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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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도를 지나던 바르디의 눈에 오렐리아의 뒷모습이 보였다.
나선형 계단 맨 위에 위치한 통로는 별관과 본관을 연결하는 곳이었다. 그 계단 난간에 기댄 채 오렐리아는 뭔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오렐리아, 뭐 하고 있어?”
오렐리아가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아니에요, 폐하.”
눈앞의 아름다운 여인이 말했다.
살굿빛 드레스에 보석같이 반짝이는 황금빛 눈이 더 돋보였고, 찰랑거리는 금발은 아름답게 땋아 올려져 있었다. 도자기같이 희고 티 없이 아름다운 얼굴, 완벽한 몸이었다.
그때, 쾅 하고 무거운 문이 닫히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도서관 쪽이었다. 바르디가 시선을 돌리자 케이든이 시야에 들어왔다.
겨우 셔츠 한 장을 입고 흐트러진 모양새로 그는 빠른 걸음으로 걷고 있었다. 갈레드가 서둘러 뒤에 붙더니, 지시를 받았는지 다시 도서관 문 앞에 섰다.
오렐리아의 시선이 그쪽을 향했다 다시 돌아왔다.
아무것도 아닌 그 행동에 바르디는 그제야 흐렸던 그림이 선명해졌다. 애초에 내내 둘이 붙어 있었던 건 케이든 때문이 아니었다.
실비우스의 허튼 보고에 짜증이 치밀었고 본인의 멍청한 판단에는 부아가 치밀었다.
<형이 좋아하는 장난감 탐내는 어린애도 아니고.>
어제 로하나가 내뱉었던 말이 귀에 윙윙거렸다.
그때 케이든이 쾅 하며 제 방의 문을 닫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오렐리아의 곁눈이 거기까지 보다가 다시 돌아왔다.
하, 하고 기가 찬웃음을 짓는 바르디를 오렐리아가 올려다보았다. 순진무구한 황금빛 눈이 여느 때처럼 반짝거렸다.
“폐하, 저희 오늘 오후에는 시내에 같이 나가 보지 않으실래요? 예쁜 것이 엄청 많은데…….”
낭랑한 목소리에, 생글생글한 눈웃음. 바르디는 그에 맞춰 차분히 웃음을 지었다.
로하나의 통찰력에 감복하고, 저의 멍청함에 짜증이 치밀면서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오렐리아.”
바르디가 귓가에 속삭이자 오렐리아는 여느 때처럼 사르르 웃었다.
“그만해.”
오렐리아의 입가가 딱딱하게 굳었다.
*
<나는 당신을 못 해쳐.>
로하나는 저도 모르게 참고 있던 숨을 내쉬었다. 긴장을 풀고 고개를 숙이자 등 뒤에 얌전히 내려와 있던 머리카락이 앞으로 쏟아졌다.
손으로 머리카락을 대충 뒤로 넘긴 로하나는 눈자위를 꾹 눌렀다.
이렇게 아무렇게나 하고 있는 공작 부인이 어디 있담.
어젯밤을 통째로 새워서 안 그래도 정신이 없는 마당에 케이든의 반응과 말은 그녀를 더 혼란에 빠뜨리기에 충분했다.
<그런 표정 할 것 없습니다.>
그의 시선이 지금도 남아 있는 듯 움직일 수가 없었다.
<믿지 않는대도 나는 상관없으니까>
다시 심장이 제멋대로 쿵쾅거려 로하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렇게 하면 그 말이 마치 다른 말로 기억되기라도 하는 것처럼.
케이든 델클리프가.
정말로 저를 계약 결혼한 상대 이상으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예전의 그녀였다면 그가 어떤 마음일지 알고, 믿어 버릴 것만 같았다. 그러나 상대는 케이든이었다.
복수로 움직이는 그가 아린족인 하노버의 딸에게 그렇게까지 감정을 가진다고?
그들 사이의 연결 고리란 어릴 적 스친 우연에 불과했다. 짙은 인연이었다고 여기기에는 흐른 세월과 걸어야 할 길이 서로 너무 달랐다.
친절했던 것도 알았고, 어느 정도 빚진 마음으로 배려해 준다는 것도 알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강자가 약자에게 쉽게 던져 주는 배려에 해당한다고 생각했다.
그 모든 것도 결국 아린족이 마력을 사용하는 것이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라고 이해하고 밤을 지새우며 공부를 했다.
‘믿지 마.’
로하나는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아니지. 제발 그 정도에 의미를 부여하지 마.’
이제는 얼굴도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전생의 남편과도, 여기에서 세상 천진난만한 연애를 누렸었던 황제와도 어이가 없게 박살 났던 그것.
설령 어떤 마음이 지금 있든, 그건 곧 변할 것이다. 심지어 원작의 궤도 아는 자신이 이 정도에 휘둘려서는 안 된다고 로하나는 거듭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똑똑.
그때 도서관 중문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자 갈레드가 상기된 얼굴로 서 있었다.
드르륵, 문을 열고 들어온 갈레드는 조심스럽게 그러나 저도 모르게 투박하게 편지를 내려놓았다.
“답신이 벌써 왔습니다.”
로하나의 눈동자가 서신의 문장에 고정되었다.
<세인트헬레나 보육원>
다급하게 편지를 뜯은 로하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지금 공작께서는 어디 계신가.”
“지금은 내실에 계신 걸로 압니다.”
로하나는 걸음을 서둘렀다.
*
“말씀하십시오.”
케이든은 침대에서 로하나를 비스듬히 올려다보았다. 아까보다 미묘하게 붉어진 얼굴과 긴장한 턱이 눈에 들어왔다.
케이든은 아까의 흥분을 완전히 씻어 낸 얼굴로 로하나를 바라보았다.
“알아낸 게 있어요.”
그의 표정이 태연한 걸 보고 도리어 안심을 했는지 로하나는 조금 밝아진 얼굴로 다가왔다.
케이든이 앉아 있는 침대에 나란히 앉더니 읽던 서신을 건넸다. 생각보다 붙어 앉게 되어 허벅다리가 살짝 맞닿았지만 로하나는 신경 쓰는 눈치가 아니었다.
빠르게 서신을 읽은 케이든이 입을 열었다.
“그래서, 이 ‘에밀리’라는 사람은 누굽니까.”
“이 주소, 여기서 멀지 않죠?”
“바로 근처입니다.”
잠시 망설이는 듯했지만, 빙빙 에둘러 말할 의미가 없다고 느꼈는지 로하나는 입을 열었다.
“조디가…… 불을 낸 데 다른 이유가 있는 것 같아요.”
케이든은 그게 도대체 무슨 말이냐는 눈으로 로하나를 바라보았다. 로하나는 그제야 가까운 거리를 의식했는지 조금 떨어져 앉았다.
그러고 보니 막 갈아입은 셔츠의 단추를 채우지 않아서 평상시보다 목덜미와 빗장뼈가 깊게 드러나고 있었다.
“R. D.인 조디가 당신 능력을 알면서 굳이 불을 지른 건 이상하지 않아요?”
그건 이미 이야기한 내용이었다. 로하나가 이어서 말했다.
“당신을 부르려고 일부러 불을 지른 거냐고 물어봤어요.”
케이든의 눈매가 절로 날카로워졌다.
“뭐라고 하던가요.”
로하나는 고개를 저었다.
“하필 그때 오렐리아 황후가 들이닥쳤는데, 입을 다물더라고요. 이상하지 않아요?”
이미 오렐리아에게 적의가 가득한 목소리에 케이든은 잠시 걱정스레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말에 일리가 있었다.
“할 말이 없었던 게 아니고요?”
“그런 눈치가 아니었어요.”
로하나는 확신에 차 말했다.
“혹시 약점을 붙잡혀서 배후나 관련자를 실토하지 못하나 싶어서 조사를 좀 했는데.”
“이 사람이 단서다 이건가요?”
로하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조디가 후원하는 보육원에서 모든 생활비와 교육비까지 받는 아이예요. 조디보다 조금 어린데…… 아무래도.”
케이든은 낮게 흠, 소리를 냈다.
“확인하죠.”
로하나의 얼굴이 조금 밝아졌다.
이렇게 살짝이라도 웃는 모습을 본 적이 언제던가. 그럭저럭 예의상 웃어 보일 때 말고, 안도의 웃음을 짓는 것을 본 적이 있긴 하던가.
그의 마음이 가라앉았다.
“고마워요.”
케이든은 고개를 끄덕이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럼,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저도 같이 가요.”
자리에서 일어나는 로하나가 드레스 자락을 정리하며 말했다. 미묘하게 친숙한 행동에 가라앉았던 그의 가슴이 다시 조금 부풀었다.
“그리고 여긴 제가 다녀올게요.”
“당신은 여기 계십시오.”
“다녀오게 해 줘요. 여자아이인데, 제가 가는 게 덜 놀랄 거예요. 아마 조디에 대해서 더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도 있고요.”
“안 됩니다.”
“케이든.”
“로하나.”
“마력도 배울 거고, 앞으로 같이 일하기로 했잖아요. 이 정도 일은 나도 할 수 있어요.”
더 이상 불허했다가는 화를 낼 분위기였다.
로하나의 고집에 케이든은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가 내려놓았다.
“같이 다니면 위험을 걱정할 건 없을 것 같은데…….”
물리적 위험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었다. 답답한 마음에 케이든은 한숨을 쉬었다.
사실 그녀가 어디를 가든 무엇을 하든 그건 그녀의 자유였다. 예의 차원에서 허락을 구하는 그녀에게 더는 안 된다고 할 구실이 없었다.
“히스에게 말해 둘 테니 잠시 타고 가실 말에 익숙해지고 계십시오.”
무뚝뚝하게 나온 말에도 그녀는 일전보다 조금 더 큰 미소를 짓더니 몸을 돌려 앞장서 나갔다.
순간, 케이든은 그녀가 정말 하하, 하고 크게 웃는다면 얼마나 좋을까 상상했다.
“네, 천천히 나오세요.”
*
히스는 의외의 말을 들으며 말 옆에 기대섰다. 로하나는 케이든이 심사숙고해서 고른 젊고 튼튼한 말, 알비를 쓰다듬고 있었다.
승마복에 카키색 망토를 두른 그녀는 허리까지 오는 윤기 나는 머리카락을 한 갈래로 높게 묶고 있었다.
“그래서, 레이디와 여길 잠깐 다녀온다고?”
히스의 목소리에는 친구인 케이든만이 알 수 있는 부담이 배어 있었다.
“해 지기 전엔 돌아올 수 있을 거야.”
케이든이 여유롭게 말했다.
“내가 갈게.”
케이든이 말하며 검은 가죽 장갑을 끼웠다.
“아니야, 내가 갈게. 거긴 악스톤을 유난히 따르던 곳이잖아. 노프탈 외곽이라고.”
히스의 말에 케이든의 손이 움찔했다.
“굳이 신분을 드러내지 않으면 잘 모를 거다.”
“그럴까, 과연.”
케이든은 대답 없이 긍정의 눈빛을 하며 말에 올라탔다. 그러자 그새 친해진 알비를 데리고 로하나도 가까이 왔다.
“그럼 다녀올게요.”
로하나가 망설임 없이 말에 올라타며 말했다.
“조심하십시오.”
히스는 알비의 눈을 확인하며 말하고는 로하나를 올려보았다.
“네.”
보일 듯 말 듯 한 미소를 보인 그녀가 먼저 앞장서 달리고, 케이든이 그 뒤를 따랐다.
넓은 초원에 새하얀 눈이 내려 절경을 이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