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
쾅 소리를 내며 도서관 문이 열렸다. 갈레드가 당황한 채 뒤에서 쭈뼛거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로하나는 태연한 얼굴로 급하게 들어온 공작을 바라보았다. 눈보라가 심한지 은발이 젖어 있었다.
“오셨어요.”
케이든은 입을 떼서 뭔가를 말하는가 싶더니 깊은숨을 몰아쉬면서 문을 닫았다.
“할 일이 좀 있어서요.”
알아서 대답한 로하나의 무던한 목소리에 케이든은 그녀에게 천천히 걸어왔다.
“침실은…….”
“침실이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되묻는 로하나를 보며 케이든은 그냥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닙니다.”
“무슨 일 있나요?”
케이든의 시선이 잔뜩 쌓인 책으로 돌려졌다. 마력에 관한 기본적인 책부터, 아무도 보지 않을 것 같은 고서까지 다양한 자료가 쌓여 있었다.
케이든은 눈썹을 올리며 로하나를 쳐다보았다.
“시리율한테 고집을 좀 피웠어요. 나도 여기 안주인이니 이 정도는 할 자격이 있다고 봤고요.”
케이든은 그러냐는 듯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로하나는 그런 그를 바라보다 결심한 듯 숨을 내쉬었다. 숨바꼭질은 이제 그만할 시간이었다.
“잠시 앉으시죠.”
책상에 잔뜩 쌓인 책과 자료집을 옆으로 밀었다. 케이든의 무거운 부츠와 절그럭거리는 무기들의 금속 소리가 넓은 도서관에 울렸다.
망토를 벗어 옆의 의자에 대충 걸치던 케이든의 움직임이 로하나의 담담한 목소리에 멈췄다.
“뭘 들키지 말라고 한 거죠?”
시선을 돌려 본 그녀의 얼굴은 아침 햇살을 받았는데도 그늘이 져 있었다. 한숨도 자지 않은 듯 얼굴이 창백하고 푸석했다.
“뭐라고요?”
“그때, 뭘 들키지 말라고 한 거예요?”
로하나의 질문은 태연하고, 조용하고, 침착했다. 마치 아침 식사는 뭐로 하겠냐는 질문처럼.
케이든의 턱이 딱딱하게 굳었다. 짙은 눈이 뚫어질 듯 로하나를 쳐다보았다. 달빛에서 마주쳤던 소년 소녀가 아침 햇살 아래 다시 마주 보고 있었다.
“미안해요, 이렇게 얘기하고 싶진 않았는데.”
로하나가 눈을 내리깔았다.
이제 숨바꼭질은 그만하죠.
속으로 나오던 말은 입을 떠나지 않았다. 케이든은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언제부터입니까.”
“얼마 안 됐어요.”
침묵이 흘렀다.
“오늘 보고 온 사람은 혹시 R. D.일까요?”
사무적으로 묻는 목소리에 케이든은 조용히 머리를 쓸어 넘겼다. 눈에 젖은 머리카락이 흐트러졌다.
“제가 죽어 줘야…… 이래저래 전쟁을 일으키기 유리하다 뭐 그런 소릴 했겠죠?”
어렵지 않은 추측이었다. 원작을 아니까. 그들이 무슨 생각인지 훤하니까. 케이든의 얼굴이 험악하게 굳어졌다.
“R. D.의 수장 라자르를 보고 왔고, 당신이 예상한 대로 그쪽에서는 당신의 죽음을 원합니다. 양쪽을 자극하기에 좋은 대상이니까.”
로하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터놓고 이야기하니 속이 다 시원했다. 진작 이렇게 했어야 했다고, 쓴웃음을 지은 로하나는 다시 케이든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공작님은 절 어떻게 하고 싶으세요?”
담담한 목소리를 내는 로하나를 케이든은 빤히 바라보았다. 새카만 눈동자가 햇살을 받자 미묘하게 여러 빛깔로 빛났다.
“사람이 참 일관적이시네.”
케이든의 말투에는 어떤 감정인지 알 수 없는 묘한 뉘앙스가 섞여 있었다.
“일전에 저를 살려서 보낼 때도 그렇고.”
그때를 떠올리니 로하나의 몸이 절로 움찔했다.
케이든은 망토에 이어서 가죽끈으로 매인 갑주를 풀었다. 무두질한 가죽끈을 손으로 끄르는 소리가 신경질적으로 울려 퍼졌다.
갑주를 벗어 던진 케이든은 셔츠만 입은 채 로하나를 쳐다보았다. 이 추운 날에도 땀이 났었는지 셔츠가 넓은 가슴에 조금 붙어 있었다.
“그 시녀에게 칼을 쥐여 주질 않나.”
그가 큰 숨을 내쉬자 너른 가슴이 올라갔다 내려갔다. 화가 뿜어져 나오는 것이 보이는 듯했다.
“저한테 이렇게 다 털어놓지를 않으시나.”
낮은 목소리가 중얼거렸다.
“제가 여기에서 당장에라도 당신을 죽이면 어쩌려고 카드를 다 보이십니까. R. D.가 원하는 대로 해 버리면?”
깊게 몸을 숙인 그가 닿을 듯 그녀에게 얼굴을 가까이했다.
“갖은 똑똑한 척은 다 하더니…….”
보랏빛 눈동자에 핏대가 섰다. 두려운 것은 아니었다. 로하나는 알 수 없는 긴장감에 숨을 골랐다.
“배우질 못하십니다.”
“아니.”
하, 케이든이 헛웃음을 지었다. 믿을 수가 없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럼 이 상황도 당신이 통제하고 있다…… 뭐 그런 건가? 그 시녀 때처럼?”
“당신도 나 못 죽여.”
로하나의 눈이 깜빡이지도 않고 케이든을 응시했다.
“그 이유나 들어 볼까요?”
케이든도 똑같은 눈빛으로 로하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지금부터 당신에게 괜찮은 제안을 할 거니까.”
케이든의 미간이 좁혀졌다. 어째서 그녀와 이런 이야기를 이런 분위기에서 하고 있는 건지, 속에서 분노가 휘몰아쳤다.
어째서.
왜 이렇게 된 것일까.
“계속하시죠.”
그러나 내뱉는 목소리는 태연했다.
“저를 쓰세요.”
케이든의 미간이 좁혀졌다.
“죽이지 말고, 무기로 써요.”
로하나는 최선을 다해 태연함을 가장했다. 그의 얼굴을 보니 태연함을 집어 던지고 싶기도 했지만 로하나는 천천히 책을 당겨 왔다.
시리율이 보물처럼 모시고 있는 유서 깊은 마법 기본서였다. 로하나는 책갈피를 집어 책을 펼쳐 들었다.
“아주 드물게 카르크족이 아닌 자가 마법 능력을 갖춘 경우, 오히려 그 역량이 대단히 막강하고 예측하기 힘들어 위험할 수 있다는 기록이 있다.”
어두워진 보랏빛 눈동자가 책 너머로 빛났다.
“혹자는 성자의 능력까지 이르기도 한다고 말하나 전해지는 증거는 부족한 상황이다.”
탁, 하고 책 내려놓는 소리가 침묵을 깼다.
“나를 키워 줘요.”
어두워진 얼굴을 보며 로하나는 계속했다.
“전쟁에서 이겨야 되는 것 아니에요? 만약 일어난다면 말이죠.”
쓸데없는 반박을 막겠다는 듯 로하나는 말을 이었다.
“싸우면 질 확률이 높다는 거 이미 알고 있죠?”
원작의 지식이 이럴 때 도움이 된다는 건 씁쓸한 일이었다.
“나를 써요. 계약 기간까진 당신 편에 서죠. 아린족이 카르크족의 편에 서는 것이니 사상적으로 활용하기에도 좋은 사례가 될 거예요.”
케이든의 조각 같은 얼굴이 표정 없이 굳었다.
“그리고 계약이 끝나면 나는 떠날게요, 약속대로.”
“당신이 나를 배신하지 않는다는 보장은?”
“‘맹세’를 하죠.”
로하나가 하는 말에 케이든의 눈이 가늘어졌다.
“밤새 공부를 많이 하셨네.”
“네, 넘치는 게 시간이라.”
로하나가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
“당신은 나를 키워 주고, 나는 당신을 돕습니다, 계약 종료 시까진. 계약이 끝나면 난 아르드골드를 떠나요.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마시고요.”
로하나가 빠르게 읊었다.
“죽여서 질 확률이 높은 전쟁을 하느니 이렇게 쓰는 게 훨씬 남는 장사 같은데, 아닌가.”
조용히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케이든의 눈이 번뜩였다.
“‘맹세’라는 게 뭔지 정말 알고 그럽니까.”
“어기면, 영혼도 영원히 불탄다고 하죠. 알아요, 저주이자 금단의 마법이죠.”
로하나가 잠시 시선을 떨궜다가 다시 들었다.
“나는 죽고 싶지 않아요. 그리고 나한테 있는 이 특이한 능력이 나한텐 아주 유용할 것 같고. 필요하다면 ‘맹세’든 뭐든 할게요.”
로하나가 목을 가다듬었다.
“결국 우리가 처음에 했던 계약과 크게 다르지 않아요. 단지 주고받는 것이 조금 늘어났을 뿐.”
케이든의 얼굴은 당장에라도 소리를 지를 듯하면서도, 아무 표정 없이 무감하기도 했다. 잠깐이지만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좋습니다, 당신을 쓰죠.”
케이든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로하나가 조금 숨을 내쉬었다.
“그렇지만 ‘맹세’는 하지 않겠습니다.”
말을 마친 케이든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잠깐만.”
로하나가 급히 그 앞을 가로막았다.
“뭐예요, 그게.”
케이든의 흑안이 제 바로 앞에 선 로하나를 내려다보았다. 그가 굳게 다물었던 입을 천천히 뗐다.
“마력은 당신 자유고 능력이니 뜻대로 하십시오.”
단호한 목소리였다.
“계약은 유지합니다. ‘기존’대로만.”
“그건…….”
“그쯤 하지.”
케이든이 한 걸음을 더 뗐다. 당장에라도 몸이 닿을 듯 가까워졌다. 차가운 눈보라와 땀의 열기가 뒤섞인 향이 어지러웠다.
“당신은 결국 여전히 옛 버릇대로 군 거야. 무모하게 패를 다 내보이면서 도박을 하다니. 그것도 며칠을 못 참고.”
집요한 시선에 로하나는 눈을 돌리지도 못했다.
“뭐…… 이번에는 그 방법이 제대로 먹혔지만.”
두 눈이 옭아매듯 로하나를 끌어당겼다.
“당신이 이겼어.”
로하나의 심장이 터질 듯이 뛰었다. 케이든의 낮은 목소리가 귓가를 타고 가슴에 박혔다.
“나는 당신을 못 해쳐.”
보랏빛 눈동자 안에서 흔들리던 빛이 멈췄다. 로하나는 이를 악물었다.
“나는 당신을 못 해쳐. 믿을 것 같지는 않지만.”
케이든은 뭔지 모를 뜨거운 감정을 억누르고 낮디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케이든의 눈이 로하나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꽉 다물었던 입술 사이로 밭은 숨이 새어 나왔다.
얼마나 지났을까, 자조적인 미소를 지으며 케이든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 표정 할 것 없습니다.”
조심스럽게 올라온 단단한 팔이 흐트러진 로하나의 흑발 끝을 가볍게 스쳤다.
“믿지 않는대도 나는 상관없으니까.”
훅하고 그가 멀어지자 주변 공기가 차가워졌다. 문이 닫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