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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워 계시는 며칠 동안 전 군대가 준전시 상황이었어요. 황태자 내외가 황궁군을 거두고 돌아가면서 상황이 종료되긴 했지만.”
예상했던 바였다. 로하나는 케이든의 몸에서 나던 미약한 화약 냄새, 눈보라 냄새가 떠올랐다.
“수도에서는 레이디의 암살 사건을 두고 카르크 출신, 특히 마력자를 색출하여 이번에야말로 철퇴를 내려야 한다고 하는 모양입니다. 이런저런 린치 사건이 수도에서 발생하는 것 같아요.”
로하나는 갑갑한 한숨을 쉬었다.
“여기는요?”
“여기는.”
히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여기는 괜찮습니다.”
거짓말. 히스는 거짓말을 못 하는구나, 라고 생각하며 로하나는 시선을 떨구었다.
파인체이서에서 처음 오는 날에도 사용인들의 싸한 눈길과 못마땅한 몸 움직임을 눈치챌 수 있었다.
하물며 지금에야.
그러고 보니 히스가 이렇게까지 붙어 있는 것도 만에 하나를 대비하기 위함일 것이다.
“나 때문에 다들 고생이 많네요.”
“그런 생각 마십시오.”
제 거짓말이 통하지 않은 것을 눈치챘는지 히스는 포기하고 침착하게 말했다.
“오렐리아는…….”
히스가 드물게 미간을 좁히며 말을 이었다.
“케이든이 남부에 머물렀을 때 편의를 마련해 준 자작의 딸입니다. 노프탈로 떠날 때 저도 데려가 달라고 부탁했다고 하더라고요.”
로하나는 모르는 이야기였다. 남부라……. 바르디가 가지 않았던 그곳에 그럼 케이든이 대피를 했다는 이야기였다.
“그래서 여기에서 같이 지냈습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시내에 지낼 집을 마련해 주었는데도 여기 게스트 룸에서 나가질 않았었죠. 딱히 아무와도 어울리지 않았고, 케이든만 믿고 따랐어요.”
히스가 잠깐의 침묵을 깨며 말을 이어 갔다.
“그랬군요.”
로하나가 저도 모르게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돌아왔다. 히스가 잠시 망설이다가 운을 뗐다.
“남부로 입양이 되어서 그렇지, 사실은 여기 출신이거든요. 카르크족 출신입니다, 황후 폐하도.”
로하나의 눈썹이 올라갔다.
“특이한 사람이었어요. 그 와중에 마력을 못 다루니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무시 아닌 무시를 당했을 겁니다, 어렸을 때부터.”
“아예 마력을 못 다룬다고요.”
“아주 가끔 그런 일이 있다고 하더라고요. 아린족이 마력을 사용하는 경우가 있는 것처럼.”
히스의 말에 로하나는 저도 모르게 목을 가다듬었다.
기묘한 일이었다.
“엘로이 부인, 여기 준비된 케이크 전부 다 가져와 주실 수 있나요.”
히스의 말에 엘로이 부인이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기운이 없을 때는 좋아하는 음식을 먹어야죠.”
로하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수도에서 영애들한테 들었어요. 동생인 브란드가 누이를 위해 수도 최고 파티셰를 고용했다고.”
수도에 그들이 있었던 나날이 까마득했는데 히스가 이런 사소한 일을 기억하자 로하나는 놀랐다.
“그걸 기억해요?”
“제가 기억력이 워낙 좋아서.”
빙긋 웃는 히스를 보며 로하나도 미소 지었다. 그때 히스의 눈동자가 로하나 너머로 고정되었다.
“케이든.”
히스가 웃음을 조금 거두었다. 로하나가 고개를 돌리자 케이든이 서 있었다.
깔끔하게 올린 머리카락에 정장 차림이 한창 업무를 보던 중인 듯했다. 케이든의 짙은 눈 사이의 미간이 미세하게 좁혀져 있었다.
“로하나, 왜…….”
“밥 먹고 도서관 가려던 참이에요. 너무 오래 누워 있었어.”
왜 더 쉬지 않고 이렇게 나와 있어, 하는 눈이 여전히 조금 못마땅한 빛을 띠었다.
옆의 의자를 끌어다 앉은 그가 로하나를 다시 한번 쳐다보았다. 넓은 어깨 때문에 의자가 그를 다 받쳐 주진 못했다.
“히스, 이거.”
그러더니 케이든이 막 열어 본 서신을 히스에게 전달했다. 로하나는 저가 낄 일이 아닌가 싶어서 잠시 가만히 있었는데, 케이든이 입을 열었다.
“로하나, 안 좋은 소식을 전해야 할 것 같습니다.”
서신을 읽은 히스가 조금 웃었다. 케이든도 조금 곤란한 목소리였다.
“뭔데요?”
로하나가 둘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또 손님이 오게 생겼습니다. 단순한 방문이지만.”
성가시게 되었다는 얼굴이었다.
“샤톤웰입니다.”
로하나는 힉슬리 후작이 떠올랐다. 황위 계승식 때 무례한 말을 남발하던 밀짚색 머리카락에 기름지던 그 남자.
“힉슬리 후작이요?”
케이든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세린 공주입니다.”
아주 오래전에 힉슬리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우리 공주님이 정말 꼭 오고 싶어 하셨어요. 우리 공주님이 공작을 좀 좋아하셔야죠.>
“아, 공작님을 좋아한다던……?”
히스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케이든은 조금 당황한 얼굴로 무슨 소리냐는 눈빛을 보냈다.
“뭐…… 그렇다면 그럴 수도 있겠죠.”
미묘한 분위기에 로하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케이든을 올려봤다.
“아직 어린아이입니다, 정말로.”
케이든이 히스에게 부연 설명을 요청하듯 눈짓했으나 히스는 턱을 괴며 생글 웃을 뿐이었다.
“내일 온다네요.”
히스가 설명을 이었다.
“상황도 상황이니 대놓고 사절단을 보낼 수는 없으니 비공식 외교단을 보내는 것 같네요.”
히스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갈레드가 다이닝 룸 문을 노크했다.
“전하, 샤톤웰에서.”
“아서 경이 함께 온다고 하던가?”
케이든이 비스듬하게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갈레드가 어떻게 알았냐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준비해.”
갈레드가 고개를 끄덕이고 문을 닫고 나갔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때 케이든이 먼저 입을 열었다. 잠시 향한 시선에 로하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히스, 우리 셋만 알아야 할 이야기가 있어.”
히스가 한쪽 눈썹을 올리며 고개를 기울였다.
“로하나도 마력자야.”
대뜸 던져진 정보에 히스의 눈동자가 잠시 굳었다. 테이블 밑으로 케이든의 큰 손이 로하나의 무릎을 감쌌다.
“그리고 우린 그 능력을 키워 볼 생각이야.”
“뭐……?”
묘한 긴장이 흘렀다.
“방금 말해 준 케이스의 반대가 되겠네요.”
이상하리만큼 어색해지는 분위기에 로하나가 조금 명랑하게 말했다. 히스의 옅은 눈이 로하나를 향했다가 다시 케이든에게로 옮겨 갔다.
“방금 케이스의 반대라니?”
“오렐리아 이야기를 하고 있었어. 카르크 출신인데도 마력이 없어 개밥에 도토리 신세였다고.”
히스가 미묘하게 날이 선 대답에 이어 빠르게 덧붙였다.
“너무 위험해.”
히스의 말에 케이든이 턱을 괴었다. 그도 그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내가 우긴 거예요.”
로하나가 불쑥 입을 뗐다.
“최소한 자기 방어라도 할 수 있으면 좋으니까.”
케이든이 낮게 덧붙였다.
겨우 그 정도 기대라니, 로하나는 한쪽 눈썹을 치켜뜨고 옆에 앉은 케이든을 바라보았다. 그 정도로 만족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케이든이 의자를 쭉 밀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날이 추우니까 나갈 땐 조심해서.”
“걱정 마.”
히스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말했다. 케이든은 로하나의 어깨를 살짝 잡았다 몸을 돌려 나갔다. 바로 이어서 엘로이 부인이 케이크를 들고 들어왔다.
로하나는 오렐리아의 배경을 들으면서 히스에게 아무 말 하지 않았던 것이 마음에 걸려 입술을 뗐다.
“히스, 아까 바로 말 못 한 건…….”
“레이디.”
평소의 그보다 조금 낮은 음성이 부드럽게 울렸다.
“괜찮습니다.”
히스가 언제 경직되었느냐는 듯 미소를 지어 보였다.
“더 궁금한 건 없으시고요?”
로하나는 잠시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부인이 내온 아름다운 조각 케이크가 눈을 즐겁게 했다.
“마력이라는 게 뭘까요.”
대학 개론 수업에서 교수가 활용할 것 같은 말을 꺼내며 로하나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장난기 있게 말한 것이라는 걸 아는 듯 히스도 따라 웃었다.
*
노을이 아름답게 깔려 있었다. 며칠 사이 두껍게 내린 눈이 그새 많이 녹았지만 케이든이 앞서 말한 대로 공기는 차가웠다. 가느다란 숨을 내뱉자 하얀 입김이 퍼져 나왔다.
발코니에 서 있는 로하나 뒤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날이 춥습니다.”
실내가 워낙 넓다 보니 멀리 떨어진 곳에서 케이든이 문을 열고 너른 걸음으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시원하고 좋은데요.”
케이든은 조금 못마땅한 얼굴을 하더니 곧 옆에 나란히 서 발코니에 팔을 기댔다.
높고 곧은 콧대에 날카로운 옆모습이 노을에 비치었다. 로하나는 잠시 그 옆모습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내일부터 뭘 하면 될까요?”
로하나의 밝은 목소리에 케이든은 조용히 긴 손으로 난간을 잡았다.
“내일은 샤톤웰 때문에 아무래도 히스에게 기회를 전부 빼앗기겠네요.”
“히스에게 미안하네요. 매일 제 옆에 있느라고 안 그래도 지루할 텐데…….”
“저도 마력은 히스에게 배웠습니다.”
의외의 말에 로하나의 눈이 조금 커졌다.
“히스랑은 어디에서 만난 거예요?”
“그때 황궁에서 탈출한 뒤 남부에 몸을 잠시 숨겼습니다. 그러다가 노프탈로 옮겨 왔는데 그때 사실상 여기의 실세가…… 히스였다고 봐야겠네요.”
“아직 많이 어렸을 텐데요?”
로하나의 질문에 케이든은 옅은 미소를 지을 뿐 별말이 없었다.
“그럼 그때부터 쭉 함께 자란 건가요?”
“중간에 약간의 부침이 있기는 했지만, 그랬죠?”
노을이 지고 땅거미가 푸르게 내렸다. 이 노프탈에서 오렐리아, 히스, 케이든은 함께 자랐다. 로하나는 묘한 기분이었다.
“이제 그만 들어갈까요?”
먼저 걸어 들어가는 케이든의 뒷모습이 보였다. 넓고 곧게 뻗은 등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렇게 몇 날 며칠을 울면서 잠이 든 후로 제대로 서로 얼굴을 마주할 일이 없었다.
“케이든.”
문득 불러 놓고도 로하나는 말문이 막혔다. 흔들리는 눈동자를 보자마자 케이든이 몸을 되돌렸다.
“조디는 어디에 어떻게 되어 있나요?”
케이든의 눈이 어두워졌다.
“가족이 없고, 대역 죄인이기에…… 법리에 따라 화장하여 외곽에 안치하였습니다.”
로하나의 눈이 어두워졌다.
“다른 방법은 없었나요.”
“안치된 것만으로도 감사해야죠.”
냉정한 목소리에 로하나는 말을 더 하려다가 말았다. 이제 와 무수한 말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제가 모시죠.”
속삭이는 낮은 목소리에 몸에 힘이 빠졌다.
조디가 그렇게 되고 그대로 쓰러져 호되게 앓던 중에는, 모든 것이 꿈이었나 하기도 했다.
가슴에 수많은 미세한 금이 가는 것 같은 느낌은 매 순간 그 일을 떠올릴 때마다 생생하게 로하나에게 돌아왔다.
‘나는 아무것도 이젠 믿을 수가 없어요.’
로하나는 복잡한 마음으로 케이든을 올려다보았다.
그런 심정을 아는 것인지 모르는 것인지 케이든은 완벽한 얼굴로 미소까지 짓더니 그녀의 허리를 감싸며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