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
어느 정도 달리다 보니 시내가 나타났다. 속도를 조금 늦춘 케이든이 로하나를 불렀다.
“로하나.”
“네.”
로하나가 케이든을 따라 속도를 늦추면서 돌아보았다. 새하얀 털로 마감한 망토 모자 아래로 추위에 발갛게 상기된 뺨이 돋보였다.
노프탈 시내의 사람들은 쨍한 겨울 햇살 아래에서 바쁘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식사는 하셨나요.”
의외의 말에 로하나의 눈동자가 동그래졌다. 그러고 보니 어젯밤부터 한숨도 자지 않고, 이 시간까지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간단하게 뭐라도 먹죠.”
케이든이 다 안다는 얼굴을 하며 부드럽게 말했다.
“그렇지만…….”
“그렇게 가시다 쓰러집니다.”
망설이는 얼굴을 보니 로하나를 그대로 두면 안 될 것 같아서 케이든은 말에서 내려 버렸다. 그리고 알비의 고삐를 쥐었다.
“잠깐이면 됩니다.”
케이든은 능숙하게 익숙해 보이는 곳으로 들어갔다. 의외로 그가 찾아 들어가는 곳은 작고 좁은 가게였다. 투박한 나무 문이 덜컹 소리를 냈다.
“어서 오시게.”
주인장으로 보이는 우락부락한 사내가 나오다가 움찔했다. 그러더니 이내 아무렇지 않게 잔을 닦으며 내려놓았다.
“누구신가, 엄청나게 예쁘시네.”
로하나는 갑작스러운 칭찬에 어색한 미소를 띠며 천천히 케이든의 뒤를 따라 걸었다.
“아침 식사 두 개.”
케이든이 조용히 주문을 하자 주인장은 안쪽을 향해 다시 크게 주문을 외쳤다.
로하나는 실내의 후끈한 열기에 모자를 내렸다. 정말 오랜만에 보는 보통 사람들의 아침 풍경이었다.
다들 다양한 옷차림으로 왁자지껄하게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다. 안 좋은 일로 외출한 것이 아니었다면 들뜨고도 남을 만큼 반가운 모습이었다.
잠시 상념에 젖은 로하나를 깨운 것은 케이든의 목소리였다.
“드십시오.”
정말 앉자마자 바로 나온 식사였다. 간단한 토마토 셀러리 수프에 호밀빵과 버터, 그리고 그릴에 구운 소시지였다. 소박한 밥상에 반가운 미소가 나왔다.
로하나는 굳이 생선 요리까지 꼭 구비해 놓던 저택의 저녁 만찬 차림이 생각났다.
“가서는 아무래도 식사가 어려울 것 같아서.”
식사 정도야 걸러도 그만이었지만, 왜 그곳에 가면 식사가 어렵다는 건지 의문이었다. 하지만 로하나는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케이든의 사무적인 말투는 몇 시간 전의 엄청났던 긴장을 잊은 듯 태연했다. 그 덕에 어색한 것도 있고 로하나는 의욕적으로 음식을 씹어 삼켰다.
오랜만에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어서 그런지 식욕도 솟는 듯했다.
“얼마나 더 가면 되나요?”
“정말 금방입니다. 노프탈 바로 외곽이라.”
케이든이 편안하게 대답했다.
“정오가 조금 넘어서 도착할 겁니다.”
로하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빠르게 그릇을 비워 냈다. 그런 그녀를 잠시 물끄러미 보던 케이든의 눈에 무언가가 거슬렸다.
“로하나.”
“네?”
“언제 마지막으로 잤습니까.”
“그렇게 티 나요?”
“어제는 절대 안 주무신 것 같고.”
케이든이 천천히 얼굴을 가까이했다. 새삼 그의 얼굴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유난히 곧고 강한 콧대와 턱선이 아침 햇살에 비쳤다.
“그저께는 그 아이 일로 상심해서 못 주무셨을 것 같고.”
수면 부족이긴 했다.
“사람이 이틀 연속으로 잠을 못 자면 어떻게 되는지 아십니까.”
로하나가 시선을 떨구었다.
“이런 상태로 혼자 말 타는 건 위험합니다. 저와 함께 타십시오.”
“아뇨, 그렇게 안 해도…….”
“길이 험해질 겁니다. 그 와중에 낙마라도 하면 정말 곤란합니다. 지금 서둘러야 하는 것 아닌가요?”
케이든의 말에 틀린 것이 없었기에 고집을 부리던 로하나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럼, 신세 좀 질게요.”
“알비는 똑똑해서 알아서 잘 쫓아오니 걱정하지 마시고.”
로하나는 따뜻한 물을 후루룩 마시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실까요.”
케이든이 벌떡 일어서더니 저 혼자 앞서 걸었다. 로하나는 그런 그를 바라보다 서둘러 걸음을 뒤따랐다.
*
“그래서 잘 전달했고?”
오렐리아가 황금물결 같은 머리카락을 빗어 넘기면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네, 걱정하지 마셔요.”
샤톤웰 힉슬리 후작의 먼 친척 조카인 시녀 아이, 로리앤이 말했다. 짙은 회색 곱슬머리를 수도의 유행에 맞게 우아하게 올린 모양새였다.
“어제 음식을 넣고 나서 로하나를 만났었다고?”
“복도에서 인사만 드렸습니다.”
“뭐…… 괜찮아?”
“물론입니다.”
“아, 그런데 왜 아직도 소식이 없을까아.”
오렐리아가 짜증 어린 투정을 부렸다. 백금으로 마감한 거울 안의 미녀가 못마땅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가 봐.”
오렐리아는 아침에 본 케이든을 떠올렸다. 무엇에 그렇게 화가 나 성큼성큼 걸어 나갔을까.
바르디의 아까 행동이 불안했지만, 그에게 들키지만 않으면 충분히 괜찮을 것이었다.
오렐리아는 최소한의 시녀만을 거느린 채 케이든의 집무실 문을 두드렸다.
시종들의 보고를 기다리자 문이 열리고 그가 늘 앉는 책상 앞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그새 밀린 일이 많았겠지. 그는 항상 바빴다. 오렐리아는 조금 우쭐해지는 기분에 사람들을 물리고 그 앞에 앉았다.
아침과는 달리 은발을 깔끔하게 올리고 짙은 남색 예복까지 걸친 그의 가슴에서 은색 휘장 장식이 반짝였다.
“공작님.”
“존칭을 생략하십시오, 황후 폐하. 델클리프 공작이면 충분합니다.”
서류에서 아주 잠깐 시선을 들었던 그는 다시 책상 위로 눈을 돌렸다.
“무슨 일이십니까.”
“난 샹들리에 건 이해해.”
그제야 그의 시선이 서류에서 그녀에게로 온전히 옮겨졌다.
“마력의 흔적이 남으면 또 카르크족을 탄압할 증거로 쓸 테니까 미리 손을 쓴 거지?”
“그 일에 황후 폐하도 관여되어 있었다는 것까진 몰랐네요.”
오렐리아가 물끄러미 그런 공작을 바라보았다. 늘 낯설고 먼 사람이었지만 오늘따라 유난히 뭔가 달랐다.
“그럼 이번 로하나 암살 시도 건도 덮어야 맞는 거 아닌가.”
나름 정곡을 찌르는 황후의 질문에 케이든은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R. D.를 만나고 왔습니다. 라자르를.”
그 이름에 오렐리아가 움찔했다.
“로하나를 기폭제로 쓰려는 생각이더군요.”
“그래서 공작님의 선택은요?”
케이든이 한쪽 눈썹을 치켜떴다.
“기껏 황후까지 되었는데 전쟁이 나면 좋을 것 없지 않겠습니까. 당연히 그런 것 따위 없게 해야지요.”
상처에 소금물을 끼얹는 심리가 그런 것인지, 오렐리아는 두려우면서도 다시 입을 열었다.
“전쟁을 하기 싫은 거예요, 로하나가 죽는 게 싫은 거예요?”
케이든의 눈이 가만히 오렐리아를 바라보았다.
“그거야 당연히…….”
늘 굳게 다물어 감정을 숨기는 입술과 짙고 깊은 흑안에 다른 뭔가가 흘렀다.
“후자겠죠?”
황금빛 눈에 생기가 흐려졌다.
“어떻게 다른 사람도 아니고 당신이 아린족 하나 죽는 걸 가지고…….”
“두 가지 질문드려도 되겠습니까.”
말을 자르며 들어오는 예상 밖의 질문에 오렐리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공작은 펜을 내려놓더니 양팔을 책상 위에 올렸다. 넓은 어깨 너머로 햇살이 비쳐 그림자가 졌다.
“조디라는 아이를 아십니까?”
“그 방화범이요? 제가 더 알 게 뭐가 있겠어요.”
그 정도로 대답할 줄 알았다는 듯, 케이든은 냉정한 시선조차 금세 거뒀다. 오렐리아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 또 하나는…….”
케이든이 두 손을 마주 잡으며 고개를 조금 기울였다.
“여기에서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케이든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오렐리아는 아랫입술을 깨물면서 케이든을 노려봤다. 10년 넘게 그러려니 했던 강철 같은 벽이 오늘따라 이상하리만큼 화가 났다.
“그걸 정말 몰라요?”
“네, 모릅니다. 그리고 전 지금 나가 봐야 해서.”
오렐리아가 뭔가 말을 하려 입을 열자 낮은 목소리가 오렐리아의 말을 막았다. 무슨 말을 할지 충분히 안다는 얼굴은 냉정했다.
“제국의 황후인 당신으로서도 전쟁은 막으려 애써야 맞지 않습니까.”
케이든이 날카로운 턱을 기울이며 그렇지 않으냐는 눈빛을 했다.
“오렐리아.”
예전같이 이름을 부르는 그의 목소리에 오렐리아는 몸을 떨었다. 눈물이 찬 황금빛 눈을 미동 없이 바라보며 케이든은 차분한 목소리로 계속했다.
“사소한 치기는 그만둬. 이러는 것이 너에게 무슨 득이 되지?”
“알아, 당신은 날 사랑한 적 없다는 거.”
결국 나온 말에 케이든은 눈을 질끈 감았다가 가늘게 떴다. 길고 곧은 손가락이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알면서 지금 굳이 다시 나한테 와 있는 이유는?”
“전쟁은 못 피해. 누가 봐도 오늘내일 일이야.”
케이든이 미간을 좁혔다. 보석 같이 빨려들 것 같은 짙은 눈동자. 짙고 검은 흑안은 자세히 보면 묘하게 여러 빛깔이 섞여 있었다.
오렐리아는 자신의 황금빛 눈과 그 눈이 참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었다. 오렐리아는 목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그리고 당신은 내가 필요할 거야.”
케이든의 눈을 보기가 무서워 오렐리아는 빠르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 앞에서는 시녀 로리앤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가 눈으로 묻자 로리앤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렐리아의 입꼬리 한쪽이 피식 올라갔다.
어디 두고 봐요.
오렐리아는 조용히 속으로 말을 삼켰다.
당신은 내가 필요하게 될 거야.
자신감 있는 발걸음에 굽이치는 머리카락이 율동감 있게 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