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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휭.
탁.
로하나는 아무 말이 없었다. 곧 출발할 마차를 준비시켜 놓은 그녀는 그저 활을 쏠 뿐이었다.
브란드가 달려드는 것을 막아서 주는 것 말고는 그녀를 위해 더 해 줄 것이 히스에게는 없었다.
히스는 납처럼 무거워지는 마음을 애써 무시하며 손을 빠르게 놀렸다. 언젠가는 닥칠, 충분히 예상 가능했던 일인데도 유난히 무거웠다.
반드시 배신할 결혼, 설령 그렇게 하지 않으려고 해도 케이든이 ‘악스톤을 처단’했듯이 그도 결국 로하나를 어떤 방식으로든 해칠 수밖에 없음을 조금 더 오래 산 히스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녀가 이렇게 흔들리는 것을 보니 새삼 제 주군의 무책임함에 화가 났다.
어차피 이루어질 수 없는 사이면서 왜 굳이 마음까지 흔들어야 했는가.
휭.
탕.
히스의 가늘어진 눈으로 화살이 과녁에 명중해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다시 노프탈의 자카르 드레스를 입은 그녀는 불편하지도 않은지 아무 말 없이 활을 쏘기만 했다.
백발백중. 그럼에도 투명한 얼굴은 창백하고 표정이 없었다.
“레이디.”
히스의 부름에 돌아보는 눈이 어두웠다.
“저희가 굳이 이야기하지 않았던 것은…….”
케이든이 부모 대의 원수를 당신에게 갚겠다는 것은 아니었을 겁니다, 지나치게 바른 사람이거든요. 그리고 저는 당신이 불편할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았어요.
여러 가지 생각이 복잡하게 히스의 머릿속을 어지럽혔지만 정작 입 밖으로 나오지는 않았다.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 나오는 건 아주 작은 탄식이었다.
“말을 할 의무가 있었던 것도 아닌데요.”
로하나가 아주 엷게 쓴웃음을 짓더니 활시위를 다시 당겼다.
그러나 활시위는 조금 불안하게 흔들렸다. 로하나는 이내 활을 내려놓았다. 툭, 하는 나무 부딪치는 소리가 울렸다.
“신경 쓰지 마요.”
망토를 걸치며, 예의 바른 말을 하는 목소리에는 그 어떤 감정도 실려 있지 않았다. 그녀답지 않게 표정이 지나치게 없었다.
천천히 마차로 발걸음을 옮기던 중 먼저 입을 연 것은 로하나였다.
“오렐리아 황후가 사라졌다고요.”
히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요? 진척은 있고요?”
“사라진 것은 어제. 마차 하나 외에는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았답니다. 어디에 있는지는 황궁군이 수색 중이고요.”
로하나는 작게 숨을 내쉬고는 아무 말 없이 마차에 스스로 타더니 문을 닫았다.
가는 길이 길겠구나.
히스는 저도 모르게 내밀었던 손을 추스르며 생각했다.
“가자.”
히스의 명령에 말과 마차가 달리기 시작했다. 마차는 전속력으로 노프탈을 향해 달렸다. 히스의 전서구가 먼저 하늘을 갈랐다.
*
마차는 자정을 훌쩍 넘겨 도착했다. 로하나는 도착했다는 소리에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수도보다 거대하다면 거대한 성, 으리으리한 공작저. 화려하기 그지없는 분수와 아름다운 침엽수와 장식목으로 장식된 정원과 주변 숲들.
노프탈.
원작과 전혀 다른 이곳은 전과 달리 무서운 느낌이 들었지만 생각과 다르게 마음은 차분했다.
그가 붙여 오던 단단한 몸과 뛰던 심장, 망설이지 않았던 입술, 무엇보다 짙어서 숨이 막힐 것 같았던 그 눈빛.
계약 사이인 만큼, 지금 연애 아닌 연애를 하는 사이인 만큼 어른 대 어른으로 물으면 될 일이었다.
물어보자.
어떻게 된 일인지.
그리고 그때 왜 로하나 공녀를 찾으면서 황궁으로 돌아왔던 건지, 어떻게 그랬던 건지.
물어보자.
마차가 완전히 정차하자 히스가 문을 열었다.
“고마워요.”
로하나가 히스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때 중앙 현관에 익숙한 인영이 보였다. 흰 셔츠와 바지만 입은 채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케이든이 걸어 나오고 있었다.
“어떻게 된 겁니까? 갑자기 온다는 연락만 받았는데.”
케이든이 로하나를 바라보았다. 히스가 고개를 살짝 가로젓는 것이 옆 시야로 보였다.
내일 있을 재판도 내팽개치고 갑자기 일찍 출발해 이 자정 넘은 시간에 도착했으니 의아하기도 할 것이다.
“얘기 좀 해요.”
로하나는 빠른 걸음으로 그를 스쳐 걸었다.
그런데 순간, 로하나가 걷던 걸음을 멈추었다.
절대 여기 있어서는 안 될 것 같은 사람이 시야에 들어왔다.
“공작 부인.”
살짝 무릎을 굽혀 인사하는 그녀는 그때처럼 푸른색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바르디가 노프탈에 다녀왔을 때, 처음 골든 우먼을 보았을 때 그 모습 그대로. 푸른 노프탈 드레스에 동부식으로 자유롭게 늘어뜨린 빛나는 금발.
로하나의 입술이 절로 벌어졌다.
“당신이 어떻게…….”
“공작 부인께서 도착하셨다길래……. 안주인께서 오셨으니 손님이 나와서 인사드리는 게 응당 예의에 맞죠.”
로하나는 잠시 헛것을 본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 사람이 왜 여기 있어요?”
로하나가 떨리는 목소리를 내며 돌아본 케이든은 미간을 좁힌 얼굴로 크게 이즈를 불렀다.
“이즈!”
계단에서 막 뛰어 내려오고 있던 이즈가 낭패감이 가득한 얼굴을 했다.
“죄송합니다, 정말.”
이즈는 평소답지 않게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로하나가 그녀의 말을 끊었다.
“당신이 왜 여기 있어.”
혼잣말 같은 목소리에 오렐리아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그녀를 층계 위에서 내려 보았다.
“공작님한테 물어보면 될 것 같은데. 부부간에 소통이 잘 안 되시네.”
오렐리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로하나가 몸을 돌렸다.
“이 사람이…… 황후가 왜 여기 있어요?”
케이든은 조용히 로하나의 팔을 붙잡았다. 힘이 잔뜩 들어가 떨리는 가는 팔을 그의 손이 그러잡았다.
“책임은 차후에 묻겠다, 이즈.”
처음 듣는 살기 어린 목소리였다. 이즈는 경례를 붙이곤 오렐리아를 거칠게 끌어내려 했다. 그러나 로하나가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
“공작 부인.”
이즈가 곤란한 목소리로 말했다.
“로하나.”
“당장 여기서 나가게 해.”
로하나가 케이든을 올려다봤다. 보랏빛 눈동자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당장 수도로 보내.”
케이든의 눈이 얽혀 들었다. 히스가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터질 듯한 긴장이 흘렀다.
로하나가 다시 일갈하려는 순간, 케이든이 입을 열었다. 흑안이 단단하게 굳은 채 냉정하게 그녀를 내려 보았다.
“그건 안 됩니다.”
로하나의 눈동자에 맺혔던 눈물이 고이지도 못하고 얼어붙었다. 하, 하고 숨이 터져 나왔다. 순간 힘이 빠지면서 팔이 늘어졌다.
“로하나, 내가 설명하겠…….”
로하나는 그대로 몸을 돌려 계속 걸음을 옮겼다.
“로하나.”
케이든이 서둘러 그녀의 뒤를 따르는 소리가 들렸다. 구두 굽이 깨질 듯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도착한 커다란 내실에는 천장만큼 높은 창에서 별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차가운 눈이 주위를 돌아보았다. 케이든이 등 뒤로 문을 닫는 소리가 들렸다.
“로하나.”
“에밀리도, 드레고리도 해결했어요. 원하셨던 대로 아린족의 절대 세력 중 하나는 예전 같을 순 없을 것이고…… 에밀리는 저 원하는 대로 살게 했습니다.”
물어보겠다, 그리고 듣겠다고 결심하면서 먼 길을 내달려온 자신이 우스워 로하나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뭘 묻고 뭘 듣겠다는 거였을까.
지겨워.
지겨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자기 자신으로 산다는 것이.
계약대로 하면 될 일이다. 오렐리아를 다시 들이고 들이지 않고는 그의 자유. 내용에 없는 이야기이다.
그러니 화를 낼 일도 사실 아니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목소리가 떨렸다.
“이제 전 제 내실로 돌아가겠습니다. 같은 공간에 침실만 다른 것은 역시 불편하네요.”
로하나가 몸을 돌려 제 방으로 향하는 순간, 몸이 거칠게 되돌려졌다.
로하나가 불에 데기라도 한 듯 소스라치며 있는 힘껏 반항했지만, 케이든은 끝내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
잡힌 팔목을 보던 로하나가 대들듯 대꾸했다.
“아직 원하는 게 남았어요?”
철천지원수의 딸이니 어떤 꼴을 당하게 해도 상관없었던 모양이지만. 케이든의 미간이 좁아졌다.
“최소한 사람이 설명을 하게…….”
“왜 얘기하지 않았어요?”
목소리가 깨어져 나왔다. 못 할 것 같았던 단어가 그녀의 입에 담겼다.
“양친의 일, 왜 얘기 안 했어요?”
케이든의 미간이 깊게 파였다. 가늘어진 눈에서 흑안이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왜 얘기하지 않았어, 내가 당신에게 그런 짓을 한 집안 딸이라고…….”
숨을 내쉬는데도 숨이 가빴다. 그런 짓을 당했으니 결국 당신이 흑막으로 제국을 배신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겠지.
그렇게 당신의 사정이 있었던 거니까.
“그 말을 하면 무슨 짓을 해도 내가 넘어가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서였어?”
목소리가 조각조각 부서졌다. 로하나가 가까스로 숨을 고르는 사이, 케이든도 무슨 소리인지 이해한 듯 눈빛이 내려앉았다.
“아니다. 그래야 했겠지. 이 정도로 해야 내가 하노버를 완벽하게 배신할 테니까, 그렇죠?”
큰 눈에 금세 눈물이 고였지만 로하나는 이를 악물고 버텼다. 눈물을 흘릴 생각은 없다.
“이걸 미리 눈치채면 경계심을 가지거나 두려움에 떨어서 내가 당신에게 협조할지 확실치가 않으니까…….”
“로하나.”
점점 말이 빨라졌다.
“그래서 오렐리아도 여기 있군요. 이제 나랑은 볼일을 다 봤으니까.”
높아지는 목소리에 로하나는 누가 목을 조르기라도 하는 듯 숨이 찼다. 쥐어 잡힌 손목에 강하게 힘이 들어갔다. 호소하던 눈이 점차 날카롭게 변해 갔다.
“그만해.”
“그냥 계약할 때 다 이야기를 하지. 너무 번거롭게 굴었어. 나는 내 생존만 중요하다고 얘기했잖아요. 굳이 로맨스까지 섞어 가며 속일 필요까진 정말 없었어.”
어쩔 수 없이 정면을 보게 되자 오히려 목소리가 더 높아졌다.
“로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