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를 죽일 흑막과의 계약결혼-63화 (63/125)

63

문을 닫고 나온 밖은 겨울치고 정말 따뜻했다. 비가 온 뒤에 따뜻해지다니 봄이 올 것 같았다.

“어제 황제는 뭐라고 하던가요.”

히스의 말에 로하나는 천천히 입을 뗐다. 돌아오라는 이야기를 한 부분은 빼고 설명해야 했지만.

“오렐리아와의 혼인을 무효로 하겠다고요, 굳이 카르크 출신이었다는 것을 밝혀서.”

히스의 되묻는 말에 로하나는 난처하게 눈썹을 내렸다.

“정말로 전쟁이라도 나길 바라는 모양이에요.”

히스를 올려다본 로하나는 순간 멈칫했다. 험악하게 인상을 쓴 것이 처음 보는 낯선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애초에 그때 황태자인 바르디와 떠날 때…….”

히스가 쓴 미소를 띠며 말했다.

“말렸어야 했는데.”

로하나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황후에게 가 보셔도 되어요.”

“네?”

“저에게는 드레고리 하노버를 포함해 원수이지만, 히스한테는 어쨌든 친구죠.”

로하나는 케이든, 히스, 오렐리아가 같이 자란 것을 떠올리며 말했다.

로하나 자신한테는 원수이지만, 그에게는 어쨌든 같은 처지이자 오랜 친구였을 수도 있으니까.

남들은 답답하다고 욕하겠지만 저렇게까지 얼굴이 굳은 히스에게 오렐리아에 대한 걱정을 하지 말라고 할 순 없었다.

카르크 출신이라고 하루아침에 그녀를 내치겠다고 황제가 말을 바꾸는 건, 같은 혈족의 입장에서는 기분 더러울 일이었다.

애써 큰사람인 척 꺼낸 말에도 히스의 얼굴이 더더욱 딱딱해지자 로하나는 이것도 틀렸나 싶어 시선을 돌렸다.

“아니에요, 그런 것.”

그때 히스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친구였던 적도 없지만, 지금은 더더욱.”

로하나가 그를 다시 올려다보았다. 어느새 그다운 사람 좋은 미소가 서글서글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그럼 이제 펠스 중령을 만나러 가 봐야겠네요. 바쁘네요, 진짜.”

히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로하나는 케이든이 출발하기 직전 했던 말을 떠올렸다. 어쨌든 친정을 치는 일이기에 불안했지만 독립을 위해서는 계약 사항을 이행해야 했다.

그녀와 펠스의 만남은 드레고리 하노버를 잡기 위한 포석으로 계약 사항 중 하나였다.

로하나는 히스가 들고 있던 가방을 건네받았다.

*

이틀 전.

황궁으로 출발하는 날 아침, 테이블 앞에 선 로하나 옆으로 케이든이 천천히 걸어왔다.

날카로우면서도 특유의 침착함이 내려앉은 움직임은 그날 아침 따라 로하나를 더욱 긴장시켰다.

“대단하시네요, 이걸 언제 다.”

로하나가 테이블 위로 시선을 돌리면서 말했다. 그들 앞에는 꽤 되는 양의 서류가 쌓여 있었다.

“조금 조심했지요.”

케이든이 대답했다.

“내가 가진 몫까지 합치면…… 과반을 충분히 넘어서겠어요.”

하노버 상단과 길드의 소유권은 그 소유 몫을 보증하는 증표로 구성되었다.

주식과 다른 듯 비슷한 이것은 하노버 공작가가 명실상부 ‘최고의 부자’가 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로하나가 어린 시절 내었던 이 제도는 이 세계관에서는 혁신적인 아이디어였다.

덕분에 하노버 공작가에는 기존에는 상상도 못 할 규모의 자금이 모였고, 돈은 돈을 낳았다.

돈이 더 많아서 나쁠 건 없을 거라고, 생존 확률을 높일 것으로 생각하며 벌인 일이었다. 결국 아버지라는 작자의 악행을 심화시키는 데 한몫할 뿐이었지만.

그런 로하나도 케이든이 노프탈과 전 제국 각계각층의 명의를 빌려 돈을 모으고 있는 줄은 몰랐다.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케이든이 드레고리에게 결혼을 위해 내밀었던 각종 협박 자료, 그리고 로하나가 도망을 위해 따로 챙겼던 비자금들은 고스란히 드레고리의 목을 잡기 위한 무기가 되어 책상에 올려져 있었다.

“뭐가요?”

로하나가 뒤를 돌아보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수려한 얼굴에는 옅은 수심이 일렁였다.

“내가 친정을 배신하는 걸 괴로워할까 봐요?”

케이든의 눈이 더 어두워졌다.

“더 일찍 했어야 할 일이에요.”

로하나가 명료하게 말했다. 후회가 있다면 늦었다는 것에 있었다. 진작 제 아버지의 권력을 거꾸러뜨렸어야 했다.

늦는 바람에 결국 제 눈앞에서 사람이 둘이나 죽었고, 자신은 끝도 없이 장기짝으로 쓰일 뻔했다.

“대신 이 몫은 제 것으로.”

꼼꼼하게 자신의 몫을 확인하는 로하나를 보며 케이든이 조금 특이한 미소를 짓더니 커다란 손으로 천천히 그녀를 끌어당겼다.

그 특유의 청량한 나무 향이 가까이 느껴졌다. 부드럽게 입술이 겹쳐 왔다. 닿을 듯 말 듯 한 감촉만으로도 목덜미를 지나 발끝이 저릿했다.

“에밀리 일만 처리하고 와도 됩니다.”

귓가에 속삭이는 목소리에 그녀는 가슴 안쪽이 저릿했다.

“그냥 안 가도 되고.”

그답지 않은 농담에 로하나는 조금 웃었다. 그의 입가에도 이젠 엷은 미소가 서려 있었다.

“둘 다 해결하고 올 거예요.”

말을 마치자마자 다시 겹쳐 온 입술이 이번에는 아까보다 조금 강하게 그녀를 끌어당겼다. 살짝 깨무는 듯 강하게 밀어붙이는 입술에 로하나는 몸을 맡겼다.

*

휭.

탁.

화살은 빠르게 날아가 정확하게 과녁을 맞혔다. 펠스는 그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드레스 차림의 로하나 하노버가 들고 있던 활을 내렸다. 불편한 옷차림에도 그녀는 매우 능숙해 보였다.

그를 발견한 로하나가 활을 내리며 제법 반가운 얼굴로 웃었다.

“안녕하셨어요. 거의 처음 뵙는 것 같네요.”

“활을 잘 쏘시네요.”

“이건 여자들한테도 가르쳐 줬으니까요.”

그녀는 소문대로 건강하고 밝아 보였다. 심지어 하노버 공녀로 지낼 때보다 좋아 보였다. 똑바로 세운 허리와 함께 어깨선이 우아하고 곧았다.

테이블에 먼저 앉은 그녀가 무거운 활과 화살을 사뿐 내려놓았다.

“펠스 중령께 드릴 것이 있어서 왔습니다.”

대뜸 본론부터 말하는 로하나의 입술이 붉었다.

“저한테 공작 부인께서요?”

“저희 부부가 드린다고 보면 되겠습니다.”

로하나가 두꺼운 서류 더미를 꺼내 커피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이걸, 조금 후에 있을 정무 회의에서 발의해 주세요.”

로하나의 여유 있는 얼굴과는 달리 서류를 살펴보던 펠스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 이건…….”

제아무리 날고 기는 드레고리 하노버라도 이렇게 많은 내부 자료 앞에서는 쉽지 않을 터였다. 횡령에 인사 비리에, 부당 이익 취득, 폭행에, 협박까지 끝이 없었다.

“네, 보시는 대로.”

로하나의 보랏빛 눈동자가 찬찬히 그를 바라보았다.

펠스는 혼란스러웠다. 케이든 델클리프에게는 약점 잡혀서 한 정략혼 아니었는가. 왜 로하나가 이걸 나한테?

로하나가 차분하게 말했다.

“함정 같은 거 아니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어요. 이 편지도 케이든이 전해 달라 했습니다.”

로하나의 길고 고운 손가락이 곱게 접힌 편지를 내밀었다. 케이든의 검은 인장이 찍혀 있었다.

“그저 정무 회의에서 발표만 해 주시면 됩니다.”

펠스는 로하나를 잠시 응시하다가 고개를 떨궜다.

“케이든 델클리프 공작께서는 안녕하신가요?”

공주의 아들은 실종된 지 1년 후, 노프탈에서 갑작스럽게 무탈하다는 소식을 보내왔다.

케이든 델클리프가 살아 있었다는 것은, 실종을 알고 있었던 사람들 사이에서는 엄청난 뉴스였다.

실종 자체를 쉬쉬했기에 어린 세대들은 케이든 델클리프가 부모 사후 제 고향으로 무사히 돌아갔다고만 알고 있지만.

그리고 이렇게 열네 해가 지나 이제 꼭 15년이 되었다.

“네, 잘 지내요. 감사합니다.”

로하나 하노버는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걸까.

공작 부인의 얼굴은 초연하기 그지없었다. 마치 반드시 명중할 활시위를 당기고 있는 궁수처럼.

하노버 공작가가 케이든 델클리프에게 어떤 존재일지 알고는 있는 건지. 종잡을 수 없는 상황에 펠스는 살짝 현기증을 느꼈다.

“당신 탓이 아니라고 전해 달라고 했습니다.”

로하나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펠스에게 말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케이든이 그렇게 말할 정도면 중령께서도 잘못한 게 있으신 모양입니다.”

‘모르는구나.’

케이든의 생각이 어디까지일지 몰라 펠스는 그저 가만히 숙인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다고 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는 델클리프에게 용서받을 수 없었으니. 그러니 다른 것은 몰라도 이번 일은 반드시 성사시킨다.

펠스는 서류 더미를 꼭 그러쥐었다.

*

펠스가 나가는 것을 보며 히스가 들어왔다.

“벌써 점심시간이에요.”

샌드위치였다. 로하나는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원래 식사를 이렇게 잘 챙겨요?”

“그랬던가.”

히스는 작은 목소리로 능청을 떨었다. 로하나는 크게 샌드위치를 베어 물었다. 잠시 그녀를 보던 히스가 팔짱을 낀 채 입을 열었다.

“드레고리가 알면 레이디에게 뭐라 하진 않을까요.”

로하나는 의자에 깊숙이 등을 기댔다. 먹성 좋게 샌드위치를 삼킨 그녀는 붉은 입술 한쪽을 올리며 말을 이었다.

“벌써 그러면 안 되는데. 하노버 상단, 그것도 특히 항만은 곧 델클리프 것이 되거든요.”

히스가 한쪽 눈썹을 치켜떴다.

“케이든 몫에, 경영권 사수를 위해 저에게 묶어 놓았던 것까지 합치면 드레고리는 이미 졌죠. 아직 모르고 있을 뿐.”

로하나는 몸을 쭉 펴서 기지개를 켰다.

“저희도 아침에 떠날 때에야 알았어요, 이번에야 숫자를 맞춰 봐서. 증표는 주로 제가 관리했는데 케이든이 그렇게 사들여 놓은 줄은 저도 몰랐네요.”

“드레고리가 레이디의 돈을 빼앗지 않았던 모양이네요.”

“제가 안전 금고인걸요. 이럴 줄은 상상도 못 했겠죠.”

로하나가 냉소를 띠며 중얼거렸다.

“원래 인간이라는 게 제가 늘 괴롭히던 인간은 평생 가만히 당할 줄 알아요. 역으로 덤빌 거라곤 상상을 못 하더라고요.”

로하나가 중얼거리는 소리에 히스의 마음 한구석이 무거워졌다.

케이든 델클리프가 하노버와 결혼한 이유가 재산만이 아니라는 걸 그녀는 알까. 드레고리 ‘하노버’가 케이든에게 어떤 종자인지 알까.

로하나 하노버는 모르는 사실을 알려야 할까.

그러다가 히스는 이내 생각을 털어 버리며 고개를 저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인가. 그것은 케이든 델클리프의 소관이었다. 제가 관여할 일이 아니다.

무엇보다 하노버인 그녀를 생각해 줄 필요는 없다.

그때 갑자기 로하나가 몸을 바짝 일으켜 세웠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