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를 죽일 흑막과의 계약결혼-62화 (62/125)

62

“그 애는 오렐리아가 나한테 넘긴 거야.”

“황후가 어떻게 그 아이를 데리고 있었다고 하던가요?”

“로하나, 놀라지 말고 들어.”

로하나의 미간이 좁아졌다.

“오렐리아는 카르크 출신이야.”

바르디까지 그것을 아는 줄은 몰랐던 로하나는 속으로 숨을 삼켰다.

“카르크 출신이라는 것을 밝히고 결혼을 무효로 만들려고 했어. 그런데 그 애가 이걸 카드로 쓰더라고. 오렐리아가 입을 열지 않으면 찾을 수 없는 아이라 거래를 했지.”

또로록 하고 물을 머금은 수건에서 다시 물이 떨어졌다. 은 대야에 물이 찰랑거렸다.

“그래서 그 대가로 혼인 무효는 참아 주는 대신 이혼을 약속했어. 물론 상황을 봐서 무효로 만들어 버릴 수도 있고. 순진하게 내 약속을 믿더라고.”

이혼과 무효라는 단어가 로하나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고작 이 정도에 무너질 헛된 놀음질에 그런 눈물을 흘리고, 그런 수모를 당했다니.

“진심이십니까.”

미간을 좁힌 황제가 로하나를 올려다보았다.

“사랑하신다더니, 참 또 쉽게도 변하시네요. 정말 어떻게…….”

이를 앙다문 로하나를 보는 그의 얼굴이 미묘하게 밝았다.

“대외적 이유는 어떻게 하시려고요. 황후가 카르크족이라는 이유로 이혼하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지금 양쪽 간의 갈등이 얼마나 심한지 정말 몰라서…….”

“로하나.”

아주 희미한 미소가 잘생긴 얼굴에 퍼지고 있었다. 로하나에게 불길한 예감이 드는 순간 이어지는 말에 예감은 현실로 확정되었다.

“그렇게 중요한 결혼이니까 바로잡으려는 거야.”

새파란 눈이 똑바로 그녀를 응시했다. 바르디 황제가 굳이 오렐리아와 그런 거래를 한 이유가 뭘까.

로하나는 미간을 좁혔다. 왜 에밀리 콥스에게 굳이 관심을 가졌을까.

“그런데 폐하께서는 왜 굳이 그 아이에게까지 관심을 가지신 거죠?”

그걸 정말로 몰라서 묻느냐는 듯 바르디의 푸른 눈이 조금 일그러지더니 입술 한쪽 끝이 말려 올라갔다.

“당신이.”

그가 다시 손을 뻗어 순식간에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 애라도 찾고 싶을 것 같아서.”

벗어나려고 요란을 떨기가 더 싫어서였는지, 압도되어서였는지 로하나는 그대로 경직된 채 그를 올려다보았다.

“로하나, 제발 돌아와.”

바르디가 낮게 속삭였다.

“내가 실수했어. 네 말이 전부 맞아. 그래서 지금부터라도 바로잡으려고 해.”

“그만하세요.”

무거운 경멸을 들은 바르디의 목소리가 다급해졌다.

“그 시녀 아이의 동생도 원하는 대로 해 줄게. 오렐리아도 원하는 대로 해 줄게.”

새파란 눈에 진심이 어려 선뜻하게 일렁였다. 순간, 그녀의 시선이 흔들렸다. 그 틈을 놓치지 않은 바르디가 대뜸 손을 잡아끌었다.

“시간이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기다릴 테니까 언제든 돌아오기만 해.”

로하나가 붙잡힌 손을 빼냈다.

“그만하십시오.”

바르디는 이번에는 힘으로 잡으려는 생각이 없었다는 듯 그런 그녀를 순순히 놓아주었다.

침묵이 흘렀다.

대답도 인사를 할 여력도 남지 않았던 로하나는 조용히 몸을 돌렸다. 그때 등 뒤에서 바르디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직 나한테 화가 나잖아, 이렇게.”

로하나가 미간을 찌푸렸다. 문손잡이를 쥔 그녀의 손가락 마디가 새하얘졌다.

“너도 날 잊지 못했던 거야.”

푸른 시선이 끝까지 매달리는 것이 느껴졌다. 로하나는 쾅 하고 문을 닫았다.

*

아침이 밝았다. 언제 비가 왔느냐는 듯 환하게 갠 겨울 공기가 깨끗하고 맑았다.

‘다시는 오지 않을 줄 알았는데.’

하노버 공작저는 그대로였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드레고리가 그녀한테 제법 호의적이었다는 것 정도였을 뿐.

아마 황제가 황후를 어찌할지 모른다는 소문에 다시 희망이 샘솟기라도 하는 모양이었다.

<브란드한테 이야기는 들었겠지. 똑바로 처신해.>

로하나가 아침에 외출하는 드레고리를 배웅하면서 들은 소리였다.

들은 척도 안 할 기세였지만 오랜 버릇처럼 그의 말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인 것이 분했다.

“레이디, 괜찮으십니까.”

그때 히스의 목소리가 로하나를 생각에서 깨웠다. 아는 목소리를 들으니 그나마 숨통이 트였다.

부드러운 목소리에 새물새물한 눈가, 선이 고운 그가 신기할 정도로 옅은 회색빛 눈으로 로하나를 내려 보았다.

어젯밤에 흙빛이 된 제 얼굴을 보고도 아무 말도 묻지 않아 주어서 고마웠는데, 아침에는 굳이 아침을 먹고 가야 한다고 고집을 피워 앉은 참이었다.

“그게…….”

로하나가 말끝을 흐리며 입을 뗐다.

마음이 무거운 것은 바르디의 어처구니없는 말 때문이 아니었다. 위선적으로 오렐리아가 가여운 것도 아니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녀가 오렐리아를 가여워하는 것은 촌극이었으니까.

‘그렇다면 왜?’

문득 드는 생각에 로하나는 미간을 더욱 좁혔다. 외면하고 싶었지만 천박하게도 솔직한 가슴 한편에는 미묘한 흥분감이 일고 있었다.

조디를 그렇게 만들고도 태연하게 붉은 튤립을 보고 있었던 황후.

심지어 조디의 동생인 에밀리까지 납치했다가 자신의 안위를 위해 황태자에게 그녀까지 팔아넘기는 파렴치한.

어찌 되었든 10여 년간 지켜 오던 로하나의 순정과 행복을 한순간에 박살 낸 여자.

반드시 응징해야 하는 사람.

그 사람을 처절히 밟을 방법이 바로 코앞에 있을지도 몰랐다.

황제와 협력하면.

‘협상을 해 보나?’

기어이 그 생각이 무의식에서 튀어 올라오자 로하나는 화들짝 놀랐다.

정신 차려.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달콤해 보여도 독배를 드는 건 아니었다. 어차피 그가 대가로 원하는 건 로하나 자신일 것이다. 그리고 그건 협상 불가였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여름 전에 독립할 거야. 완벽한 혼자가 되기로 했잖아.’

로하나는 예쁘게 눈을 접어 웃었다.

“에밀리 콥스를 볼 수 있다고 들었어요. 지금 가 볼까요?”

히스가 조금 의심스러운 눈을 하며 냅킨을 내려놓았다.

로하나는 처음 보았을 때와 같은 수도의 여인 모습이었다. 어깨가 드러나는 샴페인색 레이스 드레스가 그녀에게 새삼스럽게 잘 어울렸다.

“그럼 가 볼까요.”

내미는 그의 손을 로하나가 익숙하게 마주 잡았다.

“여기 감옥은 어떨지 모르겠네요. 저도 한 번도 가 보질 않아서.”

히스는 젊은 공작 부인을 내려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

로하나는 의외의 곳으로 안내된 것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여기란 말입니까?”

안내된 곳은 주로 귀족들이 머무는 별채였다. 사용인들이 고개를 숙이며 공손하게 대답하더니 이내 노크를 하고 문을 열었다.

열린 문 너머에는 프릴과 레이스가 길게 늘어뜨려져 있는 드레스를 입은, 조디를 똑 닮은 아이가 앉아 있었다.

“에밀리?”

그리고 그 옆에는 무려, 비비안 힉슬리가 앉아 있었다. 로하나의 아버지인 드레고리 하노버의 오른팔이자 힉슬리 후작의 딸.

시원시원한 성격 덕분에 로하나와 그나마 친구로 지내던 영애였다. 오렌지 빛깔 머리카락이 아름답게 굽이치고 있었다.

“비비안?”

“어머, 로하……. 아니, 델클리프 공작 부인!”

비비안이 토끼처럼 놀란 눈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로하나는 지하 감옥으로 가던 저와 히스를 외딴 별채로 이동시켜 무슨 일인가 했는데, 눈앞의 풍경은 너무나 의외였다.

“어떻게……?”

“황제 폐하께서 공녀님의 친구를 해 주라고 말씀하셔서. 노프탈에서 온 하급 귀족이라고 하던데, 사실이에요? 뭔가 좀 이상하던데…….”

비비안이 종종걸음으로 오더니 로하나와 벽으로 돌아서서 속삭였다. 로하나는 미간을 조금 좁혔다.

“내가 다음에 설명할게. 지금은 잠깐 자리를 비워 줄 수 있을까요?”

비비안은 히스를 보며 조금 섭섭한 얼굴을 하곤 문을 닫고 나갔다. 아마 수도까지 와 놓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그에게 서운한 눈치였다.

로하나가 그런 히스를 보았지만 히스는 별말 없이 로하나를 보곤 조금 굳어 있던 얼굴을 풀 뿐이었다.

“에밀리.”

“그쪽이 로하나 하노버가 되시겠군요.”

나이에 비해 조숙한 얼굴을 한 에밀리가 차가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델클리프 공작 부인입…….”

로하나는 히스의 팔을 살짝 잡고 괜찮다는 미소를 지었다.

“저희 언니한테 원한이라도 남아서 찾아오신 거예요?”

“아니.”

로하나의 대답을 듣자마자 기다린 듯이 에밀리가 덥썩 말을 낚아챘다.

“미안하다는 이야기 하실 거면…….”

“말 같은 걸로 미안하다고 해 봤자 소용없겠지. 그 말은 우선 네 안전을 확보한 다음에 할게.”

에밀리는 이렇다 할 반응 없이 가만히 있었다.

“재판 이야기는 들었어?”

“네. 황제 폐하께서 형식상 재판을 해야 한다고, 미안하다고 하셨어요.”

어이가 없는 말에 히스가 작게 콧방귀를 뀌는 소리가 들렸다.

“형식적으로?”

“제가 잘못한 게 없는데, 왜 유죄를 받겠느냐고 그러시더라고요.”

조금 의기양양한 눈빛에서 잔잔한 적의가 뿜어져 나왔다. 로하나는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이건 바르디의 얕은 수작일까. 왜?

‘정말 나의 환심을 사고 싶어서?’

기가 찬 마음을 누르고 로하나는 질문을 이어 나갔다.

“그럼 황제 폐하는 너를 왜 여기로 데려왔으며, 왜 널 귀족이라고 소개한 것인지 따로 설명하시든?”

“무슨 영문인지는 모르겠지만 황제 폐하는 그 미친 R. D.들로부터 저를 구해 주셨어요.”

“미친 R. D.?”

“뭘 놀라요. 조디 언니도 거길 나오려고 했어요. 주는 것도 없이 그저 이용해 먹기만 하는 마력 조직 따위.”

조숙한 아이가 독기 품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결국 일이 틀어지고, 언니도 그렇게 되고, 나까지 납치하길래 도대체 무슨 수작인가 했는데…….”

눈가 살짝 물기가 어리더니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잠시 스스로를 진정시킨 에밀리가 이내 평정심을 찾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황제 폐하께서 딱한 사정을 아시고 절 구해 주신 거죠.”

로하나는 입을 다물었다. 에밀리 쪽에서 어떻게 상황을 이해하는지는 잘 알게 되었다.

“지내는 데 불편함은 없어?”

“없어요. 언니가 보고 싶은 것 말고는.”

날카로운 가시 같은 말에 움찔했지만, 로하나는 미소를 잃지 않았다.

“그래, 일이 끝나는 대로 다시 노프탈로 돌아갈 수 있게 해 줄…….”

“그러고 싶지 않아요.”

에밀리가 로하나의 눈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뭐?”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나도 여기에 있고 싶어요. 황제 폐하가 말만 잘 들으면 그렇게 해 준다고 했어요.”

‘황제’라는 단어에 로하나의 미간이 좁혀졌다.

“나는 카르크지만 마력 능력도 없어요. 위험한 사람도 아니니 수도에서 지낼 수 있다고요, 이렇게 좋은 방에서. 물론 그러려면 몇 가지 관문이 있을 거라곤 했지만 저는 그렇게 할 생각이에요.”

로하나는 차분한 눈으로 그녀를 보다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유모의…….”

에밀리의 눈이 날카롭게 올라갔다.

“이름이 어떻게 되지?”

로하나는 유모의 이름조차 모르고 있었던 것이 평생 마음에 걸렸었다. 물어보아도 드레고리는 기억조차 못 하는 눈치였으니까.

“세실.”

에밀리의 건조한 대답을 들은 로하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