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
*
15년 전 초여름의 화창한 날.
초대 황제 콘스탄스 렌트워스가 여는 최고급 다과회인 화이트 파티가 한창이었다. 황제는 새빨간 왕의 로브를 두른 채 손자에게 눈으로 인사를 했다.
어린 케이든은 전날 밤 저를 불러들인 황제가 한 말을 떠올렸다.
<너에게 황태자 자리를 줄 생각이다.>
케이든은 놀란 눈으로 가만히 그런 조부의 말을 들었다. 푸른 달빛에 얼굴에 그늘이 졌다.
<에드윈은 아니야.>
<외삼촌께서는 훌륭한 분입니다. 어째서 그런 무리를…….>
노기가 형형한 푸른 눈이 아직 소년인 손자를 향했다.
<너에게 황태자 자리를 넘길 거다.>
가늘어진 눈과 미간 사이로 복잡한 심경이 스쳤다. 케이든은 그때 그 눈빛이 왜 그런지 알기엔 너무 어렸다.
<적당한 시일에 그리할 테니, 너는 지금처럼 정진하고만 있어.>
꺅!
그때 느닷없이 들린 여자들의 작은 비명에 케이든은 퍼뜩 어젯밤의 생각에서 벗어났다. 고양이를 보고 몇몇 여자들이 소란을 피우고 있었다.
케이든은 작게 한숨을 쉬곤 물 잔으로 손을 뻗었다. 그때 귓가에 속닥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저 아이가 그 황자로군요.”
“황자는 무슨, 혼혈인 데다가 반역자의 아들인데…….”
“그래도 황제 폐하가 죽고 못 살던 딸의 아들인데 말조심하세요!”
뻔히 다 들린다. 한두 번 듣는 이야기도 아니고, 익숙해질 때도 되었는데도.
가슴이 쿵쾅거렸다.
“이제 천애 고아인데…… 뭐가 어떻게 되는 걸까요?”
“하여간 태생부터 틀려먹어서 제국을 불안하게만 하네요.”
“그래도 예쁘장하네요. 카르크족 아비를 닮아 그런가.”
쿵쾅쿵쾅. 빠져나가지 못하는 분노와 감당되지 않는 두려움이 열 살 소년의 피를 타고 흘렀다. 케이든은 침착하게 물 잔을 들어 물을 넘겼다. 차가운 물이 열을 조금 식혔다.
“돼먹지 못한 소리를 하는군.”
순간 수군거리던 귀족들의 얼굴이 새하얗게 굳었다. 그리고 이어서 명랑한 목소리가 들렸다.
“형.”
그의 외사촌인 바르디와 외삼촌인 에드윈 렌트워스였다. 부자가 서로 꼭 닮은 적갈색 머리카락이 햇살에 반짝였다.
케이든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그렇게 쉽게 입을 나불대다간 몸이 성치 못할 것이야.”
에드윈이 거칠게 주위에 일갈했다.
“감히 우리 생질에게 못 하는 소리들이 없군. 애초에 초대 전쟁을 마친 아버지의 큰 뜻도 모르고 저렇게 헛소리들을 해 대니.”
털썩 자리에 앉으며 다리를 꼰 에드윈이 눈을 찡긋했다.
“승마라도 하고 오렴.”
케이든도 황궁에만 있다 보니 숨이 막히던 차였다. 제게 따라붙는 뾰족하다 못해 증오 가득한 시선들은 익숙해지지 않았다. 세월이 흘러 나이가 들면 좀 나아지려나.
“그래. 나가자, 형.”
워낙 장난이 많았던 바르디가 케이든을 끌고 하노버 공작가의 별관으로 향했다.
“여긴 왜?”
“여기, 나가는 길이 있어.”
바르디가 킥킥거리면서 정원으로 들어섰다. 우거지기 시작한 녹음 아래로 막 더워지는 햇살과 그림자가 일렁일렁했다.
아름다운 정원은 숲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이런 데가 있다니…….”
신기한 노릇이었다.
“바르디!”
둘이 있을 땐 그리 부르라 하여 케이든은 바르디를 그렇게 부르고 있었다. 그런데 뒤를 돌아보니 아무도 없었다.
뭔가 이상했다.
직감적으로 느껴지는 두려움에 다리에 힘이 들어갔다.
“바르디, 어디 있어?”
그리고 그 순간, 그의 몸이 충격을 받고 크게 휘청했다. 강한 충격이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이해하기도 전에 케이든은 순식간에 정신을 잃었다.
*
그가 다시 눈을 뜬 곳은 햇빛이라곤 전혀 없는 곳이었다. 어마어마한 빗소리가 들렸다. 소란스럽고도 위협적인 빗소리였다.
“정신을 차렸습니다.”
남자의 목소리에 머리가 깨질 듯 아팠다. 소리가 갑작스럽게 커졌다가 작아지기를 반복했다. 몸에는 붕대가 대충 감겨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더 움직일 수가 없었다.
철컹.
양팔을 구속한 수갑의 차가운 감각이 섬뜩했다.
뭐지.
쾅쾅쾅쾅.
이를 악물고 힘을 주었지만 무거운 철은 쇳소리를 낼 뿐이었다.
“애쓰지 마라.”
어둑한 그림자 아래로 초를 든 사내가 나타났다. 커다랗고 두꺼운 몸에 새파란 푸른 눈, 적갈색 머리카락까지.
“외삼촌이야.”
에드윈 렌트워스. 성인임에도 여태 황태자 위를 받지 못한 황제의 아들. 어머니가 믿었던 형제가 웃고 있었다.
옆의 횃불까지 가세하자 푸른 눈이 더욱 섬뜩하게 번뜩였다.
“바르디를 데리고 몰래 궁 밖으로 나선 너는 오늘부로 실종된 거다.”
“도대체 그게 무슨…….”
퍽.
옆구리에 가격이 들어왔다. 순간 숨이 막혔다.
“황제가 노망이 났는지 너를 황태자로 삼을 기세더라고. 유리에 년한테 배운 게 많은 모양이지?”
케이든은 어머니가 바다로 나가기 전에 했던 말을 떠올렸다.
<아직은 안 돼.>
“나야 노인네가 미워하니 그렇다 쳐도, 바르디도 아니고 너라니.”
황제의 말도.
<너에게 황태자 자리를 넘길 거다.>
“제가 아니라고 말씀드렸었어요.”
케이든은 억울했다. 이렇게 될 생각 따위 없었다. 어째서…….
“아니라고?”
“삼촌이 충분히 하셔야 한다고……. 저는 모르는 일이에요.”
고작 열 살이었다. 무엇을 알기엔 너무 어렸다. 에드윈도 그걸 알면서도 조카를 향한 눈길과 입술은 한 치의 동정심도 없었다.
“카르크들하고 전쟁하느라 그 난리를 친 지가 엊그제인데, 너같이 불길한 존재가 황궁에서 설치다 못해 황태자까지 되려 해서야 쓰겠어?”
촛불을 든 그가 초를 가까이 들이대며 말했다.
주변 사람들을 다 물리며 친절하던 외삼촌에게 그런 말을 듣자니 온몸이 반사적으로 떨렸다. 아무리 당황하지 않으려고 해도, 침착하려고 해도 무리였다.
“그게 가당키나 하다고 생각해?”
광기가 형형한 눈이 케이든의 코앞으로 다가왔다.
“그래서 넌 이제 실종되어 줘야겠다.”
날카로운 단검이 케이든의 목을 쓸면서 뺨으로 올라왔다. 살짝 눌리는 힘에 티 없이 깨끗했던 뺨에서 선혈이 흘렀다.
“내가 이번에도 제국을 위해서 쓰레기 청소를 해.”
순간, 케이든의 눈이 희번덕거렸다. 흰자가 푸른빛을 띠었다.
“그게 무슨…….”
“아, 뭐 자세한 걸 알 건 없고…….”
에드윈 렌트워스, 그의 두꺼운 어깨에는 힘이 들어가 있었다.
“우리 부모님한테 무슨 짓을 한 거예요?”
케이든은 덜덜 떨리는 목소리를 애써 가리려고 노력했지만 에드윈은 그 노력조차 비웃으며 고개를 털었다.
그럴 리가 없어.
“우리 아버지는 그걸 왜 알아주지 않으실까.”
에드윈의 목소리가 서늘한 칼날처럼 귓가에 다가왔다.
“이 새끼 머리 색깔부터 바꿔, 혹시 말 돌지 않게.”
자신만만한 목소리가 지하 감옥에 울렸다.
“네, 알겠습니다.”
드레고리 하노버 공작. 케이든은 이를 아득 물었다.
“대공 전하.”
그때 에드윈에게 보고를 올리는 소리가 들렸다.
“뭐야.”
“황궁의가 드레고리 공작에게 직접 와 줄 수 있는지 묻고 있습니다. 하노버 공녀가 지금 좀 위급한 모양입니다.”
드레고리 하노버.
이어지는 고통 속에서 케이든에게 멀어지는 목소리와 에드윈의 대답이 들렸다.
“위급하다니?”
“며칠 전에 원인 불명으로 의식을 잃더니 몇 날 며칠을 끙끙 앓았답니다.”
“원인 불명?”
“중간 중간에 깨어나서는 알 수 없는 말을 하기도 한다고 하더라고요.”
에드윈은 혀를 쯧 찼다.
“보내 줘.”
돌바닥을 때리듯 엄청난 빗소리가 이내 침묵을 채웠다. 정말 어마어마한 빗줄기였다.
“덕분에 이 장소를 제공받았으니 딸내미 건강은 챙겨줘야지.”
그 말을 끝으로 무거운 문이 닫혔다. 케이든은 조용히 빗소리를 들으며 숨을 죽였다.
그때만 해도 그는 정확히 몰랐다. 어느 보름달이 뜬 밤, 피를 흘리며 로하나 공작가의 정원으로 달려 나가기 전까지 그의 삶이 그 지하실 안에서만 이루어질 줄은.
*
로하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어떻게 잠이 들었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밤새 열이 났는지 식은땀으로 잠옷이 젖어 있었다.
그녀가 천천히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자 기척을 들은 시녀가 달려왔다. 단정하게 단장을 하고 나온 응접실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깨끗하고 완벽했다.
시선은 천천히 케이든 쪽 공간으로 향했다. 서재가 아주 조금 열려 있었다.
그때, 서재에서 헉하는 숨소리가 들렸다.
거친 숨소리였다. 가위라도 눌린 듯 정상적이지 않은 소리였다. 로하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서재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책상 앞에 앉아 있던 그가 고개를 든 채 숨을 거칠게 몰아쉬고 있었다.
안 좋은 얼굴색에 어제와 그대로인 옷차림.
밤새 일을 한 듯 서재 안은 각종 서류가 산처럼 정리되어 있었고 책상은 엉망이었다.
순간 눈이 마주친 그는 언제 그랬냐는 듯 순식간에 태연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마치 아까 스친 모습이 착각이라고 생각될 만큼 빨랐다.
“좀 괜찮으십니까.”
무슨 일 있어요? 하고 물으려던 로하나는 마음을 바꿔 간결하게 대답하고 말았다.
“네.”
조용한 침묵이 흘렀다.
“거기에서 주무셨어요?”
“잠깐, 졸았습니다.”
케이든이 이마에 손을 짚으며 말했다.
“소리가 들리길래…….”
케이든이 슬쩍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으쓱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 앞으로 다가왔다. 로하나는 잠시 그를 올려다보다 시선을 내렸다.
악몽에 자주 시달려 봐서 누가 악몽을 꾸는 건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묻고 싶었지만, 또 묻고 싶지 않았다.
로하나는 목에 올라온 무언가를 꾸역꾸역 내리며 몸을 돌렸다.
그 순간, 커다란 손이 팔목을 잡아 쥐었다. 빼려면 얼마든지 가능한 세기였지만, 어쩐지 잡히는 순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빠져나가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만큼.
로하나는 천천히 몸을 돌려 그를 올려다보았다. 가슴 아픈 만큼 해야 할 말이 선명했다. 입술이 떨어졌다.
“우리 그만하죠.”
말하면서도 마음에 금이 갔다. 케이든의 미간이 미묘하게 비틀렸다.
“그건 좀 곤란합니다만.”
긴 손가락에 약간 더 힘이 들어갔다.
“케이든.”
“이미 허락받았습니다.”
눈을 가늘게 뜨는 그녀를 보며 케이든이 미소를 지었다.
“집착하는 것으로.”
그가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태연한 미소가 늘 그렇듯 여유로 가득 차 있었지만 미묘하게 비틀려 보였다.
“너무 늦었다고 어제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그녀에게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은 짙은 눈매 위로 은발이 드리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