 칼을 찔러 넣었다.
그냥 칼인 줄 알고 검으로 막은 것이 화근이었다.
‘검이 아니야.’
“단순한 공격을 할 거라면 내가 굳이 먼저 말을 걸지도 않았겠지. 너도 오래 쉬었군.”
순간 칼에 찔린 곳에서 피가 쏟아져 나왔다. 검이 아니라 마력으로 베어 낸 상처였다. 기습에 바보같이 당하고 말았다. 라자르가 저를 공격하리라고 예상도 하지 못한 탓도 있었다.
“내가 움직여야겠더라고.”
빨간 눈이 댕글 돌았다.
“악스톤의 뜻을 제대로 이어 가지 못하는 것 같아서…… 양아들도…… 친아들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