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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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계속해서 내리고 있었다. 유난히 소리가 먹혀서 고요하기 이를 데 없는 노프탈은 하늘마저 새하얬다.
역시 혼자 보내는 게 아니었는데.
케이든은 필요 이상으로 성큼성큼 걸으면서 인상을 찌푸렸다. 어제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것은 물론 아침이 된 지금도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빌어먹을.
굵으면서도 날카로운 눈매에 불편한 기색이 역력했다. 히스의 전서구가 무사 도착했음을 보고했으나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
하늘은 아무 이상 없었다. 로하나가 보았다는 마물은 어떻게 된 영문일까.
쾅, 하고 문을 닫으며 집무실로 들어왔다. 대충 아무렇게나 망토를 벗으며 셔츠 단추도 풀어 내렸다.
너른 데스크에는 서류가 산더미처럼 잔뜩 쌓여 있었다. 털썩 앉은 그는 가죽 의자에 깊숙이 몸을 묻었다.
날카로운 눈이 빠르게 서류를 훑으려는 찰나, 노크 소리가 울렸다.
똑똑.
“어.”
올 일이 특별히 없었는데 이즈가 얼굴을 내밀었다. 까무잡잡한 얼굴이 어둡게 가라앉아 있었다.
“무슨 일이지.”
케이든이 미간을 좁히며 눈으로 묻는데, 그녀 뒤로 전혀 예상하지 못했지만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케이든은 더더욱 인상을 구겼다.
뭐지?
“오랜만이에요.”
케이든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즈는 고개를 숙이고는 물러났다.
“공작님.”
오렐리아였다.
“황후께서 왜 여기…….”
“이제 다시 오렐리아라고 부르세요.”
“또 그런…….”
짜증이 치밀어 오르는 것을 꾸역꾸역 참던 케이든의 날카로운 눈에 문득 그녀가 다시 들어왔다.
평상시와 달랐다. 노프탈에 있으면서도 절대 입지 않았던 검은 망토에 파리하게 핏기가 없는 얼굴.
“몸이 너무 안 좋아서 그런데…… 조금 쉬었다가 다시 와도 될까요?”
망토를 벗자 헝클어진 금발이 허리까지 쏟아졌다. 목소리는 예의 노래하는 톤을 애써 유지했지만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인내심이 바닥난 것은 물론, 더는 사람 좋은 연기를 할 필요도 없을 것 같아 케이든은 더더욱 솔직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날카로운 목소리에 적의 가득한 눈을 읽어서였는지 오렐리아는 저답지 않게 눈을 낮췄다.
갑작스레 큰 눈에 눈물이 고였다. 황금빛 눈이 평소보다 더 커 보였다.
그러더니 갑자기 작은 몸이 휘청였다.
케이든이 채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그대로 실신하는 몸이 카펫에 부딪혔다. 그가 재빨리 뛰어나가 잡아 깨워 보았지만, 그녀는 축 늘어진 채 반응이 없었다.
*
“잠시 모두 나가 주겠나.”
“싫은데.”
히스가 눈을 예쁘게 접으며 거부했다. 로하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럼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한 드레고리는 이내 그 봉투에서 낡은 종이를 꺼내 들었다. 시선이 스치는 순간, 로하나의 눈동자가 얼어붙은 듯 굳었다.
드레고리의 뱀 같은 눈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잠깐 나가 줘, 히스.”
“안 됩니다.”
“나가 있어요.”
로하나는 드레고리의 손에 쥐어져 있는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로하나는 결국 히스를 밀어내야 했다.
벽에 있던 작은 문이 닫혔다. 창도 없는 곳에서 새어 들어오는 빛과 촛불만이 둘 주변을 밝혔다.
“정신없는 년.”
두 가문의 문장이 찍힌 서류 봉투. 앞에 쓰여 있는 두 쌍의 로마자 글자들.
‘닥쳐.’
그러나 말은 속으로만 나왔다. 본능적으로 앞으로 닥쳐올 말을 막고 싶었다.
“보다시피 이건 나와 현 황제의 아버지 에드윈이 함께 처리한 두 인물에 대한 기록이지.”
종이가 스치는 소리가 정적을 채웠다.
“더스틴 델클리프와 유리에 렌트워스.”
기어이 내려앉은 목소리는 발끝부터 서서히 그녀의 몸을 얼어붙게 했다.
“네가 지금 싸고도는 네 잘난 남편이라는 작자의 부모들.”
바늘 같은 진실이 해일처럼 덮쳤다.
“대충 그 좋은 머리로 그림이 그려지나?”
드레고리의 비열한 웃음이 어둠 속에서도 빛났다. 이미 자폭하는 열차에 함께 탄 듯 그는 미련이 없어 보였다.
“델클리프가 말 안 하더냐. 하긴, 그저 그 얼굴로 멍청한 널 홀리기나 했겠지.”
비웃는 목소리.
“케이든 델클리프가 왜 굳이 내 목을 쥐고 너와 결혼까지 고집했는지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느냐. 제아무리 제국의 개라지만 본인 영지의 절반은 차지할 카르크족의 반대와 분노를 무릅쓰고 말이야.”
케이든의 그림자가 그녀의 몸에 드리워지듯 내려앉았다. 로하나는 머리가 멍했다.
“왜 하필 너였는지, 안 궁금했냐고.”
‘그거야 그날 밤에 우리가…….’
어린 시절 그의 모습이 로하나의 뇌리를 스쳤다. 파인체이서에서 그녀를 구하겠다고 달려오던 늑대 같은 움직임도.
“결국 이걸 위해서였던 거다.”
‘당신은 모르는 일이 있었어.’
“복수.”
로하나는 최대한 동요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가슴이 미친 듯이 두근거렸지만, 새로운 정보는 아니라고 계속 되뇌었다. 동요하지 마. 어느 정도 원수일 줄은…….
“어느 정도 원수가 아니야, 하노버와 델클리프는.”
드레고리가 그녀의 눈앞에 문서를 들이밀더니 강하게 윽박질렀다.
“더스틴 델클리프는 에드윈 렌트워스와 나의 증언으로 모함을 받았지. 유리에 공주는 우리 무역 상단에서 살해당한 후 바다에 버려졌고.”
드레고리는 아무렇지 않은 딸의 얼굴의 미세한 금을 눈치챈 듯 만족스러우면서 자조하는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케이든 델클리프도 이 사실을 매우 잘 알고 있었다는 걸 이번에 알았어.”
동요하지 마.
아무리 되뇌어도 눈동자의 움직임까지 통제할 순 없었다. 드레고리의 자조적인 미소가, 절망적인 한숨이 정적을 울렸다.
“설마, 네가 이렇게 멍청할 줄은 몰랐다. 황제와의 파혼도 태연하게 받아들이길래 이렇게 황당한 짓을 벌일 줄은 몰랐어.”
목소리가 격노하여 떨렸다.
“그가 이 사실을 아는 걸 어떻게 알죠.”
처음 오는 그녀의 되물음에 드레고리가 하, 하고 기막힌 웃음을 지었다.
“케이든 델클리프가 모두의 신임을 얻은 카르크족의 악스톤 처단 사건은 너도 알겠지.”
잘 알고 있었다. 원작에서도 그를 도운 노프탈의 지지 세력자를 없애 카르크족에게는 원망을, 그러나 제국에는 신임을 얻었으니까.
“그때 악스톤이 죽기 직전, 이 사실을 가지고 카르크 쪽에서 케이든을 회유하려고 했다는 증거가 있어.”
“그게 뭔데.”
“그것까진 지금 네가 알 것 없고.”
“그럼 당신은 그걸 알고도 나의 결혼을 허락한 거고?”
“다른 방도가 있겠느냐. 전쟁이라도 난다면 너를 다시 구하면 될 일이었다.”
그 전쟁은 내가 죽어야 나는 전쟁이었어. 원작을 떠올리며 로하나는 양손의 주먹을 꽉 쥐었다.
원작에서 굳이 케이든 델클리프가 로하나 하노버를 희생타로 삼은 데 더한 이유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케이든 델클리프에 대해서 네가 뭘 알지?”
드레고리의 목소리가 독약처럼 귓가에 스며들었다.
“결국, 이렇게 한심했던 주제에 오만 똑똑한 척은 다 했구나.”
로하나의 눈이 번뜩였다. 결국 문을 연 로하나는 황궁군을 불렀다.
“황궁군!”
문이 열리고 황궁군이 들이닥쳤다.
“그럼, 어서 나를 체포하시게.”
그녀보다 더 짙은 보랏빛 눈동자가 그녀를 옭아맸다. 자조적인 미소를 띤 그는 한번 로하나를 돌아보더니 이내 순순히 그들을 따라 걸었다.
로하나가 서재를 나오자 술렁이는 사람들의 시선이 대번에 그녀에게로 꽂혔다.
로하나는 천천히 히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둘의 시선이 오래 마주쳤다. 그의 회색 눈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거짓말처럼 알 수 있었다.
알고 있었구나, 당신도.
그때 요란한 경호군의 소리가 들렸다. 웅성거리던 모든 귀족들과 사용인이 썰물처럼 양쪽 끝으로 물러났다.
정무 회의는 바르디가 주관하니, 그가 확인하러 오는 것도 무리는 아니라고 남의 일인 양 로하나는 무심히 생각했다.
바르디는 모두를 쏘아보더니 로하나의 팔꿈치를 살짝 잡았다.
“레이디.”
히스가 가까이 오려 했지만 로하나는 눈빛으로 그를 세웠다.
“로하나, 하노버 공작을 어떻게 하길 원해?”
바르디가 목소리를 한껏 낮춰서 물었다. 새파란 눈에는 의중을 모르겠다는 의문이 가득했다.
로하나는 잠시 호흡을 골랐다.
“에밀리는 재판 없이 그녀가 원하는 대로 살게 해 줘요.”
로하나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바르디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에밀리 재판은 이미 없던 걸로 해 놓았어. 원하는 주거지와 일자리도 알아봐 주도록 하지.”
“드레고리 하노버에 대해서는 원칙대로 하시면 될 것 같아요.”
그때 바르디의 목소리가 다시 귓가에 울렸다.
“로하나.”
로하나가 죽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지금 할 수만 있다면 뭐라도 죽일 수 있을 것 같았다.
“지금 오렐리아가 사라져서 수색 중이야.”
그건 또 무슨 소리야. 피식,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왔다. 가벼운 현기증에 로하나는 속이 울렁거렸다.
“없어졌으면 없어진 채로 혼인 무효를 선언할 거야. 최대한 찾아는 보겠지만.”
로하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들어가 보겠습니다.”
노프탈로 가야 했다.
“로하나.”
걸어서 나가는 로하나의 팔목을 바르디가 잡았다.
“기억해.”
새파란 눈이 보랏빛 눈을 얽어맸다.
“언제든 돌아오면 된다는 거.”
로하나는 천천히 손을 잡아 뺐다.
우선 노프탈로 가야 했다.
지금, 당장.
또각또각, 구두 소리가 대리석 바닥을 탕탕 울렸다.
*
케이든은 겨우 정신을 차린 오렐리아가 누워 있는 침상 옆에서 의자에 등을 기댄 채 앉아 있었다.
살짝 기울인 턱에 좁혀진 미간이 오후 햇살에 비치어 보였다.
“다 설명하십시오.”
조금도 봐주지 않는 냉정한 목소리에 오렐리아는 피식, 한숨 섞인 웃음을 내쉬었다.
“괜찮냐곤 안 물어봐요?”
미간을 좁히며 케이든이 재차 질문을 던졌다.
“R. D.랑은 언제부터 손잡았던 거지?”
“음…… 황궁으로 들어가니까 연락이 오던데요? 치사한 새끼들, 언제는 마력 없다고 필요 없다더니.”
오렐리아가 가늘고 작은 손으로 물 컵을 쥐며 말했다.
“로하나가 타깃이었습니까.”
“네.”
케이든의 분노 어린 눈을 마주하자 오렐리아의 눈자위가 붉어졌다.
“로하나 하노버를 없애려는 게 왜 싫어요?”
케이든이 잠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난 공작님이 이러는 게 이해가 안 돼.”
도무지 케이든이 이러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오렐리아의 붉은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그러나 케이든은 동요 없이 그저 수려한 미간을 조금 좁히며 냉정한 질문을 계속할 뿐이었다.
“그 동생은 왜 바르디한테 넘긴 거지?”
“나와의 혼인을 무효로 하겠다길래.”
둘의 눈이 조용히 마주쳤다. 기묘한 기운에 케이든의 얼굴이 서서히 굳었다. 낮디낮은 목소리가 되물었다.
“무효?”
“네, 없던 일로. 마치 당신 때처럼.”
오렐리아가 고개를 까딱하며 케이든을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작은 입술이 속삭였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지요?”
케이든의 어금니가 까득 소리를 낼 듯 강하게 다물렸다. 짜증이 나 보였던 눈엔 분노가 대신 자리하고 있었다.
“살려고 도망쳤어요. 가만있었다가는 ‘실종’되었을 수도 있잖아요.”
순간, 엄청난 두통이 그를 스치고 지나갔다.
“마치 공작님처럼.”
케이든은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일 텐데…… 또 그런 일이 생겨도 괜찮아요?”
그가 험악하게 굳은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정말 그래도 좋겠어요?”
늑대를 닮은 날카로운 눈은 그녀 너머의 무언가를 보고 있는 듯했다. 순간순간, 떠오르는 기억의 섬광이 날카롭게 마음을 찢었다.
“나한테는 이제 공작님밖에 없어요.”
속삭이는 그녀의 목소리가 간절했다. 케이든은 찌르는 듯한 두통에 눈을 질끈 감았다. 과거의 기억은 쉽게 옅어지지가 않았다.
“늘 그래 왔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