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를 죽일 흑막과의 계약결혼-64화 (64/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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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스!”

“무슨 일이에요?”

“지금, 또 들리지 않았어요?”

안 그래도 큰 눈이 한층 더 확장되어 있었다. 명석한 눈빛이 번뜩였다.

“지금.”

갑자기 공작 부인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히스가 잡으려고 해도 소용없을 만큼 재고 빠른 움직임이었다.

로하나는 잔디밭 한가운데로 나가 하늘을 주시했다.

“레이디!”

“쉿!”

입가에 손가락을 가져다 댄 채 하늘을 올려다보던 로하나의 미간이 좁혀졌다.

“다시 멀어졌어.”

“뭡니까.”

칼에 자연스럽게 손이 가는 히스의 오른손 위로 로하나의 손이 가볍게 얹혔다. 로하나가 살짝 고개를 저었다.

“사라졌네요, 이제.”

“그때 그 소리입니까?”

일전에 노프탈 시내에서 들었다던 기괴하고 아름다운 소리. 히스가 무얼 듣지 못한 적은 없었다. 명명백백히 그녀에게만 무언가가 들리는 것이 확실했다.

“무슨 소리가 들렸어요?”

“노랫소리? 같은데…… 아름답지만 약간 소름 끼쳐요.”

입 밖으로 내고 보니 뜬구름 같은 소리였다. 로하나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그러다 불현듯 떠오른 생각에 고개를 들었다.

“하노버 서재.”

가히 모든 정보와 암묵적 비밀이 모여 있는 아르드골드의 심장 같은 자료실.

마물에 대한 자료는 이미 모두 소실되어서 케이든조차도 아는 것이 거의 없다고 했었다. 어쩌면 서재에 가면 무언가가 있을지도 몰랐다.

“서재에 가 봐야겠어요.”

로하나가 말했다.

“저도 같이 갑니다.”

“서재는 원칙상 저와 브란드 그리고 드레고리만 출입이 가능해요.”

로하나가 고개를 저었다. 무력을 사용할 수는 있지만 굳이 소란을 일으켜 좋을 건 없다.

“조용한 게 나으니 혼자 충분해요. 얼른 가야겠어요.”

로하나가 남은 샌드위치를 입에 쉽게 털어 넣으며 말했다. 히스는 하는 수 없이 허리에 손을 얹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앞에 있으면 더 눈에 띌 것이 염려되어 히스를 멀리 물리고 로하나는 서재로 향했다.

자수정으로 장식된 서재의 원목 문은 여전히 두껍고 높았다. 로하나는 서재의 높다란 책장 사이사이를 천천히 거닐었다.

이쯤이었던 것 같은데.

무거운 책장이 오랜만에 움직이는지 끼긱 소리를 내며 먼지를 일으켰다.

로하나는 팔을 걷어붙인 채 책장을 끝까지 밀었다. 그러자 덜컥, 하고 큰 소리가 나더니 벽 뒤로 다시 문이 열렸다.

안에서 여러 금고와 먼지 쌓인 수십 개의 책장이 나타났다.

딸을 너무 믿으셨네.

두려움에 떨며 말 잘 듣는 재산, 새삼 느껴지는 아버지의 오만함에 로하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어릴 때는, 아니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무서워서 벌벌 떨었는데.

무얼 그렇게 두려워했던가.

이래서 어렸을 때 묶인 사람들이 가여운 것이다. 목줄에 매인 코끼리 꼴이 되니까.

마력, 마물, 마법계, 마법사…….

상념을 젖히고 빠르고 냉정하게 책장의 고서를 뒤졌다. 먼지를 뽀얗게 뒤집어쓴 책장은 로하나가 소매로 닦아 가며 눈앞에 들이대야 제목이 보였다.

다 별것 아닌 책들이었다. 마력의 ‘마’ 자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한숨을 쉬는데, 순간 뇌리에 금고가 떠올랐다.

금고와 채권 등을 위해서 그녀도 아주 가끔 손대던 그곳.

열쇠는 놀랍게도 그녀에게 있었다. 아주 오랫동안 그녀도 동생도 아버지의 수작에 동원됐으니까. 의심 없이 열쇠를 주고받곤 했다.

덜컥.

금고는 무거운 소리를 내며 열렸다. 금고 앞은 먼지 한 톨 없이 깨끗했다. 일부 금괴와 장물들, 익숙한 여러 채권과 증명서, 증표 등이 함께 쌓여 있었다.

그때 뭔가가 로하나의 눈을 사로잡았다.

늘 그곳에 쌓여 있었던 수많은 서류 저 너머에 있는 아주 오래된 봉투 더미들. 그런데 지금은 그 봉투에 쓰인 희미한 로마자가 눈에 들어왔다.

그 밑에는 더 오래된 낡은 봉투가 있었다.

로하나의 심장이 천천히 크게 쿵쿵 울렸다.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렸다. 두 서류 봉투 모두 렌트워스 황가의 밀랍 인장과 하노버 인장으로 함께 봉해져 있었다.

그러고 보니 두 가문의 인장이 동시에 사용될 일이 있나?

그때였다.

쾅!

문이 부서질 듯 열리는 소리에 손이 멈추었다.

쿵, 쿵, 쿵, 쿵.

뒤꿈치를 쾅쾅 찍으며 걸어오는 발걸음 소리.

정무 회의가 끝나려면 아직 남았을 텐데? 펠스가 가져간 서류가 시간을 더 끌 것이 분명했기에 일찍 끝나는 건 생각도 하지 못했다.

쿵쾅거리는 심장과 달리 떨리는 그녀의 손은 그래도 재빠르게 움직였다.

서류철을 서둘러 다시 원래 자리로 돌려놓자마자였다. 쿵쿵하는 발소리와 함께 벽에 있는 비밀 문 앞에 그가 섰다.

무서워하지 마.

자동으로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단호하게 턱을 다물며 로하나는 일부러 입술을 끌어당겨 미소를 띠었다.

“회의가 벌써 끝났나 봐요.”

드레고리 하노버는 당장에라도 죽일 듯한 눈빛으로 딸을 바라보고 있었다.

“네가 미쳤구나.”

“바로 체포될 줄 알았는데.”

로하나는 까치발을 해서 뒤를 넘겨보았다. 황궁군이 엄중한 얼굴로 서 있었다.

“아, 곧 되실 거구나.”

태연하게 말하며 금고를 닫으려는 로하나 뒤에서 갑작스럽게 뭔가가 튀어나와 거칠게 그녀를 낚아챘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퍽.

당장 뼈라도 부러뜨릴 것 같은 거친 소리와 함께 그대로 고개가 넘어가면서 그녀의 몸이 바닥에 곤두박질쳤다.

순간 번쩍했던 빛을 겨우 헤치고 나오자 히스의 칼날이 바로 드레고리의 목에 가 있는 것이, 그리고 황궁군의 칼은 그에게 겨누어진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귀가 윙윙거렸다. 로하나는 손을 들며 히스를 바라보았다.

“칼을 내릴 순 없습니다.”

능글거리는 여유 있는 목소리에서 숨기지 않는 어마어마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내려놓아요. 그러다 히스까지 다쳐요.”

로하나는 입 안의 핏기를 침과 함께 삼키며 눈으로 그를 안심시켰다. 히스는 꽤 오래 망설이다가 결국 마지못해 칼을 내렸다. 여전히 눈은 황궁군에 고정한 채였다.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히스에 이어 황궁군이 칼을 내렸다. 서슬 퍼런 금속 소리가 날카롭게 정적을 깼다.

드레고리는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하긴.

그 순종적이던 딸이 이럴 줄은 상상도 못 했겠지.

“델클리프가 이러자고 하더냐.”

“델클리프가 아니면 이런 일이 없으실 줄 알았어요?”

“친정의 뒷배 없이 네가 도대체 어떻게 살아남으려고…….”

“그거까지 그쪽이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너라고 여기에서 자유로울 줄 아느냐! 네가 한 일도 굉장한데.”

대번에 코앞에 다가온 아버지가 귓가에 속삭이는 목소리에 소름이 끼쳤지만 로하나는 태연한 태도를 유지했다.

“그럼 저도 같이 고발해 보시지요.”

드레고리의 눈썹이 움찔했다.

“못 그러실 텐데.”

로하나의 비릿한 미소에 드레고리의 보랏빛 눈동자가 뱀처럼 가늘어졌다. 이를 앙다문 날카로운 턱이 떨렸다.

“증거가 없을 뿐 아니라 여자가 이런 일을 할 거라고 누가 믿겠어요. 저는 아무것도 모르는 딸일 뿐인데. 기록도 하나도 없고. 설령 제가 움직였다고 한들 저는 아무것도 모르고 전달만 한 걸로 모두가 알고 있잖아요.”

로하나의 속삭이는 목소리에 드레고리가 당장에라도 폭발할 듯 손을 꽉 쥐었다.

또다시 그녀를 후려치고 싶은 것 같았지만 그랬다가는 정말 히스에게 크게 다칠 것을 아는지 자제하는 모양새였다.

이렇게까지 진심으로 당황하다니.

여태 닥쳐 준 보람이 있었구나.

그간 멍투성이로 스러져 갔던 수많은 여자, 그리고 겨우 전생의 내 나이였을 유모, 세실의 너무나 조용했던 죽음까지.

너무 늦었지만, 그래도.

드레고리의 머리가 돌아가는 것이 눈에 비쳤다. 로하나가 속삭였다.

“누구한테 잘 보여야 할지…… 상황이 어떻게 바뀐 것인지 잘 생각해요.”

진심이었다.

그리고 로하나의 머릿속에 아직 미처 전하지 못했던 정보가 떠올랐다.

“아, 그리고 저라면 하노버가 관리하는 상단들의 주인이 누군지 한 번 더 확인해 볼 것 같아요.”

드레고리의 얼굴이 흙빛으로 바뀌었다.

그때 드레고리가 손을 뻗었다. 이번에는 불시의 기습이 아닌지 그의 손은 느리게 금고를 향했다.

로하나의 미간이 좁혀졌다. 그는 거짓말처럼 방금 전까지 로하나가 살펴보던 서류를 손에 들었다.

“똑똑한 줄 알았더니…… 이용당한 게 누구인지 알려 주마.”

두꺼운 밀랍 인장이 두 개 찍힌 수수께끼의 서류들이 그의 손에 쥐어졌다.

둘의 시선이 불길하게 마주쳤다.

수많은 정보 조각이 로하나의 머릿속을 흔들고 지나갔다.

유난히 쌀쌀맞던 노프탈 사람들, 자객까지 불을 지르고 덤벼도 놀라지 않던 케이든 델클리프, 굳이 로맨틱하던 그의 고백들과 거기에 일시적으로나마 맘껏 취해 있던 자신까지.

드레고리의 손이 오래 묵은 인장을 떼어 냈다.

“하긴, 네가 모르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순간, 로하나의 머릿속에 케이든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그가 했던 이해할 수 없었던 말들이.

<공녀님이 원하지 않는다면 하지 마십시오, 결혼.>

브란드가 두려움에 떨며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던 말도.

<로하나 공녀가 어디 있는지 묻더래.>

머릿속 깊숙한 곳에서 알고 있던 진실이 간질거리는 느낌이었다.

카르크족과 아린족의 전쟁, 어떻든 일어날 것이 분명해 보이는 이 전쟁에서 그가 아린족인 나를 정말로 어떤 식으로든 해치지 않을 거라고 어떻게 믿지?

단단히 붙어 있던 밀랍 인장이 바닥에 떨어졌다.

“케이든 델클리프가 왜 너와 결혼했는지 나도 이번에 알았으니까.”

‘단지 과거의 간단한 사건으로 몸이 반응하는 것뿐, 이것조차 곧 지나가.’

마음속으로 여러 번 되뇌던 방어막이 힘없이 무너지는 느낌이 그녀의 등허리를 쓸었다.

“황제까지야 어려서 순진했다고 쳐도, 어찌 케이든 델클리프까지 그리 순진하게 믿어 버리더냐.”

막상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듣는 냉혹한 현실은 그녀를 오랜 잠에서 깨우듯 차가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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