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를 죽일 흑막과의 계약결혼-61화 (6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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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래?”

바르디가 눈썹을 치켜세웠다. 의외의 말이었다.

“네가 가지고 있는 것 중에 내가 원할 게 뭐가 있을까. 어차피 케이든조차도 너한테 관심이 없던데.”

오렐리아는 입 끝을 끌어 올리며 어이없는 웃음을 흘렸다. 이 와중에 제 앞에서 굳이 형 콤플렉스를 시인할 정도라니.

‘그렇게 모자란 주제에 네 마음대로 되게 할까 봐.’

오렐리아는 숨을 가다듬고 예의 노래하는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대신 저의 출신을 비밀로 해 주시고 합당한 이혼을 해 주세요. 무효는 안 됩니다.”

“그게 가능할지 모르겠네.”

“약속하십시오.”

바르디의 새파란 눈이 오렐리아를 훑었다.

“들어야 약속을 하지.”

“그 아이 제가 데리고 있습니다.”

“뭐?”

바르디의 눈이 가늘어졌다.

“황제 폐하가 찾으시는 그 아이, 에밀리 콥스, 제가 데리고 있다고요.”

바르디의 입술이 천천히 비틀렸다. 그제야 모든 것이 이해가 되었다. 왜 그 얌전하던 로하나가 오렐리아와 그런 일이 있었는지.

목소리에서 대번에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그년 배후가 너였어?”

“그럴 리가요.”

둘의 시선이 얽혔다.

“저는 저대로 보험을 마련한 것뿐입니다.”

“어떤.”

“샹들리에 사건 때부터 시작해 납치까지 당하고 나서 카르크들이 절 노리는 것 같아 조사를 좀 했거든요. 결국 조디로 이어지길래 그년 동생을 잡아 대질 신문을 할 생각이었습니다. 일이 이렇게 되어 버렸지만.”

바르디의 눈이 가늘어졌다.

“공작 부인을 되찾으실 방법이 저한테 있습니다.”

오렐리아의 황금빛 눈이 독하게 번뜩였다.

“폐하께선 로하나 하노버를 되찾으시고, 저는 제 비밀을 유지 받고 조용히 동부로 돌아가 살겠습니다. 그편이 모두에게 평화롭지 않겠어요?”

바르디가 한 손가락으로 제 턱을 받치며 잠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태연한 척하지만 온몸이 경직되어 있었고 손마디는 새하얬다.

바르디는 피식 속으로 웃었다.

‘두려운 모양이네.’

그럴 만도 했다.

오렐리아는 황제의 의중을 모른다. 그러니 죽여 버리면 그만일 카르크족 끄나풀의 가족이 얼마나 값어치 있는지 확신하긴 어려웠을 것이다.

그래도 살겠다고 카드를 던진 것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운이 좋았다.

완벽한 전쟁과, 완벽한 승리를 위해서는 그년이 필요했다. 바르디가 매서워졌던 눈을 느른하게 깜빡였다.

“그래, 좋아.”

오렐리아가 하, 하는 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하지.”

바르디가 손을 뻗어 시종장을 불렀다. 실비우스와 시종장이 머리를 조아리며 들어왔다.

“여기, 황후가 부를 사람이 있네. 생각보다 바쁘셨겠어, 오렐리아.”

“별말씀을요.”

조막만 한 얼굴에 애써 숨기지도 않는 분노와 배신감이 일렁였다.

*

하노버 남매를 태운 마차가 거의 수도에 도착해 가고 있을 때, 한밤중이 다 되어 가는 잿빛 하늘에서 빗방울이 하나둘 떨어지기 시작했다.

“누나, 정말 미안해.”

로하나의 차분한 눈이 동생을 바라보았다.

“뭐가 미안해.”

브란드는 침을 한번 삼키더니 한숨을 쉬었다.

“누나가 그때 그 일로…… 내가 일 처리를 못 해서 이렇게 카르크족들의 인질로 잡힌 것 알아.”

로하나는 오렐리아 납치 사건이 아득하게 느껴졌다.

“내가 알아서 하고 있어. 너무 신경 쓸 것 없어.”

로하나의 차분한 목소리에도 브란드는 뭔가 불안한지 눈치를 보았다. 그런 동생을 보는 로하나의 마음은 미묘하게 복잡했다.

“그 사람을 본 적 있어?”

“그 사람이라면…….”

로하나는 팔짱을 낀 채 차창 밖을 바라보았다.

“에밀리 콥스.”

“아니, 난 본 적 없어.”

“어디에서 지내는지도 모르고?”

“응.”

브란드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러더니 이내 큰 결심을 한 듯 말문을 뗐다.

“온통 주변이 카르크족인 데다가 그런 무서운 일까지 당했으니 누님이 옆에 있던 델클리프 공작에게 의지하는 게 이해가 되지 않는 것도 아니야.”

로하나는 말없이 그를 응시했다.

“그래 보여?”

“그래도 정신 차려야 해.”

“너는 알고 있었니?”

로하나의 차분하지만 날 선 질문에 브란드는 조금 움찔했다.

“뭘?”

“카르크족이 이렇게까지 배척당하는 이유.”

마력에 대해서 너는 알았니?

“뭐가? 카르크족이야 믿을 수 없는 족속들이니까 그렇지. 누나도 잘 알면서 그래.”

“그거 말고.”

둘의 시선이 오래 마주쳤다. 서서히 브란드의 낯빛이 어두워지는 걸 보며 로하나는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세상에나, 잘난 척은 다 해 놓고 아무것도 모르는 것은 나 자신이었다니. 아무리 다른 교육을 받았다지만 이렇게까지 소외될 수가 있는 건가?

“마력이라는 게 존재한다는 거, 어쩜 그렇게 나만 몰랐지?”

“누나는 정식 교육을 밟진 않았으니까.”

원작을 기록한 사람이 있다면 여자였던 걸까.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까지 까맣게 삭제할 수가 있을까.

“아무튼, 누나에게 그게 뭐가 중요해. 누나는 아무 걱정하지 않고 편하게 지내기만 하면 돼. 나도 이제 예전의 내가 아니야.”

로하나는 그런 동생을 잠시 바라보다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아, 누나, 그런데 말이지.”

브란드는 아무도 없는 마차에서 굳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한층 속삭이는 목소리로 소곤댔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요즘 황후와 황제 폐하의 사이가 예전 같지 않다고 해.”

로하나가 아, 그래, 하는 눈으로 동생을 보자 브란드는 이런 답답한 사람을 보았나 하는 눈으로 오만상을 썼다.

“누나, 그러니 기회를 봐야지.”

“무슨 기회?”

“무슨 기회긴, 다시 모든 것을 원래대로 되돌릴…….”

로하나는 하, 하고 저도 모르게 어처구니없어 터지는 웃음이 나올 뻔한 것을 겨우 참았다.

“그만해.”

“누님.”

“그만하라고 했어.”

브란드가 입을 열려고 하자 로하나는 다시 손바닥을 들어 그를 막았다. 브란드는 그런 누이의 얼굴을 조금 낯설게 바라보았다.

“황제 폐하 말이 맞나 봐.”

“뭐?”

“누나 어쩐지 뭔가 다르네.”

“그래?”

그러고 보니 착하고 밝은 공녀를 그만두기로 했었다.

로하나가 제 모습이 드러나자 남이 보기엔 그랬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는 때, 빠른 속도로 달리던 마차가 속도를 늦췄다.

수도의 시내였다. 마차가 네 대는 지나갈 수 있는 커다란 대로, 화려한 아르드골드 제국의 중심부였다.

*

자정을 훌쩍 넘긴 늦은 시간임에도 황궁에서는 적어도 스물은 될 사람이 마중을 나와 있었다. 그중에는 원치 않는 얼굴도 둘이나 섞여 있었다.

“먼 길 오느라 고생했다.”

세상 좋은 목소리를 내는 드레고리 하노버를 차게 식은 얼굴로 본 로하나가 황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황제 폐하.”

“잠시 이야기 좀 할까?”

전에 없이 예의 바르고 미끄러지듯 유려한 목소리였다. 로하나는 미소도 거둔 채 짧게 고개만 끄덕였다.

케이든의 고집으로 동행한 히스가 먼저 돌아가는 바르디를 보며 로하나의 팔을 살짝 붙잡았다.

말은 없었어도 안심시키는 눈빛이 어둠 속에서 빛났다. 로하나는 그제야 조금 표정을 풀고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의 집무실은 잠시 못 본 사이에 더 화려해져 있었다.

붉은 커튼과 새하얀 장식 털이 높은 창문을 장식했고 바닥은 카펫이 아닌 대리석이었는데 새하얀 빛깔이 곧 미끄러질 듯 위태롭게 느껴졌다.

시선을 돌리니 남들의 침대만 한 넓디넓은 대리석 테이블 뒤로 붉은 공단과 황금빛 실로 화려하게 수놓은 렌트워스 황가의 문장이 벽에 드리워져 있었다.

로하나는 굳이 데스크로 가지 않고 몇 계단 밑에 있는 소파에 앉았다. 새것이 분명한 쿠션이 부드러웠다.

“공작 부인, 노고가 많으셨습니다.”

단정하고 전문적인 시녀가 뜨거운 물과 수건을 내왔다. 따뜻한 물에 손을 담그자 피곤이 조금 풀렸다.

“아, 나가 봐. 내가 할게.”

덜컹하고 급하게 문을 열며 바르디가 말했다. 밖에서 비에 조금 젖은 탓인지 그새 옷을 갈아입은 바르디가 셔츠에 실크 가운을 걸친 채 들어왔다.

“아니요, 다 했습니다. 가져가거라.”

“내가 한다니까.”

바르디의 한마디에 시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수건을 내려놓고 나갔다.

탁, 하고 닫히는 문소리에 잠시 침묵이 흐르더니 바르디가 타월을 집어 들었다.

“정말 괜찮…….”

“로하나.”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였다.

“긴장 풀어. 이제 안 그럴 테니까.”

조용한 목소리였다. 에밀리를 두고 수를 써 놓고 이건 또 무슨 수작인가 싶어 로하나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에밀리는 어떻게 발견하셨습니까. 애초에 데려가신 것도 폐하…….”

“그 얘긴…….”

황제가 고개를 들었다. 넓게 벌린 무릎에 팔꿈치를 기댄 그는 조금 피로해 보였다. 적갈색 머리카락이 예전처럼 흐트러져 있었다.

“내일 하자.”

로하나는 조금 벌어져 있던 입을 다물었다. 그를 종잡을 수 없었다. 심한 조증인 듯 밝기만 하거나, 세상 사악한 폭군이더니, 오늘은 또 조용했다.

“왜 그러십니까.”

로하나의 질문에 푸른 눈이 시선을 들었다. 그러나 대답은 없었다. 로하나는 다시 눈을 깔고 질문을 이어 갔다.

“구속한 죄목이 어떻게 되죠?”

“조디 콥스와의 공범.”

“노프탈 외곽에 사는 아이가 황궁 샹들리에 건이든 제 암살 건이든 뭐든 무슨 수로요?”

“방법이나 혐의는 만들어 내면 그만이야. 게다가 둘은 자매고 카르크족이야. 공범이 아니기가 더 어려운 것 아닌가?”

바르디가 서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찰박하고 적셨던 타월을 꾹 짜내는 그의 손에 핏줄이 섰다. 내미는 그의 손길에 로하나는 하는 수 없이 손을 내밀었다.

하나도 편하지가 않았다. 그래도 바르디는 제법 야무지고 부드럽게 그녀의 손을 닦더니 내려놓았다.

“어떻게 그 아이가 폐하 손에 있는 거죠?”

굴하지 않고 용건을 밀어붙이는 로하나를 바르디의 푸른 눈이 담담하게 응시했다.

도저히 그 여자 이야기 외에는 아무 이야기도 할 기색이 없어 보였다. 그는 묻고 싶은 것이 정말 많았는데. 바르디가 대답 대신 말을 시작했다.

“아팠다고 들었어.”

로하나는 아무 말 없이 황제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결국 포기한 바르디가 말을 내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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