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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죽일 흑막과의 계약결혼-49화 (49/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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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 그녀의 몸이 그대로 단단한 벽으로 몰아붙여졌다.

한 손을 벽에 짚은 채, 여전히 남은 한 손으론 로하나의 팔목을 쥔 바르디의 눈에 형형한 분노가 일렁였다. 본심을 숨기는 미소가 서로 부딪쳤다.

“로하나.”

바르디가 밭은 숨을 내쉬었다. 로하나는 평온하고 담대한 얼굴로 그를 올려다봤다.

“말조심해.”

똑똑.

그때였다. 당장에라도 터질 듯한 긴장을 뚫고 노크 소리가 들렸다.

“폐하, 공작 부인께 급한 전갈이 있다고 합니다.”

시종의 떨리는 목소리가 침묵을 깼다. 갈레드였다. 짙은 갈색 곱슬머리를 가진 그는 일전에 수도에서부터 파인체이서까지 이즈와 함께 다니던 자였다.

“무슨 일인데.”

바르디가 손에서 힘을 풀며 물었다. 로하나는 놓인 팔목이 얼얼했다.

“수도에서 브란드 하노버 영식의 전갈입니다. 아주 급하다는 전언이라 바로 전서구를 통해 답장을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바르디가 눈썹을 치켜떴다.

“그렇군.”

로하나는 경멸을 감추려는 노력도 하지 않고 몸을 돌려 나갔다.

*

새빨간 태양이 산허리에 걸쳐져 동쪽에는 이미 밤이 내려앉고 서쪽에는 아직 밝은 하늘이 장관을 이루고 있다.

어느새 침엽수림도 사라진 산에는 기암괴석으로 깎아지는 절벽이 이어졌다.

얼음이 보석같이 반짝여 보기만 해도 서늘했지만 중간중간 피어난 새하얀 들꽃은 얼음 온도를 가늠할 수 없게 했다.

훨씬 낮아진 온도에 하얀 입김이 흘러나왔다. 그때,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오랜만이야.”

어린 남자아이의 목소리였다. 선이 고운 얼굴이 험악하게 굳었다.

“둘 다 반가워.”

세월이 흐르지 않는 자.

R. D.의 수장, 라자르였다.

빛이 빨려 들어갈 것같이 검은 머리카락에 케이든이나 히스의 반밖에 오지 않는 키. 아이답게 크고 동그란 눈에, 귀여운 인상과는 달리 붉은 눈빛은 긴 세월을 담고 있었다.

“뭐 하는 거지? 샹들리에부터 폭격에, 파인체이서까지.”

“성격이 너무 급해. 이런 걸 보면 망설이는 스타일 같지 않은데…….”

사실은 항상 망설이지, 하는 무언의 목소리가 케이든을 불쾌하게 했다. 붉은빛이 스치는 기묘한 금빛이 남자 둘을 훑었다.

“그나저나 오랜만이야.”

소년이 말간 표정으로 명랑하게 말했다.

“나와 합의도 없이 내 아내에게 이렇게까지 해도 된다고 누가 허락했는지 모르겠네. 노프탈을 적으로 돌리고 싶나?”

소년의 인사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케이든이 질문을 바꾸었다. 천진난만하던 소년의 얼굴이 조금 가라앉았다.

“케이든, 당신이 제국의 황권을 위해서 하노버 공작가와 결혼 동맹을 맺었다는 이야기는 아주 훌륭했어.”

라자르는 얼어붙은 폭포 위에 풀싹 뛰어 올라가 앉았다. 얼음을 뚫고 난 이름 모를 하얀 꽃을 쓰다듬는 손길이 부드러웠다.

“그럴싸하기도 해. 그런데 미안하지만, 외교니 정치니 그런 거로는 부족해. 아무것도 안 달라질 거야.”

적안이 무심하게 두 남자를 응시했다.

“그래서 ‘하얀 새’를 보냈나? 본때를 보여 주려고?”

히스의 질문에 라자르가 아쉬운 듯 한숨을 폭 쉬었다.

“아아니, 그건 우리가 아니지. 땅도 미쳐 날뛰고, 하늘도 미쳐 날뛰고. 그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나도 못 하는 일이라고. 이게 뭘 의미하는지 정말 모르겠어?”

케이든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마주친 라자르의 눈에는 오랜 노인의 충고 같은 호소력이 있었다.

카르크족의 수준을 넘어선 뭔가가 시작되었다. 그간 마물을 다스릴 수 있는 마력자의 씨를 말린 것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될지도 몰랐다.

“당신 아버지는 잘 알고 있었어. 전쟁은 피할 수도, 미룰 수도 없는 일이라는 걸.”

라자르가 아쉬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히스의 미간이 깊게 구겨졌다.

“아무튼 우린 이제 더는 미룰 수가 없어.”

“하노버 공작가의 딸을 죽이는 게 얼마나 복수가 된다고…….”

“복수라니, 우리가 그런 유치한 짓을 할 리가 있어?”

라자르가 실망했다는 듯 히스의 말을 자르며 입을 뿌, 하고 내밀었다.

“복수가 아니군.”

케이든이 냉정하게 말했다.

“아니야.”

라자르가 명랑하게 말했다.

“좋은 기폭제지. 아린족은 로하나 정도의 인물이 죽으면 난리를 칠 거고…… 카르크족은 그 탄압에 드디어 더는 못 참고 들고일어날 거야.”

케이든은 라자르의 붉은 눈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틀린 말도 아니었지만 뭔가 마음에 걸렸다. 그것이 뭔지 콕 집어 말할 수는 없었지만.

‘그런데 굳이 로하나를 기폭제로 써야 한다고?’

질문함과 동시에 케이든의 뇌리에 로하나의 어린 얼굴과 첫 기억이 스쳤다. 자신이 했던 말도.

<절대 아무한테도 들키지 마.>

그때로서는 드레고리와 중앙 수도의 황실 강경파가 걱정돼서 한 말이었다.

소녀는 자기에게 어떤 능력이 있는지, 그것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고 있는 것 같지 않았으니까.

‘라자르가 로하나의 능력을 알고 있다면.’

케이든이 미간을 더욱 좁혔다. 모르는 것이 없는 자, 시간에 영향을 받지 않는 자, 그게 바로 라자르였다.

‘순수 인간 중에도 마법을 사용하는 사람이 있다는 게 걸린 건가.’

붉은 눈이 빤히 케이든을 바라보았다.

“마법의 승리를 위해.”

라자르의 소년 목소리가 얼음 계곡에 울려 퍼졌다.

“그녀가 빨리 죽어 줘야 해.”

웃고 있는 입과는 달리 반짝이는 홍안은 조금 슬픈 빛을 띠었다.

“정말 미안하지만.”

*

“죄송합니다, 마님.”

도서관으로 빠르게 걷는 로하나에게 갈레드가 투박한 목소리로 사과했다.

“그래도 다른 핑계가 떠오르질 않아서. 그나마 급하다고 해야 빌어먹을 황궁군이 문을 열겠더라고요.”

“그래.”

갈레드는 가죽조끼의 주머니에서 작은 편지를 꺼내 전했다. 내용은 단 세 줄로 간단했다.

<보고 싶은 누님, 수도의 상황이 좋아져 안부를 여쭙고자 찾아뵈려 합니다. 곧 뵙겠습니다.>

로하나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분명 아끼는 동생이었는데 왜인지 많이 반갑지는 않았다.

도착한 도서관에서는 시리율이 조용히 정리하고 있었다. 갈레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다혈질인 그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다친 덴 없어?”

로하나의 질문에 시리율은 빨개진 눈을 비비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어떻게든 막았어야…….”

“군인이 그렇게 밀고 들어오는데 어떻게 막아.”

마구 헤집어 엉망이 된 도서관을 시녀와 시종들이 말없이 정리하는 소리가 침묵을 채웠다.

“죄송합니다.”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한 시리율은 서둘러 흐르는 눈물을 훔쳤다. 전시도 아닌데 자택에 군인을 풀어놓지 않는 건 기본 예의였다. 정도를 넘어선 건 바르디였다.

로하나는 시리율을 창가로 불렀다. 차가운 창밖으로 눈발이 꽤 많이 날리고 있었다.

“그 샹들리에 고리는 언제 조사했어? 조디라는 걸 알고 있었어?”

시리율의 청록색 눈이 당황한 듯 흔들렸다. 황제의 군인들 앞에서만큼이나 뻣뻣하게 긴장했다. 그제야 로하나는 제가 이런 말을 할 위치가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나한테 얘기하기 곤란하구나.”

시리율의 큰 눈에 다시 눈물이 그렁그렁 고였다.

“내가 하노버라서?”

잠시 침묵이 흘렀다. 로하나는 브란드가 했던 경고를 떠올렸다.

<그 사람, 궁에 들어오는 관문마다 이상한 질문을 했어.>

브란드는 그때 그 말을 내뱉자마자 후회하는 눈치였다.

<무슨 말?>

<그러니까 조심해, 누나. 정말로.>

<뭔데 그래?>

<로하나 공녀가 어디 있느냐고 묻더래. 하노버 관부터 연회장 지키던 경비경한테도.>

그러고 보니 대수롭지 않게 넘겼던 바르디의 말도 떠올랐다.

바르디는 카르크족 출신의 사람들이 ‘다르다’고 했다. 원작을 보아도 그건 알 수 있었다. 확실히 그들은 앞뒤가 다르고 평화를 위협하는 자들이었다.

로하나는 바르디의 목소리가 다시 떠올랐다.

<굳이 위기에 빠뜨린 후에 구해 내고…… 시선을 돌려서 증거품 탈취까지. 치밀해. 케이든다워.>

가슴이 답답했다.

R. D.도, 카르크도 마력을 쓰는 자들이었다. 케이든은 결국 그들과 반역을 일으키는 남자다.

필요 때문에 전략적으로 옆에 둔 여자이지만 그도 뒤늦게 과거의 일을 기억해 내서 잠시 감정이 어지러운 걸까.

왜 그때 그의 머리카락은 흑발이었을까.

누가 그를 다치게 했을까.

그것에 의문을 가졌을 때부터, 그녀도 그 잘난 감정에 휘둘린 셈이었다. 로하나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들키지 마.>

‘잠깐만…….’

순간 로하나의 머릿속에 그가 남겼던 말이 스쳤다. 그때는 저를 본 것을 들키지 말라고 한 건가 싶었다. 그런데 최근 눈으로 본 ‘마력’을 생각해 보니.

‘고작 여덟 살짜리 여자아이의 임기응변이 낫게 할 상처가 아니었어.’

그건 의사가 아니어도 알 수 있었다.

‘내가 마력을 부렸다고? 로하나 하노버가?’

말이 되나, 그게? 로하나는 인상을 썼다.

“마님.”

시리율이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괜찮으신가요.”

어쩔 줄 모르는 소녀를 앞에 더 두고 있기는 그래서 로하나는 미소를 지었다.

“시리율, 편지 쓸 것 좀.”

시리율은 머리가 어지럽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로하나는 단숨에 편지를 써 내려갔다. 우선 급한 일부터 먼저 해결해야 했다.

편지는 수도의 ‘세인트 헬라나 보육원’ 앞으로 보내는 것으로 조디 이름으로 후원하는 사람, 또는 조디가 정기적으로 방문하는 사람이 있는지 물었다.

“갈레드, 정말 급한 전갈이야.”

갈레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씩 날리던 눈발이 더더욱 거세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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