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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내가 왜 공작님을 좋아하시는지 아세요?”
귀여운 얼굴에 더 귀여운 베레 모자까지 눌러쓴 공주가 케이크를 먹으며 말했다.
‘여자들끼리’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며 굳이 이 저녁에 티타임을 요청한 것이다.
“왜 그랬는데요?”
로하나가 귀여움을 한껏 즐기며 물었다.
“일단, 말도 안 되게 완벽하게 잘생겼잖아요.”
아이들 보는 눈이 더 무섭다더니. 로하나가 눈썹을 들며 고개를 끄덕였다.
“키도 젤로 크고, 얼굴도 젤로 잘생겼고, 목소리는 또 어떻고요.”
아이들 듣는 귀도 무섭구나. 로하나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혼혈인 점도!”
케이든의 어머니인 고 유리에 렌트워스는 델클리프의 영주, 마계 출신의 일인자인 더스틴 델클리프와 결혼했다.
그것도 카르크족 소탕이 한창 이루어지던 초대 황제의 철권 통치 중에.
이제 와 다시 돌아보니 보통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아직 초대 황제의 서거 소식이 들리지 않고 있다.
벌써 겨울의 한중간. 원작보다 늦어진다고는 하나, 아마 바르디를 정신적으로 더 힘들게 할 사건으로 곧 터질 일이었다.
“근데…… 사실은 그것보다도.”
세린이 오물거리던 입을 멈추고 케이크를 꿀꺽 삼킨 뒤 뜸을 들였다.
“나한테 존대해 주는 게 좋았어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제국의 백작, 자작도 저한테 이렇게 안 해요. 물론 내가 어린애라서 더 그렇겠지만.”
“공주님, 혹시 몇 살…….”
“열한 살이에요! 생각보다 꼬맹이로 보이는 거 아니까 그 말은 하지 마세요.”
로하나는 가만히 공주를 쳐다보았다. 진홍빛 머리카락을 예쁘게 늘어뜨린 모양새가 어여뻤다.
“공주님은 보는 눈이 있으시네요. 그거 쉽지 않은 건데.”
속삭이는 목소리에 공주의 초록색 눈이 반짝이며 로하나를 올려다보았다.
“나중에 케이든보다 훨씬 멋있는 사람을 찾을 능력이 이미 있는 거죠.”
“공작님보다 멋있는 사람은 없어요.”
딸기 쇼트케이크를 포크로 폭 잘라 먹으며 세린이 투덜거렸다. 진짜 잘 먹는 공주였다.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아아, 가기 싫은데.”
세린이 포크를 든 손을 쭉 뻗으며 테이블에 엎드렸다. 그런데 문을 열고 들어온 얼굴이 다른 얼굴이었다.
“히스?”
“잠시 나오셔야겠습니다. 세린 공주님도 이만 가 보셔야겠어요.”
얼굴이 어두웠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로하나는 허리를 곧게 세웠다.
*
“무슨 일이에요?”
로하나가 속삭였지만 히스조차 딱딱하게 굳은 얼굴에 반응이 없었다.
중앙 현관으로 나가자마자 로하나도 같은 표정이 되었다. 제국 황실군의 붉은 군복을 입은 군인들이 이 열 종대로 서 있었다. 맨 앞에 선 남자가 입을 열었다.
“누님.”
브란드였다. 로하나를 꼭 닮은 보랏빛 눈동자가 촛불에 일렁였다.
그 모습을 케이든이 서슬 퍼렇게 형형한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브란드.”
개인의 자격으로 왔다면 이렇게 요란하진 않겠지. 불길한 느낌과 미묘한 반가움이 교차했다.
“다시 무슨 일이야? 기별도 없었잖아.”
브란드가 입을 열기 전, 샤톤웰의 아서 경과 오스틴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그럼, 저희는 이만 먼저 가 보겠습니다.”
“미안하지만, 배웅은 여기에서 하겠네.”
케이든의 말에 둘은 고개를 가로젓고 빠르게 사라졌다. 오스틴의 손을 잡은 세린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손을 들어 인사를 했다.
“로하나.”
그때 차갑고 선뜻한 목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케이든이 로하나에게 왕실의 인장이 찍힌 스크롤을 전달했다. 붉은 벨벳에 금장으로 장식이 요란했다.
로하나는 스크롤을 받아 들어 밑으로 쭉 당겨 열었다. 보랏빛 눈동자가 차갑게 얼었다.
<델클리프 공작 부인
제국의 황제 바르디 콘스탄스 렌트워스는 죄인 ‘에밀리 코브’에 대한 심판 기일을 다음 길일로 잡는 바이다.
이에, 증인이자 피해자인 로하나 마르시아 델클리프 공작 부인을 공식 소환하는 바이다.
황실은 최근에 노프탈에서 발생한 불미스러운 일을 포함해 지난가을 발생한 공녀 암살 시도에 대해 대단히 유감을 표하는 바이다.
제국민의 질타를 겸허히 받아들이며, 제국은 향후 재발 방지를 위해 최선의 대책을 강구할 것이다.
아르드골드 황제 바르디 콘스탄스 렌트워스>
하, 하는 탄식이 그녀의 입술 사이로 흘렀다.
R. D.나 오렐리아 쪽에서 손쓴 것 아니었나. 왜 이 아이가 바르디의 손에 넘겨진 거지?
에밀리의 생존이 안심이 되면서도 머리가 복잡했다.
“그래서 나를 소환하시겠다는 거군.”
로하나의 냉정한 목소리에 브란드는 조금 움찔했다. 제 누나가 생각과는 다른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누나, 왜 그래.”
브란드의 목소리 뒤로 바르디가 떠나면서 남겼던 목소리가 떠올랐다.
<곧 데리러 올게.>
설마.
곧 데리러 온다는 게 이런 것까지 미리 생각했던 건 아니겠지?
로하나는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아무래도 아린족들이 하는 짓들이 심상치 않았다.
누나의 경멸 어린 얼굴을 보던 남동생이 결심한 듯 어른스러운 목소리를 냈다.
“황제의 명령입니다.”
그러시겠지.
“케이든.”
뒤를 돈 로하나가 케이든을 붙잡고 몇 걸음을 걸어 무리와 떨어졌다.
“가셔야 하는 건 잘 알겠습니다.”
케이든이 바로 로하나의 말을 자르며 말하더니, 이내 브란드가 있던 곳으로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위압적이고도 여유 있는 모습에 브란드는 조금 위축됐다.
“알겠네. 다만.”
브란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부인의 몸이 좋지 않아 급하게 밤에 이동하는 것은 불가능하니…… 내일 아침에 떠나도록 하지.”
브란드가 어리바리하는 사이 케이든이 다시 입을 열었다.
“최고의 예로 대접하라.”
사용인들이 분주하고 일사불란하게 흩어지는 사이 군인들이 브란드의 눈치를 살폈다.
로하나가 인사를 하려던 찰나, 뭔가가 강하게 그녀의 가느다란 손을 붙잡았다. 케이든이었다.
천천히 걷던 그의 발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뭐라고 말을 해야 하는데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긴장감과 터질 듯한 무언가가 꼭 맞는 드레스로 감싸인 몸을 타고 흘렀다.
그녀는 대리석으로 만든 복도를 지나, 응접실의 중문 여러 개를 지나, 케이든의 침실로 그대로 끌려가듯 들어갔다.
문을 쾅 하고 닫은 그가 잠시 그녀의 손을 놓았다.
건너편 벽 전체가 통유리로 만들어져 아름답고 높은 창에서 별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그 앞에 선 그의 모습이 그림 같았다.
“왜 에밀리가 그쪽에 넘어가 있는 걸까요.”
로하나가 먼저 입을 열었다. 케이든은 별 동요 없이 가만있었다.
“제가 누운 사이에 알아낸 점이라도 있었던 거예요?”
“R. D. 쪽이었는데, 황궁으로 넘어가 있는 건 제가 생각해도 이상하긴 합니다.”
“R. D.에서 협박했던 거죠, 조디를.”
오렐리아를 보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던 조디를 다시 떠올리자 로하나는 가슴이 짓이겨지는 것 같았다.
“우리의 황제가 생각보다 정보에 밝거나, R. D.와 모종의 거래를 했거나, 둘 중 하나겠죠.”
침묵이 흘렀다.
“괜찮겠죠.”
“괜찮게 할 겁니다.”
그가 겉옷을 벗어 소파에 던졌다. 얇은 셔츠 위로 단단한 근육이 자리 잡은 몸이 드러났다.
얼마나 지났을까.
로하나가 머리가 복잡해 한숨을 쉬는데 케이든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다가오자마자 그녀의 허리와 골반에 손을 얹었다. 바싹 가까워진 그에게서 뜨거운 열기가 뿜어져 나왔다.
“로하나.”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본능적으로 두려울 만큼 본능에 가까운 목소리였다.
“미리 확실히 할 것이 있습니다.”
고개를 한참 꺾어야 그가 올려다보였다. 넓고 높은 어깨 밑으로 그의 얼굴이 닿을 듯 가까웠다.
“당신은 내 옆에 있는 겁니다, 최소한 계약 기간까지는.”
로하나가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그때까지는 당신은 여기 사람이어야 합니다.”
거친 목소리와 숨결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넓은 가슴팍으로 숨고 싶었지만 로하나는 버텼다. 그의 눈을 봐야 했다.
“저는 끈질긴 편입니다. 그때 정원에서 보셔서도 알겠지만.”
엄지손가락이 골반을 지그시 쓸었다. 나머지 손가락이 허리의 오목한 곳을 조를 듯 감싸 왔다.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폭발할 것 같았다.
미동도 못 한 채 커다란 보랏빛 눈동자만이 그를 주시했다.
“그때까지만이라도 허락하시겠습니까.”
으르렁거리는 속삭임에 로하나의 등허리를 따라 발끝까지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귓가에 다가온 그가 속삭였다.
“제 집착을.”
로하나의 심장이 터질 듯 두방망이질 쳤다. 두려웠다. 옳은 길인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이미 아주 예전부터 정해진 답이었다.
로하나의 미세한 끄덕임을 본 그의 얼굴에 낮의 것보다 만족스러운 미소가 근사하게 입가에 퍼졌다.
“그럼 그렇게 하겠습니다.”
거칠게 덮쳐 온 입술에 반응할 새도 없었다. 커다란 양손이 그녀의 몸통을 훑고 올라와 머리카락 사이를 파고들었다.
유려하지만 거칠게 오가는 입맞춤 사이로 새어 나오는 신음까지 그가 삼켜 갔다.
고개를 젖히자 긴 머리카락이 허리를 지나 흔들렸다. 벌어진 턱 아래에 그의 손끝이 다가와 받쳤다.
허리와 갈비뼈까지 충분히 감싸는 커다란 손이 그녀를 안전하게 가두더니 침대로 뉘었다.
다리 옆으로 무릎을 디딘 케이든이 상체를 숙였다.
둘의 눈이 얽혔다. 처음 보는 눈이었다. 눈 깜빡하는 것조차 잊게 하는 흑안.
‘아, 이런 뜻이었구나.’
끌러진 드레스가 흘러내리며 새하얀 어깨가 드러나자 입술이 거칠게 목을 탐하다 쇄골을 따라 내려갔다.
‘집착하겠다는 게.’
손가락이 희게 질리도록 말아 쥐어졌다. 양 팔목이 한 손에 잡혔다. 새어 나오는 그녀의 숨을 그가 다시 삼켜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