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
“그녀가 빨리 죽어 줘야 해.”
라자르의 소년 같은 목소리가 얼음 계곡에 울려 퍼졌다. 웃고 있는 입과는 달리 반짝이는 홍안은 슬픈 빛을 띠었다.
“미안하지만, 그건 안 되겠는데.”
케이든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이건 협상 불가였다. 선을 넘어도 한참 넘었다.
“꼭 결정권이 너에게 있는 것처럼 들리는군.”
케이든이 어둡게 가라앉은 눈으로 말했다. 낮은 목소리에 놀라울 정도의 예민함이 섞여 있다. 히스는 곁눈으로 제 상전을 쳐다보았다.
“케이든.”
“이런 식으로 막무가내로 나오겠다면, 노프탈은 더는.”
“강한 군대, 넓고 깊은 지지 세력, 최고라 칭송받는 마력과 무술.”
라자르가 낭랑하게 읊었다.
“그런 것만으로 너를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해? 정말?”
붉은 눈이 댕글 돌며 미묘한 황금빛을 내뿜었다.
“그건 당신 부모도 가졌던 건데 결국 그렇게 쉽게 죽임을 당하지 않았나.”
“됐고.”
케이든이 천천히 검을 빼 들었다. 굳이 빠르게 뽑지 않았는데도, 누구도 쉬이 반응하기 어려운 압도감이 있었다.
“로하나는 이 모든 것에서 빠진다.”
담담한 얼굴은 한 발짝 더 내디디면 곧 폭발할 듯 위험했다. 날리는 눈발에 은발이 반짝였다. 짙은 흑안이 짐승의 것처럼 번뜩였다.
“이제부터 너희도 공식적으로 우리와 적이 될 모양이군.”
라자르가 한숨을 폭 쉬었다.
“안타깝네.”
낭랑한 목소리를 끝으로 얼어붙은 폭포 위에 앉은 소년은 사라졌다.
*
“빌어먹을.”
“무슨 불편한 점이라도…….”
초조하고 불쾌한 기색이 역력한 케이든에게 산장 주인이 곤란한 목소리로 말했다. 히스는 형식적인 미소로 그를 돌려보냈다.
늘 머무는 산장은 작지만 견고했고 따뜻했다. 장작 타는 냄새에 화로에서는 감자수프가 익어 갔다.
얼음을 털어 낸 망토와 부츠는 두꺼운 카펫 위에서 말라 갔다. 무스탕으로 만든 소파에 앉은 케이든은 뜨거운 술잔을 들이켰다.
“눈보라가 너무 심해. 내일 동이 터야 돌아가겠어.”
히스의 말에 케이든은 미간을 구겼다.
<내일이요?>
눈이 동그래지며 놀라던 로하나의 얼굴이 훤했다. 겨우 오늘 아침의 일인데 한참 전의 일 같았다. 하필 이럴 때 R. D.를 만나러 오게 된 것부터가 거지 같은 일이었다.
라자르라는 존재가 보름이 아니면 나타나질 않으니 어쩔 수 없었지만.
케이든은 쯧, 하고 조용히 혀를 차며 눈을 감았다. 히스는 그런 케이든을 빤히 쳐다보았다.
“빨리 못 가서 그렇게 아쉬워?”
그 시선을 의식했는지 케이든이 인상을 조금 썼다.
“황제가 내가 없는 내 집에 있는 건 불편하군.”
히스가 눈을 가늘게 뜨다 이내 심각한 표정을 했다. 그동안 묻지 않고 넘어가려고 했지만, 이제는 물어볼 시간이었다. 로하나를 두고 R. D.와 이렇게까지 반목하겠다는 진짜 이유.
“이제 털어놓아.”
케이든은 술잔에서 입을 떼고 히스를 돌아봤다. 히스는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며 계속하라는 듯 턱을 까딱했다.
“우리 정리 좀 하자.”
잠시 침묵이 흐르고, 장작 타는 소리만이 방을 채웠다.
“말해 주지 않으면. 나도 네가 이 정도로 R. D.를 버리는 이유를 마땅히 이해할 수가 없어.”
케이든은 말없이 잠시 히스를 바라보았다.
“왜 황궁으로 돌아갔던 거야?”
깊은 한숨을 쉬며 머리카락을 쓸어넘긴 케이든이 팔걸이에 팔을 걸쳤다. 날카로운 콧대에 깊은 그림자가 졌다.
케이든이 술을 한 모금 마셨다.
“과격해진 R. D.가 오렐리아를 기회로 삼고 무모한 행동을 할까 봐 확인해 봐야 했어.”
“그래서 그때 라자르한테 들른 건가?”
케이든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라자르가 나한테 했던 말이 있어.”
장작이 빨갛게 타고 있었다. 분노가 일렁이는 목소리는 혼잣말하듯 담담했다.
“‘신경 쓰이는 사람’이 위험할 거라고.”
히스의 눈썹이 움찔했다.
“신경 쓰이는 사람이 위험하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네가 찾았던 건 로하나 하노버였잖아?”
케이든은 말을 너무 많이 했다 싶었는지 입을 굳게 다물었다. 히스는 케이든이 저렇게 입을 다물면 다시 열 확률이 거의 없다는 걸 오래 봐 온 친구로서 알고 있었다.
그래도 어떻게 만난 적도 없는 로하나 하노버가 신경 쓰일 수 있겠는가. 히스는 미간을 좁혔다.
“본 적도 없는 사람을 어떻게 신경 써? 오렐리아를 찾은 거야? 아니면 바르디? 로하나가 그 둘 근처에 있을 테니까?”
히스는 중얼거리다가 다시 정정했다.
“바르디 황태자라면 네 성격에 그냥 바로 바르디가 어디 있는지 물었을 것이고.”
장작불이 케이든의 옆얼굴을 비췄다. 날카로운 눈매에서는 표정이 읽히지 않았다. 넓은 어깨가 큰 의자에 꽉 차고도 넘쳤다.
“그럼 오렐리아였다는 얘기가 되네.”
겉으론 아린족 양녀였던 오렐리아를 동부의 사람들은 대부분 가까이하려 하지 않았다.
물론 오렐리아 쪽에서도 카르크 출신이면서 마력을 전혀 다루지 못하는 것 때문에 카르크족과 영 가까워질 생각이 없기도 했었다.
덕분에 히스 정도의 최측근을 제외하고 대부분은 오렐리아와 케이든이 연인처럼 가까운 사이라고 오해하기도 했다.
일단 오렐리아가 케이든에게서 쉽게 떨어지지 않았고, 케이든도 완전한 외톨이 상태인 그녀를 끝까지 외면하진 못했으니까.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
“뭐가.”
케이든이 다리를 꼬며 이마에 손을 짚었다. 더는 얘기하지 말라는 눈치가 역력했지만 히스도 물러나지 않았다.
“오렐리아가 걱정되어서 그렇게 달려갔다가…… 지금은 대의를 위해 하노버 공작가 공녀와 결혼을 했다, 뭐 그런 거야?”
히스의 질문에 케이든은 말없이 눈을 감았다.
로하나 하노버.
히스는 조용히 오늘 아침 마주쳤던 그녀를 떠올렸다. 케이든이 그녀 주위에서 어떠했는지도.
“라자르에게 그렇게 최종 통보한 건, 기폭제로 레이디가 사용되는 걸 막기 위해서야? 최소한 전쟁은 막겠다는?”
케이든은 보일 듯 말 듯 짧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따끔, 가슴이 욱신거리는 것이 어이가 없어 히스는 아무도 몰래 피식 실소를 흘렸다.
케이든이 정말 오렐리아를 마음에 두는 건가 하며 조금 편안해졌던 기이한 마음을 무시하면서.
*
해가 다 지고 있었다. 꼬박 하루를 거의 다 보내고 로하나는 천천히 지하 감옥 계단을 내려갔다.
중간쯤 도달했을 때였다. 평상시라면 신경 쓰지 않았을 일이지만 처음 보는 시녀가 인사를 올리며 지나가기에 로하나의 빠르던 걸음걸이가 순간 멈칫했다.
시녀는 노프탈의 옷을 입었지만, 머리 모양은 단정하게 묶어 내린 수도의 모양이었다.
‘사용인들도 엄청나게 늘어났구나.’
이미 황궁군까지 들이닥쳤으니 공작저는 불편하게 북적거렸다.
도착한 입구엔 몇 명의 군인들이 서 있었다. 그 모습에 로하나가 의아해하는데 곧 백금발의 갑주를 입은 이즈가 어두운 감옥에서 막 나왔다.
“마님.”
작은 체구에 단단한 체격인 그녀는 로하나를 보자 좀 더 바른 자세로 섰다.
“별일은 없어?”
“네, 지금 음식을 넣어 준 참입니다.”
로하나가 별말 없이 이즈를 내려다보자 이즈는 꼿꼿한 등허리만큼이나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 됩니다.”
“응?” 하고 되묻자 이즈가 이미 다 안다는 눈을 했다. 포기한 로하나는 조디의 안부를 물었다.
“앉아 있었습니다. 식사를 주긴 했는데 입에 대는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그렇구나.”
“남동생이신 브란드 하노버 영식께서 오신다고 들었습니다.”
이즈가 허스키한 목소리로 말했다. 로하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반가워야 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왜 반갑지가 않을까.
로하나는 짧은 숨을 내쉬었다. 하얀 입김이 나왔다.
“이즈, 그럼 이거라도 전달해 줄 수 있을까.”
“이게 뭡니까.”
이즈가 손을 내밀었다.
“조디한테 좀 전해 줘.”
이즈는 받아 든 쪽지를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전하껜 비밀입니다.”
고개를 가로저으니 백금발의 단발이 짧게 흔들렸다.
로하나의 눈에 케이든과 마찬가지로 가죽 장갑과 갑주를 입은 이즈가 보였다. 그러자 치렁치렁한 드레스가 갑자기 답답했다.
“그럼 부탁해.”
이즈가 깍듯이 인사를 올리자 로하나도 발걸음을 돌렸다.
계단을 오른 후, 본관으로 걷는 복도 너머로 새벽에 케이든과 히스가 달려 나간 길목이 보였다. 로하나는 잠시 그 길로 걸어 나가 바위에 기대섰다.
눈발이 강하게 날리고 있었다.
원작에는 없었지만, 그녀가 정말 마력을 쓸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렇지 않을 때에 비해서 절대적으로 생존에 유리해진다.
만약 바르디 말대로 케이든이 정말 하노버를 이용하기 위한 수단으로써 그녀를 취했고, 그가 정말로 그녀를 원작대로 결국 해치고자 한다면.
케이든이 그녀에게 굳이 아는 척하지 않는 것도 어쩌면 그녀가 스스로 가지고 있는 마력을 자각하는 것을 막기 위함일 수도 있었다.
‘아무리 외로웠어도 그렇지.’
로하나는 목에 뭔가 울컥 올라오는 것을 무시하며 중얼거렸다. 애써 두근거리는 가슴을 도닥였다.
“괜찮아.”
혼자이기로 했었다. 인생을 두 번 살면서 그 간단한 진리를 또 헷갈릴 수가 있는가.
한심하고 부끄럽기 짝이 없었지만, 아직 살아 있으니 괜찮다고 생각하며 숨을 길게 내쉬었다.
조디의 배후까지 처단한다. 스스로의 능력을 찾아낸다. 그러니까 스스로를 책임진다.
인생에서 할 일은 늘 그거 하나인데.
로하나는 매운바람에 시린 눈을 깜빡였다.
남들에게 쉬운 그 하나가 왜 이렇게 힘든 것인지 몰랐다. 로하나는 조용히 도서관으로 향했다.
*
눈보라가 멈추자마자 새벽같이 달렸지만 케이든과 히스는 동이 트는 아침이 되어서야 겨우 도착했다.
평상시보다 유난히 말이 없는 히스가 좀 의아했지만 케이든은 그것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이즈와 갈레드의 보고를 받아야 했지만 걸음은 다른 곳으로 향했다.
“전하.”
인사하는 사용인과 군인들을 무시하며 긴 다리는 한달음에 제 방으로 달려갔다.
문 앞에 갈레드가 있어야 했는데 아무도 보이지가 않았다. 케이든은 미간을 좁히며 눈에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응접실은 쥐 죽은 듯 조용하고 깨끗했다.
뭔가 이상했다.
성큼성큼 넓은 보폭이 급해졌다. 거칠게 문을 젖히자 단정하게 정리된 방 모양새가 눈에 들어왔다. 침대는 사용한 흔적이 없이 깨끗했다.
로하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