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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죽일 흑막과의 계약결혼-60화 (60/125)

60

늦은 밤, 구름에 달빛이 가려 어두웠다가 밝아지길 반복했다. 케이든은 침대맡의 초를 켜고 있었다. 덕분에 온 침실에 향긋한 꽃 향이 가득했다.

로하나는 엎드린 채 공작을 올려보았다.

단단한 근육에 골반 없이 빠진 허리, 두꺼운 노프탈의 옷 밖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었던 어깨와 등은 말할 것도 없었지만 복근은 아까의 모든 일을 지나고서도 얼굴을 붉히게 했다.

그러면서도 그 완벽한 몸 위에 있는 수많은 상처에 마음이 한없이 내려앉았다.

어떤 것은 자상 같았고, 어떤 것은 화상이었다. 어떤 것은 형태가 좋지 않게 찢긴 듯도 했다.

이제는 긴 세월에 많이 흐려져 있었지만 그때 옆구리에 길게 났던 칼자국도 그대로 남아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파인체이서에서 그를 처음으로 다시 알아보았을 때와 같은 기분이었다.

물어봐도 될까.

기다려야 할까.

조금 어두워진 로하나의 눈빛을 눈치챈 것인지 케이든이 불을 붙이다 말고 잠시 그녀를 응시했다. 로하나는 살짝 고개를 가로저으며 애써 얼굴을 밝혔다.

오늘은 말자.

그의 모처럼 편안한 얼굴을 그늘지게 하고 싶지 않았다.

다음에 물어보면 되니까.

“괜찮으십니까.”

촛불을 다 올린 케이든이 다시 침대에 돌아와 앉았다.

승마를 하면 남동생인 브란드보다 빨랐던 그녀였지만 이건 무리였다. 이미 온몸이 저리고 쑤셨다.

기분 좋은 나른함에 취한 듯 누워 있는데도 힘이 빠졌다. 내일 일어날 수 있을지 진심으로 걱정됐다.

“그런 질문을 할 정도라는 건 인정하는 거죠?”

케이든이 엷게 웃었다.

“내일 여정을 생각해서 자제한 겁니다만.”

길고 굵은 손가락이 로하나의 턱을 가볍게 쓸더니, 이어서 짧게 입맞춤을 했다. 로하나가 받아들이자 다시 시작할 듯 그가 밀착해 왔다.

부드러운 숨이 달콤했지만 더 이상은 무리였다.

“저…… 저기.”

“아, 네.”

재빨리 물러난 그가 그대로 머리를 손으로 괴고 옆으로 누워 로하나를 내려다보았다. 헝클어진 은발 밑으로 짙은 눈이 그윽했다.

잠시 다시 매료되었던 로하나가 조심히 입을 열었다.

“케이든.”

“네.”

두꺼운 이불을 당겨 추울 것 같은 어깨까지 덮어 주던 그가 어깨를 지나 허리를 감싼 채 로하나를 쳐다보았다.

“수도에는 저 혼자 다녀올게요.”

허리를 쓸던 손가락이 대번에 멈췄다. 부드럽기 그지없는 눈이 딱딱하게 굳었다.

“안 됩니다.”

“노프탈에 당신이 있어야 할 것 같아요.”

“그럴 일 없습니다.”

“있다면요.”

로하나의 걱정스러운 목소리에 케이든이 미간을 좁혔다. 로하나는 광장에서 들었던 소리, 목격한 것 같은 ‘하얀 새’ 이야기를 했다.

“분명 그 새였어요.”

“확실합니까.”

로하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케이든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니까 여기 계셔야 할 것 같아요.”

날카로워진 눈매가 꿰뚫듯 로하나를 응시했다. 로하나는 손을 뻗어 그의 턱을 쓸었다. 가녀린 손이 목덜미를 지나 탄탄한 가슴에 얹어졌다.

“중요하고 위험한 시기에 영주가 부재하면 안 되죠.”

그 케이든 델클리프가 굳이 이렇게까지 감정적으로 구는 것이 묘하게 설레면서도 로하나는 그의 입장을 먼저 정리했다.

“그런데 혹시 그게 뭔지 알아요?”

“여러 가지 이상 현상이 발견된 지 조금 되었습니다. 그런데 ‘마물’에 대한 정보가 너무 적어서…….”

케이든이 말끝을 흐리며 로하나의 머리카락을 쓸었다.

“마물이 나타났다고 해도 아시다시피 저희는 공중전이 가능합니다. 지하 대피소도 있고. 제가 없어도 노프탈은 자체적으로 수비가 가능합니다.”

로하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백금발의 무심한 얼굴을 한 이즈. 그래서 이즈가 그렇게 작은 체구에도 파인체이서에서 로하나를 한 손으로 끌어 올려 말에 태운 모양이었다.

“물론 공격은 제가 없으면 좀 달리겠지만.”

로하나의 보랏빛 눈동자가 반짝이며 속삭였다.

“정말 확실해요?”

혼자 가고 싶은 것은 아니었지만 정말로 수도에서 사라졌다는 ‘하얀 새’가 여기로 넘어온 것이라면.

그에게는 지켜야 할 땅이 있었다. 사람들이 있었다.

그리고 또한, 그녀 역시 굳이 수도로 간다면 혼자인 편이 움직이기가 편했다.

“에밀리를 데려올게요. 충분히 할 수 있어요. 게다가 저 혼자 가면 아무래도 여러모로 감시도 덜하겠죠. 황제를 굳이 맞닥뜨리지 않는 편이 낫지 않겠어요, 지금은?”

하는 족족 맞는 말인지 케이든의 얼굴이 더더욱 어두워졌다. 좁혀진 미간이 잘생긴 얼굴에 그늘을 지웠다.

“그래도 싫다면?”

케이든이 쥐었던 손을 제 품으로 당기자 떨어져 있던 로하나가 끌려가 안겼다.

“딱 사흘이에요. 아무것도 아니야.”

“오가는 시간까지 하면 닷새는 걸립니다.”

“그것도 아무것도 아니네.”

그의 깊은 한숨이 귓가를 간지럽혔다. 편안하게 박동하던 케이든의 심장이 불규칙적으로 두근거리고 있었다.

“내가 해결하고 올 테니, 기다리고만 있어요.”

케이든의 입술이 다시 겹쳐 왔다. 로하나가 살짝 입술을 깨무는 바람에 잇새로 신음이 흘렀다.

케이든의 나지막한 욕지거리가 귓가를 울렸다. 로하나는 팔을 뻗어 다시 덮쳐 오는 그의 목을 감쌌다.

불안하면서도 일단 버티고 본다. 설령 변할 그것이라고 해도 지금은 그 자체가 거부하기엔 너무 달콤했다.

괜찮아.

금방 끝날 계약이니까.

로하나는 속으로 자기 자신을 다시 다잡았다. 뭔지 모르지만 케이든에게도 그 기약된 시간이 중요한 듯했으니.

그 후엔 안전하게 혼자일 것이다.

*

1주일 전, 황궁.

노프탈에서 막 돌아온 바르디는 여독도 잊은 채 몇 시간째 말을 달리고 있었다.

“훠이!”

새하얀 말이 흙을 한 사발은 파 올리면서 급하게 멈춰 섰다. 마중을 나와 있던 시종과 집사가 기함했지만 바르디는 무감하게 고삐를 던지고는 걸음을 옮겼다.

노프탈은 더럽게 춥더니 여기는 그래도 따뜻해서인지 땀이 났다. 바르디가 적갈색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어 넘겼다.

그때 실비우스가 종종걸음을 하며 다가왔다.

“알아냈어?”

“공작 내외가 다녀온 곳 주소를 확인했습니다. ‘에밀리’라는 여자를 찾았답니다.”

“그래서 걔는 뭔데.”

“그때 죽은 시녀의 동생이랍니다.”

“실종이라고?”

“네, 일단은. 노프탈에서 열심히 찾는 모양이더라고요.”

바르디가 입소리를 냈다. 로하나를 붙잡을 좋은 열쇠인데.

“어떻게든 찾아내.”

“넵.”

실비우스가 헐레벌떡 사라지는 걸 주시하던 바르디는 천천히 집무실로 향했다. 사용인들과 귀족들이 고개를 조아리며 길을 비켰다.

집무실에는 오렐리아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새하얀 레이스와 프릴이 화려하게 장식된 하늘색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새하얀 손이 그의 서신을 어찌나 꽉 쥐었는지 잡힌 부분이 잔뜩 구겨져 있었다.

“폐하, 정말 진심이십니까.”

예쁜 입술을 깨문 오렐리아가 억눌린 목소리로 물었다.

“진심이야.”

바르디가 커다란 의자에 깊숙이 몸을 묻으며 말했다.

“혼인 무효라니요. 어떻게 그렇게 쉽게…….”

믿을 수 없다는 목소리에 바르디가 미간을 좁혔다.

“황후.”

까맣게 죽은 푸른 눈이 그녀를 응시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당신이 그런 소리를 할 일은 아닐 텐데.”

황금빛 눈이 흔들렸다.

“폐하, 그게 무슨.”

“그쯤 해 두지.”

평생 눈치 하나로 여태까지 황태자에, 황제까지 이르렀는데 고작 여자의 외모에 혹해서 실수했다고 생각하니 기가 찼다.

제가 무엇을 잃었는지 떠올리니 다시 가슴이 아렸다.

특유의 우아한 눈매가 그리웠다. 투명한 얼굴에 대비되는 새카만 머리카락도. 늘 반짝이는 고급스러운 보랏빛 눈동자에 그만큼 선명하게 붉은 도톰한 입술까지.

무엇보다.

로하나는 그가 이렇게 정신 못 차릴 동안 꽤 오래 파혼을 말하지 않고 인내해 주었었다.

오렐리아의 방에서의 난장을 보이면서 모욕을 주지 않았더라면 그녀도 파혼하자는 소리까지는 하지 않았을 텐데.

그렇게 생각하니 누가 목을 조르기라도 하는 듯 숨이 답답했다. 바르디는 신경질적으로 목의 단추를 풀어 헤쳤다.

넷이서 마주쳤던 그날을 얼마나 후회했는지 모른다. 고작 둘이 저녁 식사를 하고 있다고 그딴 소리를 하다니.

<바르디, 넌 머리는 좋은데…… 성미가 너무 급해.>

죽은 아비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그는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오렐리아가 케이든과 몰래 붙어 있는 것을 하필 그때 목격하지만 않았어도 그런 멍청한 실수를 저지르진 않았을 것을.

단단히 미쳤었지.

가슴이 쓰려 바르디는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폐하.”

그리고 이제 그 실수들을 하나하나 모조리 수습할 시간이었다. 대가를 치르게 할 것이었다.

“저한테 불만이 있으시면 말씀을 하세요. 노프탈에서 돌아오시자마자 그게 무슨…….”

“첫째로 감히 로하나의 얼굴에 손댔다는 게 용서가 안 되고…….”

오렐리아가 입술을 깨물었다.

“둘째로 황후가 카르크인이라는 것이 문제가 되겠네.”

오렐리아의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 드레스 자락을 잡은 손마디가 하얗게 질리고 꼿꼿하게 바닥을 딛고 있던 발끝이 떨렸다.

“설마 나를 정말 속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넘어가 준 거지. 내가 당신에게 홀리긴 했었으니까. 빌어먹을 그 반반한 얼굴과 몸 때문에.”

바르디가 고개를 까딱했다. 기울인 턱을 쓰는 그의 얼굴은 거만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렇지만 이제 그만할 생각이야.”

이런 드라마를 만들어 낸 과거의 자신을 죽도록 팬다 해도 분이 풀릴 수가 없었다. 자조적인 웃음이 그의 입술을 떠나지 않았다.

“그러니, 조용히 처분을 기다리도록 해.”

오렐리아는 드레스 자락을 움켜쥐었다. 작고 예쁜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황후, 걱정이 참 많겠어.”

바르디가 깊게 기대 있던 몸을 바짝 곧추세우며 팔꿈치를 데스크에 올렸다.

“카르크족에게는 배신자고, 여기에서는 천하고 위험한 카르크족인데, 이를 어쩐다.”

그때 차분해진 그녀의 목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거래를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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