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를 죽일 흑막과의 계약결혼-58화 (58/125)

58

*

“이렇게 어리다고는 얘기 안 했잖아요.”

조심스럽게 속삭이는 로하나를 보며 히스가 소리 없이 웃었다.

케이든의 절반까지나 겨우 올까, 세린 공주는 케이든에게 뭔가를 열심히 조잘거리고 있었다.

표정이 딱히 부드럽지 않았지만 케이든은 진지하게 경청하는 자세로 공주에게 눈을 맞추어 주고 있었다.

아직 앳된 목소리에 귀여운 얼굴. 겨우 열 살이나 되었을까. 굽이치는 아름다운 진홍빛 머리카락이 어깨에서 찰랑거렸다.

“난 그럼 이만 아서 경과 이야기를 해야 하니까…….”

옆에 서 있던 나이 지긋한 남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케이든의 시선이 로하나와 마주쳤다. 로하나는 저도 모르게 웃으며 눈인사를 했다.

공주는 조금 못마땅한 입을 하고는 보석 같은 녹안을 로하나에게로 돌리더니 다시 케이든을 올려다보았다.

“알겠어요. 그래도 저녁에는 볼 수 있는 거죠?”

“물론.”

공주는 케이든과 아서 백작이 회의실로 발걸음을 옮기는 모습을 조금 길게 쳐다보다가 고개를 홱 돌렸다.

녹안이 보랏빛 눈동자와 마주쳤다. 또박또박 걸어오는 발걸음이 제법 야무졌다.

“그래서, 당신이 델클리프 공작 부인이 된 로하나 하노버인가요?”

“네, 그렇습니다.”

왜 어제 둘이 그런 얼굴로 곤란해했는지 알 것 같아 로하나는 어쩐지 계속 웃음이 났다.

“흐음…….”

반짝이는 초록색 눈이 로하나를 응시했다.

“그 시녀 일로 상심해서 한참 누워 있었다고 들었어요.”

불쑥 꺼낸 말에 로하나의 얼굴이 대번에 굳었다.

“공주님!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 됩니다! 죄송합니다, 공작 부인. 저희 공주님이 아직 어리셔서…….”

뒤에 서 있던 수행원이자 경호 기사인 오스틴이 깜짝 놀라 말했다.

옅은 헤이즐넛 눈에 금발인 그는 공주의 두 배, 아니 세 배는 될 것 같은 큰 키와 커다란 몸을 가지고 있었다.

“정말 유감이에요.”

로하나는 잠시 작은 공주를 쳐다보았다. 진지한 눈과 굳게 다문 입술이 어린 나이라고는 해도 왕국의 공주답게 당당하고 진중했다.

“네, 고마워요.”

로하나가 살짝 눈을 감았다 뜨며 인사를 받았다. 조금 긴장을 했던 건지 공주의 얼굴이 풀어지더니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아린족치고는 굉장히 된 사람이시네요.”

“공주님!”

젊은 기사는 기함했다. 로하나도 못지않게 놀랐다. 이런 악의 없는 무례함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그래서 말인데, 그냥 언니라고 불러도 될까요?”

기사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입만 벙긋했다. 뚫어지게 올려다보는 눈에선 발칙할 만큼의 순수한 진심이 뚝뚝 묻어났다.

“좋아요.”

로하나의 대답에 기사는 손사래를 치며 고개를 조아렸다.

“공작 부인, 그러지 않으셔도…….”

“뭐 어때요, 우리끼리 얘기하는 건데.”

로하나가 어깨를 으쓱하자 세린이 손뼉을 마주쳤다.

“언니, 저 오랜만에 노프탈 시내 구경하고 싶은데, 같이 나가요.”

그러고 보니 로하나도 나가고 싶었다. 여기 시내를 구경한 적이 없었다.

“공주님, 여왕께선 어디까지나 델클리프 공작께 인사만 드리고 오라고…….”

“조용히 해.”

오스틴의 말을 손으로 막으며 로하나를 올려다보는 공주의 시선이 기대로 부풀어 있었다.

“위험할 건 없지 않을까요?”

로하나, 당신까지? 하는 얼굴을 하며 눈썹을 올리는 히스를 보며 로하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얼른 마차 준비해, 오스틴.”

히스가 고개를 끄덕하자 오스틴도 하는 수 없다는 한숨을 내쉬었다.

“꺅.”

세린 공주가 대번에 로하나에게 팔짱을 끼우더니 즐거워하는 소리를 냈다. 공주가 아직 작아서 여자치곤 제법 큰 로하나가 조금 맞춰 주어야 했다.

“언니, 제 예상대로 역시 쿨하시네요.”

올려다보는 눈이 초롱초롱했다.

“공작님은 원래 저와 결혼해야 했지만…… 나도 그건 안 될 일이었던 거 알아요. 얘기 들어 보니 언니는 좀 괜찮은 사람인 거 같기도 하고. 우리 엄마도 그랬어요.”

“그새 그나마 철이 좀 드셨습니다.”

오스틴이 히스에게 속삭이자 가자미눈을 한 세린이 오스틴을 쏘아보았다.

“어서 가! 준비해!”

통통 튀는 목소리가 공작저에 울려 퍼졌다. 오랜만에 공작저에 생기가 돌았다.

*

“우와…… 진짜 근사해.”

세린의 녹안이 호기심으로 반짝반짝했다. 케이든과 같은 걸 입겠다고 새까만 망토를 걸친 그녀는 팔짱을 놓지 않고 이리저리 로하나를 끌고 다녔다.

상점이 즐비한 거리는 깨끗하고 활발했다. 검은 돌로 단단히 다진 인도에 공주의 경쾌한 구두 굽 소리가 울렸다.

주로 유서 깊은 장인의 가게로 이루어진 거리는 그들 특유의 분위기를 자아냈다. 붉은 지붕에는 눈이 아름답게 쌓여 있었다.

“여기 광장이 정말 멋있던데. 분수가 정말 너무 예뻐요. 겨울이라 안 하려나…….”

“분수대도 있나요?”

“뭐라고요?”

세린이 어이없다는 듯 놀란 얼굴을 했다.

“세상에, 당장 가요!”

갑자기 속도를 내며 거의 내달리는 공주 때문에 오스틴이 쩔쩔맸다.

“공주님, 아니 영애님! 넘어지십니다. 제발 천천히 좀.”

히스는 가장 마지막에 일행을 따라 걸으며 주변이 심상치 않음에 미간을 좁혔다. 원래도 붐비는 곳이지만 뭔가 지나쳤다. 자연스레 신경이 곤두섰다.

광장에 이른 순간, 어떤 남자의 거친 목소리가 허공을 갈랐다.

“아린 것들에게 복수를!”

달리던 세린도, 웃으면서 같이 걸음을 서두르던 로하나도 우뚝 멈추어 섰다.

한데 모인 사람들이 손을 뻗어 광장 분수대 위에 선 남자의 구령에 맞춰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복수를!”

조디의 이름이 피켓에 쓰여 있는 것이 곳곳에 보였다. 조디를 잠시 잊고 붕 떴던 로하나의 가슴이 바닥까지 곤두박질쳤다.

“레이디, 이만 돌아갈까요.”

뒤에서 히스가 로하나의 귀에 속삭였다.

오스틴이 안아 올리려 하자 세린이 완강히 거부하는 것이 보였다. “뭘 이 정도로 그래!”라는 목소리가 들렸다.

로하나는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눈으로 보니 좋았다. 괜찮다는 미소를 짓고 돌아보는데 뭔가가 주의를 잡아챘다.

누군가 노래하는 소리였다. 소름 끼치도록 아름답고 기묘한 소리.

로하나가 서둘러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성난 사람들의 웅성거림 외에 특별한 소리가 날 곳은 없었다.

“히스, 이거 무슨 소리예요?”

“신경 쓰지 마십시오.”

순간, 다시 그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아름답고 청아했지만 무서운 노랫소리 같은.

로하나의 입에서 헉 소리가 났다.

분명 들어 본 적 있는 소리였다. 로하나는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멀었지만, 하늘에 무언가가 있었다. 순간 소름이 끼쳤다.

‘하얀 새?’

수도 서해안에서의 폭격과 다급하게 마차 문을 닫던 케이든의 눈빛이 떠올랐다.

“히스, 저거!”

로하나가 다급히 히스의 팔을 끌어당기며 하늘을 가리켰다. 그렇지만 다시 시선을 집중했을 때 이미 새는 간데없었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레이디, 왜 그러십니까.”

분명, 뭔가가 있었는데.

“언니, 우리 이만 돌아가요. 공작님 저택도 구경하려면 하루는 걸리는데요, 뭐.”

세린 공주가 놓쳤던 팔짱을 끼워 오며 말했다. 제 딴엔 로하나가 마음이 상했을까 조금 걱정하는 눈치였다.

그 마음이 고와 로하나는 빙그레 웃었다.

“네, 그래요.”

다시 올려다보았지만 새파란 하늘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

케이든이 가깝게 걸어왔다.

“일찍 돌아왔네요.”

로하나 바로 옆에 팔짱을 끼고 있던 세린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케이든을 올려봤다.

“세린 공주도요.”

아이 취급 그만하라는 듯 가늘게 눈을 뜬 세린은 그대로 로하나를 두고 총총걸음을 해 사라졌다.

“별일 없었습니까?”

“더 돌아다니고 싶었는데, 광장에서 시위를 하고 있어서 우선은 들어왔어요. 들은 대로 불만이 만만치가 않네요.”

“들은 대로?”

“히스한테 들었어요.”

케이든이 눈썹을 치켜떴다.

로하나는 잠시 그 ‘소리’에 대해서 이야기할지 고민했다. 아름답고 기묘하게 소름 돋던 노랫소리. 그러나 아직 사람들이 잔뜩 모여 있는 이곳에서 할 이야기는 아니었다.

“케이든, 오늘 밤에 저랑 얘기 좀 해요.”

케이든의 짙은 시선이 조금 흔들렸다.

그는 저 은발은 올리고 있을 때나 내려서 눈썹을 가릴 때나 항상 위험한 분위기를 풍겼다. 오늘은 역시나 손님이 온 만큼 올린 모습이었다.

로하나가 잠시 멍하게 있는데, 케이든의 미간이 좁혀졌다. 커다란 손이 허리를 부드럽게 감싸더니 기둥 뒤로 그녀를 끌었다.

다른 사람에게 보이지 않도록 기둥에 맞춰 기대선 그가 로하나를 제 앞에 세웠다.

“기둥은 차가우니까.”

로하나는 당황했지만 굳이 피하지는 않았다. 지금은 그대로 흘러가고 싶었다.

“로하나.”

묘하게 시선을 피하는 것을 귀신같이 눈치챈 케이든이 다시 그녀를 불렀다. 보랏빛 눈동자가 그와 다시 얽혔다.

“무슨 일 있습니까.”

여러 가지 생각이 머리에 스쳤지만 로하나는 입을 다물었다. 케이든이 미간을 좁혔다.

미지의 소리와 하얀 새로 보이던 무언가에 관해서 이야기하려고 했는데, 입에서는 전혀 다른 말이 튀어나왔다.

“우리 뭐 하는 걸까요.”

그날 울면서 새벽에 물은 말이기도 했다. 케이든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다시 내려왔다.

“우리요?”

“네, 우리요. 계약 외적으로.”

케이든의 눈이 천천히 제 눈빛으로 돌아왔다. 지독하고 집요한 눈빛, 보고 있으면서도 더 제대로 보겠다는 듯 집중하는 동공.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은 양손에 그러쥐듯 힘이 들어갔다. 몸이 당겨져 밀착되었다.

그러더니 그의 입술이 그녀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미소를 띠었다. 천천히 다가온 그에게서 시원한 숲의 향이 났다.

케이든의 커다란 손이 로하나의 귓가를 쓸더니 입술을 가져다 댔다.

그러고는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윽하고 동물적인 숨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밤에 얘기하죠.”

눈빛만으로도 무슨 얘기일지 알 수 있었다. 순식간에 발끝에서 뺨까지 열이 올랐다.

“공작니이이임!”

순간, 기둥 뒤에서 세린 공주가 외치는 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그대로 멈춰 선 케이든은 푹 로하나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로하나가 웃음을 흘리자 케이든이 하는 수 없다는 듯 얼굴을 번쩍 들었다.

“여기 있습니다.”

빙글빙글 돌려 기둥 뒤에 로하나를 숨긴 채 케이든이 먼저 나섰다. 로하나는 참았던 숨을 가늘게 내쉬었다. 목덜미에 닿았던 그의 숨결이 아직도 홧홧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