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
*
“수습은 마쳤나?”
황제는 제 앞으로 마련된 황좌에 앉아 케이든에게 물었다. 케이든의 눈이 늑대처럼 빛났다.
“네.”
“전 제국이 하노버 공작가의 딸을 어떻게 이런 곳에 두냐며 난리가 났는데 카르크 놈들은 이렇게 꼬리 자르기를 하네?”
황제는 본인이 정말 그렇게 생각하든 하지 않든 모든 사건을 카르크족의 만행으로 몰고 갈 것이다. 어느 정도 사실이기도 했고.
오렐리아가 말한 대로, 그리고 히스가 언질한 대로, 라자르가 예언한 대로.
결국 이 길을 가게 되겠구나.
묘하게 차분해지는 마음에 케이든은 은발을 쓸어 넘겼다. 오랜만에 명확한 그림을 보니 그게 뭐든 반가울 지경이었다.
“하는 데까지 하십시오. 저도 그럴 테니.”
존칭만 하고 있었지 한껏 내려 보는 어투에 바르디의 인상이 구겨졌다.
“저는 제 아내에게 가 봐야 해서 이만.”
움직이는 케이든을 거칠게 끌어 잡은 바르디가 인상을 구겼다. 화가 난 얼굴이 경멸과 분노로 일렁였다.
“감히 네가 지금 로하나한테 얼굴을 내밀어? 애초에 그러게 왜 이런 데로 끌고 와서 이 사달을 내?”
케이든이 거칠게 잡힌 팔을 빼냈다. 바르디의 몸이 휘청했다.
“이 모든 일은 저와는 상관없이 일어난 일입니다. 저도 황족이니까요. 악스톤까지 처분해 준 황족 아닙니까.”
바르디의 얼굴이 흠칫했다.
“그리고 애초에 끌고 올 일을 만들지 말았어야지.”
으르렁거리는 목소리가 낮게 울리고 날카로운 눈매에 살기가 흘렀다. 순간, 발끈하며 밀어붙이는 바르디를 케이든이 한 손으로 쥐어 잡았다.
“델클리프 공작! 미쳤습니까!”
경호병들이 칼을 겨누고 실비우스가 고함을 질렀지만 케이든은 살뜰히 그들을 무시했다. 바르디가 웃으며 그들에게 가만있으라 눈짓했다.
케이든은 피식 웃었다. 잘난 자존심에 무서우면서도 괜찮은 척할 줄 익히 예상했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로하나의 말대로 살아야 마땅할 듯싶었다.
그녀에게도 그것이 맞고.
자신도 더 이상 황족이라고 참을 필요도, 의미도 퇴색되어 가고 있었다.
“가만히만 있었으면 그 앨 생각해서라도 그냥 얌전히 살아 주려고 했어.”
알 수 없는 소리에 바르디의 미간이 좁혀졌다.
“로하나 하노버.”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애초에 네까짓 거가 옆에 있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는데…….”
실비우스가 고함을 치며 용기를 내 다가왔지만 케이든의 다리는 땅에 박힌 듯 꼼짝할 기색이 없었다.
“이제야 발톱을 드러내네. 역시, 우리 아버지 말이 맞았어.”
고작 한다는 말이 그 정도냐며 케이든은 피식 웃었다.
“알고 있었군.”
“당연한 거 아냐? 내가 부친에게 고마운 단 한 가지인데.”
바르디가 일그러진 웃음을 지었다.
“내가 너무 오래 가만히 있어 줬어.”
케이든의 목소리가 차갑고 낮게 울렸다.
“평생을 졌는데 이번엔 이길 것 같아?”
케이든의 말에 바르디의 오른손이 순식간에 칼자루 쪽으로 움직였다.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케이든이 한발 빨랐다. 황제의 팔목이 붙잡히고, 일순 주변의 경호병들이 칼을 빼 들어 케이든의 목을 겨눴다.
날카로운 금속음이 울려 퍼졌다. 곧 부들부들 떨리는 황제의 손에서 검이 떨어졌다.
목숨이 아까웠던 경호병들은 실비우스의 고함에도 우선 황제의 명을 기다렸다. 델클리프에게 잘못 나섰다가는 본보기로 죽을 것이라는 걸 모두가 알고 있었다.
케이든은 병사들에게 천천히 시선을 두다가, 거칠게 팔을 내렸다. 황제가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는 사이 케이든은 몸을 돌려 인파를 빠져나갔다. 이즈와 갈레드가 그 뒤를 따랐다.
“전 군대 집결시켜.”
오랜만에 보는 살기 어린 눈동자에 갈레드는 등골이 서늘해졌다. 이즈가 고개를 끄덕였다.
*
“레이디!”
온실에서 걸어 나오는 로하나의 얼굴에 피가 묻은 걸 보고 히스가 기겁을 했다.
“장례식은…….”
로하나가 조용히 물었다.
“장례식은 어떻게 하게 되죠?”
히스가 눈썹을 내리며 말했다.
“지금 그것보단…….”
“대답만 해.”
분노에 찬 눈동자가 히스를 올려다보았다.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핏기 없는 얼굴에 짙은 눈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희가 잘할 테니.”
로하나가 화가 난 한숨을 쉬더니 히스를 무시하고 지하 감옥으로 걷기 시작했다. 그때 누군가가 로하나를 붙잡았다.
“손대지 마!”
소리를 지르며 팔을 빼낸 로하나가 위를 올려다보았다. 넓은 어깨에 차가운 은발, 케이든이었다.
로하나는 잠시 거친 숨을 몰아쉬다가 다시 가던 걸음을 걸었다.
“로하나.”
케이든이 옆으로 다가오며 불러 세웠지만 로하나는 무시했다. 아무도 보고 싶지 않고, 아무것도 듣고 싶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지하 감옥 입구에서 들것이 나오고 있었다. 흰 천으로 덮인 모습이었다. 차가운 겨울바람이 그녀의 얼굴을 스치자 눈물이 알아서 흘러 떨어졌다.
달려 나가던 로하나는 어느 순간 힘이 꺾였다. 몸이 공중에 뜨는 듯하더니 단단한 팔이 뒤에서 그녀를 안았다.
반항할 힘도 없어 눈물을 쏟으며 몸을 엎드렸다. 무릎을 꿇고 엎드린 채 우는 로하나를 케이든은 말없이 끌어안았다. 그리고 그대로 모든 것이 깜깜했다.
*
눈을 뜨니 침대였다. 사방은 조용했다. 한밤중인 건지 주변에는 촛불이 일렁였다.
꿈이었나, 했다.
인기척이 나 고개를 조금 돌리니 익숙한 얼굴이 침대 곁에 앉아 있다.
“좀 어떠십니까.”
로하나는 말없이 몸을 조금 일으켰다. 침대에 기댄 채 올려다본 케이든의 얼굴은 낯설 만큼 지쳐 있었다.
“어떻게…….”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로하나는 애써 단어를 고르다가 그냥 직접적으로 물었다.
“사인은요?”
“지금은…….”
“대답해 주세요.”
케이든이 잠시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자살입니다, 우선은.”
“방법은?”
케이든은 더더욱 굳게 입을 다물었다.
로하나는 아까 본 조디의 모습을 떠올렸다. 목 바로 아래로 이미 흰 천이 덮여 있었다. 본능적으로 외면했던 목의 멍 자국이 기억났다. 아마도…….
“입고 있던 옷인가요?”
케이든은 짧은 한숨으로 긍정을 표했다.
“그 아이도 없어졌어요.”
“지금 수색대를 보냈으니 우선 그 생각은 그만하십시오.”
“어떤 것도 아무 의미가 없었어.”
로하나에게서 혼잣말이 불쑥 나왔다.
남들 보기엔 답답해 보일지 몰라도 단 한 번도 저 자신은 뭔가를 쉽게 포기한 적 없었다. 심지어 죽는 그 순간까지도 생명 끈을 붙잡았었다.
구차했다. 그런 게 무슨 의미가 있었나. 결국 늘 졌는데. 지는 싸움을 하는 것에 정말로 지쳤다.
잠시 말을 잃은 그녀를 보며 케이든이 입을 열었다.
“저의 어쭙잖은 위로보단 그래도 정보를 원하실 것 같아 말씀드립니다.”
로하나가 시선을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오렐리아의 시녀인 로리앤이 저녁 식사 메뉴를 바꾸었답니다. 원래는 감자수프였던 메뉴를 토마토로. 조디가 감자 알레르기가 있다고 한 모양입니다.”
케이든이 잠시 말을 멈추었다. 이야기를 지금 하는 것이 맞는지 조금 망설이는 듯도 했다.
“조디는 그런 알레르기 없어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케이든이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어떻게 되는 거죠.”
“황제의 말에 따르면 전 제국은 당신을 암살하려 시도한 카르크족을 응징하겠다는 입장인 모양입니다. 조디의 일은……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요.”
“그렇군요.”
로하나는 잠시 멍해졌다.
“당연히 카르크 쪽에서는 그 반대의 입장이고요. 오죽했으면 그러했겠느냐는 말과, 투사라는 말이 오가고 있습니다.”
계약 결혼이 우스웠다. 올라가는 긴장감, 터져 버린 전쟁. 결국 또 원작대로 흘러가잖아.
“그래서 앞으론 어떻게 하실 건가요?”
로하나에게서 포기한 목소리가 천천히 흘러나왔다. 이제 전쟁 중에 저를 죽이면서 아린족과 황제에 대한 복수를 이루실 건가요.
기가 찬 마음에 뭐든지 부수고 싶었다. 그때 케이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가 어떻게 하길 원하십니까.”
로하나는 잠시 제 귀를 의심했다. 옅은 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그런 소리는 듣고 싶지 않았다. 무엇을 원하냐니, 원하면 원하는 대로 해 줄 텐가.
빠져나가지 못한 화가 치밀어 올랐다
“글쎄요, 수도가 전쟁이라도 걸어 오면 본보기로 절 죽일 수도 있겠죠.”
“여전히 생각하는 패를 다 말씀하시네요.”
“이번에는 아무 자신이 없는데도 던지는 거예요.”
“저를 어지간히 못 믿으십니다.”
침묵이 내려앉았다. 지독한 시선에 로하나는 고개를 돌렸다.
“반역자의 아들이다. 역시 못 믿을 카르크족 출신이다. 이런 겁니까.”
고개를 돌렸던 로하나가 인상을 쓰며 그를 돌아보았다. 태연한 얼굴에는 미처 가려지지 않은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로하나.”
케이든이 한참 침묵을 지키더니 입을 열었다.
“절 기억하신다고 했죠.”
로하나의 시선이 다시 그를 향했다.
“그때 난 살려고 도망치지 않았습니다.”
미간이 좁혀졌다. 케이든의 몸이 조금 앞으로 기울었다. 커다란 손은 로하나에게 닿지는 못한 채 침상에 머물렀다.
“그곳에서 죽고 싶지 않았을 뿐입니다.”
완벽한 얼굴에 금이 가 있었다.
“아마, 당신을 만나지 못했다면 그렇게 됐겠지. 아니면 그조차도 못 이루고 결국 황궁에서 죽었거나.”
일렁이는 촛불 사이로 빨려들 듯한 흑안이 로하나를 바라보았다.
핏줄이 선 긴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빠져나갔다.
“이번에는 제가 보호하고 싶었고, 원하는 걸 주고 싶었습니다.”
‘왜 우리가 구면이라고 처음부터 얘기하지 않았어요?’
마주친 눈빛으로 질문을 읽었는지 케이든이 조금 잠긴 목소리로 대답했다.
“기억하셔 봤자 이런 제 인생에 더 복잡하게 연루되실 것 같아서, 그래서 영원히 못 알아보셨으면 했습니다.”
처음 보는 쓸쓸한 미소가 케이든의 눈에 번졌다. 높은 콧대에 진 음영이 평소보다 더 짙어 보였다.
“결국 전부 이렇게 되어 버리고 말았지만.”
고개를 숙인 그의 얼굴이 어둠에 조금 묻혔다. 그의 입술이 살짝 떼어졌다, 이내 다시 닫혔다.
“브란드 공자가 도착했습니다. 오늘은 힘드니 내일 인사 올리라고 말해 놨어요.”
로하나는 가만히 그 말을 듣고만 있었다.
“쉬십시오.”
침묵을 지키던 케이든은 이내 아무 말 없는 로하나를 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이 닫히는 소리에 로하나는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