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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을 쉴 수가 없었다. 지나치는 기억의 단상이 뭔가 붙잡고 있던 정신의 끈을 끊고 지나갔다. 뿌리치려는 힘은 아무 소용없이 그의 손에 붙잡혀 있을 뿐이었다.
혼란스러울 때는 사람이 아니라 상황을 보라고 했다. 결국 오렐리아가 여기 왔고, 그녀를 보낼 생각이 그에게는 없고, 결국 하노버 공작가는 몰락했다.
상황은 명료했다.
그래도 끝내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었어? 정말?”
그녀에게서 나오는 말에는 제어 장치가 없었다.
“하긴 이것도 원수를 갚는 방법이라면 나는 할 말이 없는 거지, 그렇지? 여기에서 죄인은 하노버인 나일 테니까.”
악에 받친 마음이 마지막 인내심으로 겨우겨우 차분하게 눌러 나왔다.
드레고리가 옳았다. 내가 멍청했어. 결국 고였던 눈물이 고함지른 반동으로 흘렀다.
어쩜 이렇게 딱 맞추어서 오렐리아는 여기 있는 걸까.
어떻게든 벗어나려던 몸부림에 온몸에 힘이 빠졌다. 무릎에 힘이풀린 로하나가 앞으로 주저앉았다. 케이든이 그녀의 손목을 놓으면서 앞에 무릎을 대고 앉았다.
케이든의 낮은 목소리가 속삭였다.
“그만해.”
“그냥 단순하게 협박해서 협조하게 할 수 있었잖아.”
그런데 이제는 한계였다.
“다 얘기해. 어차피 당신이 이겼으니까.”
항복이었다.
“계획은 여기까지야? 이제 오렐리아랑 행복하게 함께 아린족과 전쟁하면 되는 건가?”
케이든의 미간이 좁혀졌다.
로하나의 팔목을 잡고 있던 그의 손에서 스르르 힘이 빠졌다.
“이제 나랑 볼일이 끝났으니 오렐리아가 다시 돌아온 거야?”
뭔가가 무너져 내린 얼굴이 그녀를 응시했다.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그러더니 그 얼굴은 순식간에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
어째서 그는 이 와중에도 저런 눈빛을 해야 하지.
왜!
속으로 지르는 소리가 목소리가 되지도 못하고 머릿속을 맴돌았다.
“로하나, 오렐리아는 정말 임시로 여기 있는 겁니다.”
로하나의 입에서 거친 한숨이 토해져 나왔다. 로하나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듣고 싶지 않았다.
“지금 황궁으로 가면 그녀는 죽습니다.”
“죽는다니.”
한쪽 입술 끝이 비틀렸다.
“결혼 무효가 되면 사람이 죽나요? 어느 세상이 그래?”
그 순간, 내내 그녀의 화를 받기만 하던 케이든의 눈썹이 움찔했다.
갑작스레 좁혀진 미간, 그의 눈빛에는 강한 적의가 흘렀다. 뭔가를 말하려는 듯 그의 입술이 벌어졌다.
그러나 케이든은 곧 생각을 고쳐먹은 듯 아무 말 없이 입을 닫았다.
로하나는 미간을 좁힌 채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이나 바르디 렌트워스나…… 정말 딱한 인간들이야.”
“로하나.”
듣기 싫었다.
“내가 도망가는 것도 봤었잖아…….”
로하나가 중얼거렸다. 그날, 황위 계승식 날, 그에게 붙잡혔던 그 순간이 그녀에겐 어제처럼 선연했다.
“계약 결혼까지 한 주제에 왜 저열하게 그런 방식을 써야 했어? 협박할 방법은 많았잖아. 죽인다고 했으면 내가 어쨌겠어.”
눈물이 턱을 지나 바닥으로 떨어졌다. 불에 덴 듯 남아 있는 키스와, 손끝과, 추운 겨울에도 붉게 달아올랐던 밤과, 모든 것의 기억이 마음을 찢고 지나갔다.
그때 탁한 목소리가 울렸다.
“내가 당신을.”
얼마나 지났을까, 로하나가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자 그녀의 눈에 그가 들어왔다.
“사랑해서 그랬다는 생각은 도무지 할 수가 없나 보지?”
순간 로하나의 숨이 멈췄다. 귀를 통해 들려온 소리는 천천히 머릿속으로 자리했다.
“내가.”
낮은 목소리에 고통이 촘촘한 바늘처럼 꽂혀 있었다.
“내가 당신을 사랑하게 돼서 그랬어.”
보랏빛 눈동자에 고여 있던 눈물이 소리 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얼어붙었던 숨이 탁하고 내뱉어졌다.
케이든은 본인이 내뱉고도 그 말이 어처구니가 없는 듯 잠시 얼이 나간 얼굴이었다. 그러더니 이내 옅은 미소를 입에 머금었다.
“바르디가 오렐리아를 데려가는 걸 보고 당신을 찾아서 황궁으로 갔어. 드레고리는 그사이 당신을 샤톤웰에 팔아넘기려고 하더군. 그래서 계약 결혼을 꾸몄어. 여기까진 당신도 아는 이야기지만.”
로하나가 미간을 좁히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짙은 눈에 처음으로 붉은 기가 보였다.
“거기까진 의리였을 수도 있겠네.”
케이든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내 목숨을 구한 사람에 대한 의리.”
그러더니 다시 날카로운 턱이 조금 기울었다.
“아니다, 그것도 아니었던 것 같아.”
냉정을 조금 되찾은 그가 포기한 듯 쓰디쓴 미소를 지었다.
“하노버 공작가의 몰락을 준비한 건 사실이 아니야. 내가 정말 복수를 하려고 했다면 그렇게 친절하게는 하지 않아.”
아까 이즈에게 일갈할 때와 같은 서늘한 목소리였다.
“그렇다면? 그건 다 뭔데?”
로하나의 지친 되물음에 케이든은 잠시 뜸을 들였다.
“일전에 말한 대로야.”
“샤톤웰 견제?”
로하나의 어이없어하는 낮은 목소리에 케이든이 눈으로 동의했다.
“샤톤웰 회유에도, R. D.의 요청에도 반역은 거부했어.”
“어째서?”
“전쟁은 막아야 했으니까.”
“어째서?”
당신은 흑막이잖아. 전쟁을 위해 살아온 것 아니었어?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개인적인 원한은 나의 문제일 뿐, 그때는 그게 옳았으니까.”
케이든이 미간을 좁혔다.
“그리고 무엇보다…….”
목소리가 조금 갈라졌다.
“당신이 잘 지냈으면 했어. 그게 바르디의 황후로 지내는 거라고 해도.”
케이든이 이를 살짝 악물더니 말을 이었다.
“이제는 그런 평화주의자 노릇을 더 해 줄 생각이 전혀 없지만.”
선뜻한 목소리는 한숨을 지나 다시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날 도망하려는 당신을 보고 조금 안심했어. 최소한 내가 당신의 행복한 삶을 파괴하는 건 아니구나, 하고.”
케이든의 굵은 손마디가 제 머리를 쓸어 넘겼다.
“내가 당신에게 해 줄 게 생긴 것 같아서 좋았어. 나의 이혼인이 되면 최소한 내가 품위 유지와 안전을 보장할 수 있으니까. 전쟁으로부터든, 드레고리로부터든.”
묘한 흑안이 다시 로하나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 기억이 뭔지, 그 감정이 뭐든 간에.”
낮은 목소리가 울렸다.
“한 번도 당신을 잊은 적이 없었어. 그러다 그렇게 되었나 봐.”
“그때 당신을 그렇게 만든 사람…….”
로하나의 목소리가 떨렸다. 케이든조차 손을 흠칫 떨었다.
“그것도 드레고리야?”
숨 막힐 듯한 침묵이 흘렀다.
“아니.”
케이든의 대답에 로하나는 참고 있던 숨을 내쉬었다.
“그럼 누구야.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그건 말할 수가 없어.
단호한 흑안이 그녀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왜 말하지 않았어?”
로하나가 질문의 방향을 틀었다. 지친 목소리가 잠겨 있었다.
“내 부모의 원수가 당신 부친이라는 거?”
지친 목소리가 잠겨 있었다.
“당신이 나한테 가까워지는 게 좋아서.”
그러나 눈은 고통스러울 만큼 애틋했다.
“그래서 말하지 않았어. 알면 당신은 분명 나를 피할 테니까. 미안해서든, 불편해서든.”
케이든의 한쪽 입 끝이 쓰게 올라갔다.
“당신 말이 맞아. 다른 방법이 많았어. 하노버 공작가에 대한 복수라면…… 이렇게 하지 않아도 됐어. 고작 재산과 명예를 뺏는 정도로 가볍게 하지도 않았을 거고.”
그녀 앞에 한쪽 무릎을 세워 앉은 그는 닿을 듯 가까웠지만 닿지 않았다.
“아무것도 끼어들게 하고 싶지 않아서, 당신 떠날 때까지만이라도 평범하게 가까워지고 싶어서 말 안 했어.”
차가운 손이 정말 조심스럽게 로하나의 턱에 맺힌 눈물을 훔쳤다.
“사랑해서 그랬어.”
낮은 목소리가 심장을 울렸다.
“언제부터인지도 모르게.”
크게 뜨고 있던 눈에 맺혔던 눈물이 결국 후드득 떨어졌다.
“그리고, 당신이 아무리 화가 났다고 해도…….”
로하나가 가는 숨을 겨우 내쉬는 사이 케이든이 다시 입을 뗐다. 긴 손가락이 천천히 턱에 닿아 로하나의 고개를 들게 했다.
“이제는 보내 주겠다고도 말 못 해.”
집요하고 진득한 시선이 그녀를 삼키듯 옭아맸다. 숨조차 쉴 수 없는 긴장이 흘렀다.
“너무 늦었어.”
낮게 내리뜨는 눈에 신음에 가까운 탄식이 흘렀다.
*
똑똑.
침묵을 깬 것은 무거운 노크 소리였다. 반응하지 않는 로하나를 두고 케이든은 천천히 바닥에서 일어났다.
문 앞에는 히스가 있었다. 히스의 시선이 로하나에게로 갔다가 제 주군에게로 돌아왔다.
밖으로 나온 케이든은 조용히 등 뒤로 문을 닫았다.
“이즈랑 교대해.”
“왜 오렐리아가 여기 있어?”
“……아직 황후니 빌미 잡힐 일 하지 말고 방에서 못 나오게 해. 이유 불문이다. 그리고 바르디가 결혼 무효를 말하는 순간, 우리가 체포한다.”
“체포라면?”
“공작 부인 살해 사주.”
“황궁으로 돌려보내면 안 되는 이유가 뭐야?”
케이든의 날카로운 눈이 가늘어졌다. 히스의 미간이 좁혀졌다. 둘의 시선이 날카롭게 부딪쳤다.
“굳이 여기에 숨겨 줬다가는 황궁이나 아린족한테 좋은 빌미만 던져 줄 거야. 지금 황궁에선 황후를 찾고 있고, 우리는 거기에 얌전히 협력하는 편이 좋아.”
“너는 오렐리아와 친한 줄 알았는데.”
“개인적인 감정이 중요한 게 아니잖아.”
히스는 케이든답지 않은 판단에 혼란스러웠다. 원래대로라면, 히스가 말려도 케이든은 냉정하게 제 할 일을 했을 것이다.
그런데 굳이 로하나 속을 뒤집어 놓으면서까지 오렐리아를 숨겨 줄 이유가 뭐란 말인가. 어차피 가서 결혼 무효를 당하면 될 일이었다.
“오렐리아를 돕는 이유가 뭐야?”
히스의 눈과 말끝에서 다른 기색을 잡아챈 케이든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했다.
또다시 아무 대답을 하지 않을 얼굴로 바뀐 그가 냉정한 표정을 한 채 히스를 지나쳐 갔다.
케이든은 서재 책상 앞에 앉아 관자놀이를 눌렀다. 산더미 같은 서류가 앞으로 닥쳐올 미래를 환히 보여 주고 있었다.
각종 피해 사례들. 간신히 잡아 오던 균형이 무너지고 있었다. 너무 쉽게.
아린족 로하나 하노버가 위험했다는 사실 하나를 두고 두 세력은 아주 간단하게 분열되었다. 어마어마한 증오의 골을 만들면서.
전쟁이 코앞이었다.
그녀의 삶에 미약하게나마 좋은 조각이 되고 싶은데. 어쩌다 이렇게 엉망이 되었을까.
<너 같은 새끼는 평생 사람 구실 못 하게 만들어 주지.>
선뜩한 과거의 소리에 순간 편두통이 강하게 내리쳤다.
그도 잘 알고 있었다.
제 욕심에 이렇게 붙잡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것도, 그럴 자격이 없다는 것도.
알면서도 그런 생각조차 부질없었다. 그가 그녀를 보낼 수 있을 리가 없으니까.
케이든은 커다란 손으로 마른세수를 하고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눌렀다. 넓은 책상에는 군수 물자부터 전략과 시나리오까지, 쌓인 서류가 산더미였다.
케이든은 책상 밑 서랍을 드르륵 열어 약통을 집어 들었다. 한 알 이상 먹지 말라는 주치의의 말을 무시하고, 늘 그랬듯 서너 알을 대충 털어 삼켰다.
눈두덩을 꾹 누르던 그의 시야에 계약 결혼 서류가 들어왔다.
<결혼은 미드 서머에 종료한다.>
그때까지만.
케이든은 다시 서류를 집어넣으며 되뇌었다.
그때까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