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
*
“황제 폐하.”
브란드가 무릎을 굽혀 인사를 올렸다.
“이제 그만 수도로 돌아오셔야 한다는 의회의 결정입니다. 군부에서도 확인했을 때 ‘하얀 새’의 공격도 멈추었습니다.”
이런 보고는 꽤 오래전부터 받아 오던 참이었다.
“그런데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바르디가 문득 미간을 좁혔다.
“여기 네 누이를 두고 가도 되나?”
로하나를 똑 닮은 브란드의 눈이 흔들렸다.
“지금 상황은 들었지?”
“예…… 예, 들었습니다.”
“그런데 나만 홀랑 여기를 떠나면 카르크족이 득실대는 이곳에서 네 누이는 혼자 어떻게 하지?”
“케이든 델클리프 공작께선 황족이십니다. 카르크족을 충분히 억누르실 수 있는 분으로 알고 있고요.”
“내가 그를 못 믿는다면?”
황제의 말에 브란드는 당황했다.
“그…… 그건…….”
“알겠어. 우선은.”
우선 수도로 환궁해서 할 일이 있었다. 돌아오는 것은 얼마든지 언제든지 할 수 있었다.
“준비하라 일러.”
브란드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예, 폐하. 그리고 제 누이에게는 아침에 꼭 가 보겠습니다.”
구차하게 덧붙이는 말에 바르디는 콧방귀를 뀌었다.
“그러든지.”
이놈이고 저놈이고 제 눈치만 보지 제대로 하는 것은 없어 보였다. 욕을 지껄여도 속이 풀리지가 않았다.
로하나가 케이든의 내실에 들어가 누워 있는 것만 생각해도 속이 끓었다.
아까 낮의 그놈 행패를 생각하니 당장이라도 옆의 시종 여럿의 목은 쳐 내려야 분이 풀릴 것 같았다.
그러나 여긴 노프탈이었고, 황궁군만으로는 마력자가 득시글대는 이곳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확실한 계산이 나오지 않았다.
무엇보다 확실하게 케이든과 카르크족들을 끝내기 위해서는 대세의 흐름이 필요했다.
지금은 섣불리 움직일 때가 아니야.
어떻게 보면 모든 일이 마침맞게 잘 떨어졌다고 바르디는 생각했다.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빼앗게 될 테니까.
*
유난히 밝은 달빛이 두 개 층은 될 듯한 높은 창문에서 쏟아져 내렸다. 케이든은 응접실 의자에 꼼짝도 하지 않고 앉아 생각에 잠겼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한 생각과 어떻게 했어야 할지에 대한 자책이 복잡하게 엉켰다.
그때 등 뒤로 조용히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케이든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로하나가 새하얀 잠옷 차림 그대로 서 있었다.
“아직 일어나시면 안 됩니다, 제가…….”
“무엇을 원하냐고 물었죠.”
달빛 아래 그녀를 오랜만에 다시 마주했다. 아무 장식 없이 늘어뜨린 흑단 같은 머리카락이 빛났다.
어렸을 때와 같았다. 이번에는 엉망으로 다친 쪽이 그녀였지만.
“정말 원하는 대로 다 주실 건가요.”
둘의 시선이 얽혔다. 케이든의 머릿속에 수많은 생각이 떠올랐다. 그녀의 안전을 위해서 해야 할 말은 정해져 있었다.
여기를 떠나십시오.
곧 전쟁터가 될 테니 남부나 샤톤웰 어디로라도 안전한 데로, 어서.
그런데 얽혀 드는 보랏빛 눈을 보니 숨이 막혔다. 아까처럼 눈빛만으로도 의중이 읽혔다.
그녀는 이대로 물러날 생각이 없다.
“네.”
그의 입에서 정말 그녀를 위한 것인지, 결국 제 욕심을 채우기 위한 것인지 모를 승낙의 말이 흘러나왔다.
“그럼 계획대로 해요.”
속삭이는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절 키워 주세요.”
차가운 손이 케이든의 팔을 부드럽게 쓸었다. 낮은 신음이 케이든의 입 새로 흘렀다.
“아린족이 마력을 가지면 어떻게 되나 어디 같이 지켜보죠.”
로하나의 입가에 차분한 미소가 서렸다. 내려다보는 케이든의 얼굴은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그녀가 그의 팔에서 손을 떼며 몸을 돌려 나가는 순간, 케이든의 팔이 로하나를 휘감았다. 심장 박동 소리가 어깨를 타고 등허리를 따라 전해졌다.
“로하나.”
아픈 목소리에 가슴이 저렸다.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단단한 몸과 팔이 강철처럼 단단하게 로하나의 몸을 안았다.
로하나의 몸을 덮고도 한참 남는 몸과 어깨가 더더욱 그녀에게 밀착해 파고들었다. 어깨를 감싼 팔이 몸을 가로지르고도 허리를 감쌌다.
로하나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넓고 판판한 가슴에 얼굴을 숨기려다 결국 고개를 꺾어 드니 고개를 숙인 그의 얼굴이 보였다.
“무슨 문제요?”
“계약대로만 한다고는 약속 못 하겠습니다.”
낮은 목소리는 짐승 소리에 가까웠다. 하고 싶지 않은 말이 알아서 쏟아져 나오는 듯했다.
처음 보는 괴로운 표정에 로하나는 마음이 쓰렸다.
“어떤 부분을?”
창백한 손가락이 그의 얼굴을 쓸자 그가 눈을 감았다. 그의 입술 사이로 낮은 속삭임이 흘러나왔다.
“이런 부분.”
지독하고 그윽한 시선이 보랏빛 눈동자에 맺히는 순간, 그가 깊숙이 다가왔다.
로하나는 기꺼이 그 숨결을 받아들였다. 상관없었다. 이제 어찌 되든, 앞으로 어떻게 흘러가게 되든. 어차피 머리로 설명할 수 있는 관계가 아니었으니까.
일전과는 전혀 다른 부드러운 입술이었다. 숨 하나조차 조심스럽게 입술을 타고 흘렀다.
허리를 안은 커다란 손은 부서질세라 그녀를 부드럽게 감쌌다. 극도의 조심스러움이었다.
눈물이 흐르는 걸 아는지 그는 중간중간 입술을 떼었다. 아픈 숨소리를 온전히 받아들이듯이 부드러운 입술이 그녀의 눈가를 훔쳤다.
로하나는 그에게 아예 기대섰다. 체온이 닿자 드디어 춥지가 않았다. 케이든은 이내 가뿐히 그녀를 들어 올렸다.
침대로 조심스럽게 그녀를 내려놓은 케이든이 그제야 입술을 뗐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그를 보며 로하나가 속삭였다.
“우리 뭐 하는 걸까요.”
쉿, 케이든은 다시 짧은 키스를 했다.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자 그쪽으로 로하나가 고개를 돌리며 눈을 감았다.
“생각하지 마.”
케이든이 천천히 내려오더니 이내 그녀를 감싸듯 옆에 누웠다. 로하나는 몸을 떨었다.
“울면 더 좋고.”
그 말을 끝으로 로하나의 눈에서 드디어 눈물이 터졌다. 케이든은 그대로 아이 달래듯이 그녀를 가슴에 묻었다.
엉엉 우는 울음소리가 케이든의 마음을 할퀴었다. 달빛 아래에서 우는 로하나는 그때 그 소녀였다.
본 적 없는 마음이었다. 제 부모를 제외하고는 어느 누구도 그를 동등한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 그는 어느 쪽에도 끼지 못하는 혼혈이었으니까.
케이든은 하지 못했던, 앞으로도 할 수 없을 말을 속으로 중얼거렸다.
‘천사인가 했었어.’
이 땅에 숨 쉬고 남아 있는 존재 중에 나를 도우려는 사람이 있었다는 것.
그것 하나에 울고 싶을 만큼 벅찼다는 걸 당신은 모르겠지.
당신이 나에게 어떤 존재로 각인됐는지, 당신이 나를 얼마나 휘두를 수 있는지.
당신은 모른다.
케이든은 천천히 로하나의 머리카락을 쓸었다.
그녀를 위해 못 할 것이 없었다.
케이든은 대책 없이 내달리는 마음을 결국 인정하며 조용히 숨을 내쉬었다.
*
사흘을 내리 잠만 잤다. 마리가 커튼을 열었다 닫는 것으로 겨우 아침을 구분했다.
밤에는 케이든이 찾아왔고, 그의 몸에서는 화약과 땀, 그리고 눈보라의 냄새가 났다.
아무 말 없이 침대맡에 앉은 그를 느끼며 그때마다 이상할 만큼 더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그도 가끔은 로하나를 흔들어 깨웠다.
“누나, 곧 다시 데리러 올게.”
브란드의 목소리가 꿈결처럼 들렸다.
“로하나, 황제 내외가 수도로 돌아갑니다.”
케이든이 설명하는 목소리도.
로하나는 새하얀 이불에 몸을 묻고 고개를 끄덕였다. 열이 도저히 떨어지지 않았다. 의원과 케이든이 나누는 나지막한 대화 소리가 잠결에 뜨문뜨문 들렸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드디어 열이 내렸다. 눈을 뜨니 대낮인지 해가 중천이었다. 로하나는 몸을 일으켰다. 기운을 차려야 할 때였다.
오랜만에 내실 밖으로 걸음을 내딛자 문 앞을 지키고 있던 히스가 놀란 눈을 하며 읽던 책을 덮고 일어섰다.
“레이디!”
로하나는 우아하게 올린 머리에 심플한 푸른 드레스를 입고 서 있었다. 쇄골 언저리의 비즈가 그녀의 움직임을 따라 반짝였다.
“오랜만인 거 같네요, 히스.”
히스의 얼굴이 눈에 띄게 환해졌지만, 숨길 수 없는 쓸쓸한 미소와 어두운 눈빛에 로하나는 에밀리의 수색에는 진척이 없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히스, 우리 도서관 가도 될까요?”
히스가 당연하다는 듯 팔을 내밀었다. 로하나는 미소를 지으며 그의 팔을 붙잡았다.
“그런데, 그 전에.”
히스가 팔짱을 낀 로하나의 손에 반대편 손을 얹으며 멈춰 섰다.
“점심은요?”
로하나는 조금 웃었다.
“레이디를 지키는 게 제 임무니까요, 요즘은.”
케이든이 세계관 최강자라면 그의 심복인 그도 못지않을 텐데 이런 따분한 일에 묶어 두게 된 것 같아 못내 미안했다.
“지루해서 어떻게 해요.”
로하나의 말에 히스는 가볍게 웃었다.
“그럴 리가요. 아, 그나저나 황제 내외도 없고, 수도 병사들도 없고, 이렇게 레이디와 있으니 정말 너무 좋네요.”
솔직한 감상에 로하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고열로 정신이 없어 침상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있을 때에도 바르디는 굳이 들어왔었다.
<로하나, 조금만 기다려. 금방 올게.>
지긋지긋한 목소리에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겨우 나았던 몸이 아파질 것 같았다.
“정말 좋네요.”
진심이었다. 그 진심을 아는지 히스도 빙그레 웃었다.
“그런데 조금 더 쉬셔야 좋을 것 같은데…….”
다이닝 룸에 앉은 히스가 물었다. 조금 긴 머리카락을 대충 반묶음 한 그는 평소와 조금 달라 보였다.
선이 고운 얼굴에 살짝 처진 새물새물한 눈가. 늘 웃음이 서린 표정은 보는 사람을 편안하게 했다.
“오래 쉬었어요.”
로하나는 잠시 망설였다. 마력에 관한 이야기는 케이든과 상의한 후 하는 것이 옳을 것 같아 차치하고, 다른 질문을 떠올렸다.
“히스, 뭐 좀 물어봐도 될까요.”
찻잔의 차를 한 모금 마신 로하나가 말했다.
“네, 물론이죠.”
히스가 늘 그렇듯 사람 편하게 대답했다.
“황후 오렐리아는 어떤 사람이에요? 남부 자작가의 외동딸이었다는 것 말고는 제가 아는 게 없어서요.”
이번엔 히스의 눈썹이 조금 움찔했다.
“이번 일에 오렐리아가 관련되어 있다고 케이든에게 들었습니다. 심증뿐이지만.”
로하나의 얼굴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조디에게 불을 왜 냈느냐고 물었던 그때, 그녀는 오렐리아를 보고 입술을 굳게 닫아걸었다.
“그 후로 주변 상황은 어떤가요.”
“레이디…….”
“괜찮아요, 정말.”
정말 괜찮았다. 더 이상 떨지 않을 것이었다. 원작의 흐름을 막을 수 없다면 설정을 파괴해서라도 막을 셈이었다.
로하나의 단호한 얼굴에 못 이긴 듯 마지못해 히스가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