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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죽일 흑막과의 계약결혼-54화 (54/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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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을 쓸고 있던 작은 소녀들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창 안을 힐끔거렸다.

“없다니요? 분명 여기에서 지낸다고 했는데…….”

언뜻 보아도 높은 신분의 남녀가 갑자기 나타나서인지 ‘제나’라고 저를 소개한 어린 여자는 당황한 채 끊임없이 머리카락 끝을 손가락에 말았다가 풀었다가 했다.

“그게…… 어제저녁에 잠시 나가 봐야 한다며 나간 후로 돌아오질 않고 있어요.”

“어제저녁이라고요?”

로하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케이든은 창밖으로 주변을 날카롭게 돌아보았다.

적당히 한산한 곳, 작은 마을인 이곳에 특별히 다른 위험이 존재할 것 같지는 않았다. 다만, 언뜻언뜻 그를 유심히 바라보는 자들이 많았다.

“뭐라고 하면서 나갔는데요?”

여자는 저도 모르게 케이든을 쳐다보던 얼굴을 돌렸다.

“급하게 나가 봐야 한다고 그러더라고요. 밤에 들어오지 않는 일은 없는 친구였는데, 좀 이상해서 안 그래도 지금 다른 친구들이 찾으러 나간 참이에요.”

여자 여럿이 모여 사는 집은 낡았지만 깨끗하게 관리되어 있었다. 조디에 대해서는 들어 본 적이 없다고 했다.

“에밀리가 가족 이야기는 한 적 없나요? 남자 친구나…… 아니면 최근에 말했던 친구나 누구라도.”

여자는 침울한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무 말 없이 갑자기 사라졌다니.

안 좋은 신호였다. 로하나는 답답한 마음에 양손으로 이마를 짚고 고개를 숙였다.

생각해.

그때 로하나의 어깨에 손이 살짝 얹어졌다. 케이든이었다.

“잠시 둘러보죠.”

로하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후 햇볕이 따뜻해 밖은 눈이 녹고 있었다. 케이든은 마을 외곽으로 나가는 서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누군가 에밀리를 납치라도 했다면 이 방향으로 움직였을 겁니다. 문제는 어젯밤에는 눈이 계속 왔어서…… 아침에는 보다시피 이렇게 되었고요.”

로하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들이 다니는 길은 발자국과 마차 자국이 어지럽게 나 있었다. 그때 눈이 녹은 길 위에 뭔가가 눈에 들어왔다.

“제나?”

현관에서 옷을 챙겨 입고 나온 제나가 종종걸음으로 로하나에게 달려왔다. 심상치 않은 기색에 그녀도 시시각각 더 불안해지고 있었다.

“이거…… 혹시 알아보겠어요?”

끊어진 팔찌였다. 누군가가 팔목을 낚아챈 듯 여러 색 끈으로 꼬아 만든 팔찌의 매듭이 떨어져 있었다.

제나의 얼굴이 얼어붙었다. 대답을 들을 필요도 없었다. 케이든을 올려다보자 그도 같은 생각인 듯했다.

“제나, 에밀리 물건을 정리해 줘요. 최대한 빨리. 아니, 내가 하죠.”

로하나가 그대로 달려서 현관문을 열어젖혔다.

“에밀리 방이 어디니?”

창밖에서 안을 훔쳐보던 아이 중 하나가 놀란 눈으로 위층을 가리켰다. 방으로 뛰어 올라가자 <에밀리>라는 장식이 붙은 문이 보였다.

실종된 사람을 찾으려면 소지품부터 시작해야 했다. 케이든이 넓은 보폭으로 빠르게 뒤쫓아 왔다.

“에밀리한테 무슨 일이 벌어진 거예요?”

제나의 울먹이는 목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귓가로 케이든의 목소리를 흘려듣다가 로하나는 이렇게 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열었던 서랍을 쾅 닫았다.

“아무래도 무슨 일이 일어난 게 분명해요.”

로하나의 속삭임에 케이든은 고개를 짧게 끄덕였다.

“이렇게 놀란 상태에서 혼자 말을 타고 눈길을 달려가실 순 없습니다.”

흥분한 상태에서 고집을 부리려던 로하나는 잡힌 팔에 힘이 조금 들어가자 눈을 들었다. 침착한 흑안이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연락은 제가 전서구를 보내면 됩니다. 지금 당장 수색대를 보내라고 하죠. 그리고 전 우선 당신을 공작가로 모셔다드릴 겁니다.”

로하나의 큰 눈이 천천히 깜빡였다. 수긍하는 로하나를 보며 케이든은 천천히 손을 놓았다.

“그럼 그렇게 하죠.”

긴장한 목소리가 마르게 흘러나왔다.

*

노크 소리가 들렸다. 히스가 고개를 들자 이즈가 눈에 들어왔다.

“수도 쪽 상황이 좋아졌다며?”

“미지의 ‘하얀 새’가 나타나지 않고 있어. 황제 내외가 여기 노프탈로 이동한 직후부터 그렇다네.”

“역시 R. D.의 짓이 아니야.”

“응, 아무래도…….”

“떨어뜨리는 것이 폭탄이라는 증거도 없었고.”

히스가 펜대를 딱딱 책상에 두드리며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라자르가 한 말이 과장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케이든의 걱정이 지나친 것이 아니었다.

마물이 직접 움직이고 있었다.

문제는 그것들이 무엇을 원하고 움직이는지 알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자료를 조금 더 찾아볼게. 빌어먹을 초대 황제가 다 날려 버리긴 했지만…….”

이즈가 그녀답지 않게 경멸의 감정을 드러내며 중얼거렸다.

“그래, 그러자.”

그때 다급한 발소리가 멀리서 들렸다. 누가 들어도 심각한 소리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쾅 하는 소리가 연달아 들렸다. 문을 열고 누군가가 뛰어오고 있었다.

이즈가 조금 긴장하며 칼에 손을 가져갔다.

문이 대번에 열리는 순간, 갈레드의 놀란 얼굴이 두 사람의 눈에 들어왔다.

“뭐야, 어디서 이렇게.”

이즈가 혼을 내려는데 갈레드의 얼굴이 심상치 않았다.

“크…… 큰일 났습니다. 죄…… 죄인이, 조디가.”

히스가 미간을 좁혔다.

똑똑똑.

연달아 들려온 다급한 노크 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문 쪽으로 쏠렸다. 황궁군의 어마어마한 기세에 이미 누가 올지는 알 만했지만.

황제가 흥미롭다는 듯 미소를 띠었다.

“바쁜 하루가 될 거 같네.”

적갈색 머리카락에 대비되는 새파란 눈이 반짝였다.

히스는 입술을 깨물며 대충 인사를 올린 뒤 지하 감옥으로 뛰었다.

*

공기가 어수선했다. 말에서 내린 로하나는 직감적으로 뭔가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웅성웅성하는 소리, 심란한 사람들의 얼굴, 적대감이 가득한 눈동자가 로하나의 위아래를 훑었다.

히스가 먼저 지하 감옥 쪽으로 뛰어가는 것이 보였다.

설마.

설마 아니겠지.

차가운 공기가 숨을 들이쉴 때마다 가슴을 시리게 했다. 로하나는 급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다리가 저 혼자 움직이는 것 같았다. 케이든이 먼저 뛰어가는 것이 보였다.

다리가 이상하게 느리게 움직이는 것 같았다. 서둘러 움직이는데도 좀처럼 계단이 끝나지가 않았다.

이윽고, 지하 감옥의 철문이 열리는 소름 끼치는 소리가 귀에 울렸다.

“레이디.”

히스가 인파를 지나 다시 다급히 다가왔다. 케이든은 그 옆에서 차가운 얼굴로 한곳에 시선을 고정한 채 서 있었다.

“여기는 조금 이따가…….”

로하나가 손을 들어 히스의 말을 끊었다. 더 들어가려 하는 로하나 앞을 히스가 가로막았다.

“안 됩니다.”

“비켜.”

섬뜩하리만큼 차갑고 낮은 목소리에 모두가 그녀를 돌아보았다. 한 번도 이런 목소리로 말한 적 없었다. 히스마저도 그 눈빛과 목소리에 물러나고 말았다.

모두를 지나치니 눈앞의 광경이 보였다.

비현실적이었다.

조디는 자는 듯 보였다. 정말 자고 있는 것처럼 평화롭고 조용했다.

장소가 지하 감옥만 아니었다면 제 침대에서 자고 있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었다.

로하나는 가만히 그 옆에 앉았다. 눈으로 직접 보니 실감이 났다. 조심히 얼굴에 손을 가져다 대 보았다.

잠시 눈을 감고 앉은 그녀에게 사람들이 조심스럽게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눈물로 엉망이 된 마리였다.

“마님…… 인제 그만…….”

별안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로하나가 성큼성큼 발걸음을 뗐다.

“로하나!”

다급한 나머지 이름을 부르는 히스를 뒤로하고 로하나는 달리기 시작했다. 구두가 단단한 석조 바닥을 탕탕 울렸다.

“마님.”

사용인들이 머리를 조아리며 빠르게 길을 비켜 주었다. 망토 자락이 바람에 휘날렸다.

로하나의 걸음은 빠르고 단호했다.

걸음이 멈춘 곳은 이제는 본관보다 굳이 더 화려해진 별관이었다. 그 앞에 새로 지은 호화로운 유리 정원에 그녀가 있었다.

세상 평화로운 얼굴로 태연하게.

“어머.”

마치 놀란 듯한 목소리. 그 얼굴을 보니 더 확실했다. 사라진 에밀리, 죽은 조디, 말을 꺼내려다 말았던 그녀, 그리고 너무나 편안해 보이는 오렐리아.

“여긴 어쩐 일이에요?”

로하나의 발걸음 하나하나가 천천히 바닥을 지르밟았다. 중간중간 낀 살얼음이 바스러졌다.

“마님!”

멀리서 사용인들이 로하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로하나는 정원을 가로질러 걸었다.

돌로 가꾸어 놓은 길이 아닌 죽은 잔디밭을 밟고 온 그녀를 보며 오렐리아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날도 추운데…… 말이라도 탄 모양이네?”

위아래로 로하나의 옷차림을 훑은 황후가 낭랑하게 물었다. 말이 없는 로하나를 보며 오렐리아는 피식 웃더니 사람들을 물렸다.

“추운데 들어오겠나?”

문이 열리고, 조용히 닫혔다. 한겨울에 붉은 튤립이 가득했다. 바깥 소리까지 차단되어 조용했다. 이상하리만치 기이했다.

“열심히 달려갔다 온 모양인데 아쉽게 되었어.”

오렐리아는 몸서리를 치며, 눈썹을 슬픈 모양으로 일그러뜨렸다. 잔뜩 겁에 질린 목소리와 달리 황금빛 눈동자는 전에 없이 반짝였다.

가녀린 손이 아무렇지도 않게 막 피어난 탐스러운 튤립을 향했다. 귓가에 울리는 목소리에 뭔가가 속에서 탁하고 끊어졌다.

“당신…….”

로하나 하노버로 살면서, 최대한 이 세계관에 맞춰 왔다. 늘 그렇게 살았었다. 과거에도, 지금도, 조금 전까지도.

“뭐?”

성큼 다가간 그녀를 오렐리아가 올려다보았다. 거의 부딪칠 기세였지만 아무도 물러설 생각은 없어 보였다.

“너 같은 사람을 내가 아주 자주 봤어.”

“지금 너라고…….”

조금 당황한 오렐리아의 목소리를 낚아채며, 로하나는 계속했다.

“잘 들어.”

로하나가 허리를 조금 숙여 눈높이를 맞췄다.

“내가 당신 같은 사람들 때문에 예나 지금이나 치가 떨려.”

속삭이는 목소리에 오렐리아는 조금 놀란 듯했으나,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이내 평정을 되찾았다. 막 입을 열려는 그녀를 오렐리아가 막았다.

“치가 떨려? 무슨 대단한 삶을 살았다고 감히 내 앞에서 이때 저 때 하는 거야?”

목소리는 태연했지만 일그러진 얼굴은 본심을 드러냈다.

“왜 이렇게 유난이야? 고작 시녀가 죽은 정도로. 너희 아린족들이 신경 쓸 일이 아니잖아?”

굳이 숨길 생각도 없다는 듯 오렐리아의 목소리에는 비꼼과 놀림이 가득했다. ‘고작’이라는 단어에 힘을 주는 오렐리아의 한쪽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하노버면 그답게 굴어. 어설프게 착한 척하는 것 안 피곤한가?”

피식, 로하나도 따라 웃었다. 핏대가 선 눈에는 물기가 어려 있었다.

“하노버가 아니라…….”

로하나가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델클리프.”

짝, 소리가 나며 로하나의 고개가 돌아갔다.

“말버릇이 건방지네.”

로하나가 돌아간 얼굴을 아무렇지 않게 제 위치로 돌렸다.

“감정적이시네.”

힘이 없어도 너무 없잖아. 로하나는 멈추지 않았다.

“고작 그 수준으로 잘도 이런 짓을 벌였어.”

입술을 깨문 황후의 황금빛 눈에 처음으로 본심이 번뜩였다.

“편하게 지내.”

로하나가 천천히 몸을 기울여 귓가에 속삭였다.

“곧 불편해질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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