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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흑마가 거친 숲 바닥을 깊게 파헤치며 빠르게 달렸다. 침엽수가 빽빽한 겨울 산은 갈수록 울창해지고 험해졌지만 두 흑마는 전혀 느려지는 기색이 없었다.
산새가 요란한 소리에 맞춰 날아올랐다.
“잠깐.”
앞서가던 케이든이 급하게 말을 세웠다. 뒤쫓던 히스도 서둘러 멈췄다.
이상했다. 야트막한 언덕길에 불과했던 곳이 지금은 깎아지른 계곡으로 변해 있었다.
히스가 조금 의아해하다 이내 케이든의 표정을 보고 상황을 파악했다.
“또 많이 달라졌어?”
땅은 최근에 파인 듯 젖은 흙이 드러나 있었다.
“네가 이런 걸 최종 보고한 게 언제였지?”
“오렐리아가…… 수도로 떠날 때였으니 가을 무렵에?”
케이든은 히스가 그때 가져왔던 보고를 떠올렸다. 그때랑 지금은 또 달랐다.
“또 달라?”
“응. 그땐 동북쪽에서 남서쪽으로 가르는 언덕이 생겨 있었던 건데.”
“지금은…… 북에서 남?”
“계곡으로 바뀌어 있군.”
“아무래도 그 ‘하얀 새’도 그렇고.”
“봉인이 보통 백 년이라는 소문이 있었는데…….”
케이든이 심각한 목소리로 말했다.
“소문이 아닌 모양이야.”
마물이 직접 움직이기 시작했다. 카르크족에 있어서 희소식일지, 아니면 오히려 그들조차 이들을 통제 못 해 모두가 큰일이 날지. 소실된 마법 관련 기록 때문에 아무것도 확실한 건 없었다.
“서두르지.”
“이미 한나절을 달렸어.”
히스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제아무리 그라도 체력이 달렸다. 겨울 날씨에도 하늘빛 머리카락이 땀에 젖어 있었다.
“조금만 쉬자, 죽겠어. 너도 내 나이 돼 봐라.”
케이든도 허리에 손을 얹고 잠시 숨을 내쉬었다.
“그래.”
서리가 낀 낙엽이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내며 부스러졌다.
대충 나뭇등걸에 걸터앉은 히스가 추운데도 땀이 난 청회색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새하얀 얼굴에 정오의 빛이 내리쬐었다.
“그나저나 어디 가는지는 왜 굳이 얘기하지 않은 거야?”
“R. D.를 지금 보러 간다고 해야 했다고?”
케이든이 마른기침을 하며 히스를 바라보았다. 히스가 어깨를 으쓱했다.
“조디는 로하나가 아끼던 사람이야. 그 조디의 상관 격인 R. D.를 원망하고 있는 사람한테 지금 그들을 보러 간다고 하면.”
히스가 던진 육포를 받으며 케이든이 말을 이었다.
“참으로 얌전히 성에서 기다리겠다.”
그 말에 히스의 입 끝이 조금 올라갔다. 오렐리아 납치 사건 때 브란드가 있는 곳까지 혼자 말을 타고 왔던 그녀가 떠올랐다.
케이든은 사람 보는 눈이 정확한 편이었다.
“그래도 알려 주지 않는 것을 원치는 않을 텐데.”
직접 움직이고야 마는 사람이 있었다.
히스가 아는 사람 중에는 케이든이 그게 가장 심했는데, 로하나 하노버도 그에 못지않다는 것이 연배가 있는 그의 눈에는 보였다.
“이만 갈까.”
“어차피 오늘 안에 가긴 힘들어.”
히스가 무리라며 느릿느릿 일어났지만 케이든은 이미 말에 올라타고 있었다. 장갑을 끼고 이미 출발하는 그를 보며 히스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
“마님, 저를 부르셨다고요.”
창가에 서서 기다리던 로하나가 뒤를 돌아보며 앉으라는 손짓을 했다.
여기에서 그나마 조디랑 가장 친했다는 마리는 저한테까지 무슨 추궁이 들어올지 두려운 눈치였다.
“마리, 뭐 좀 물어볼게.”
마리가 아주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평상시의 당찬 모습은 간데없었다. 조디의 일이 어떤 방식으로든 그녀에게도 두려움을 심은 것 같았다.
“혹시 조디에 대해서 아는 대로 이야기해 줄 수 있을까?”
마리는 조금 인상을 쓰며 기억을 더듬는 듯 위를 쳐다보았다.
“글쎄요……. 조디는 늘 밝고 말이 많았는데, 정작 제 얘기는 한 적이 없어서…….”
로하나가 조금 실망하는 사이 아, 하는 눈을 한 마리가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매달 음식을 잔뜩 가지고 나갔었는데. 아……. 원래 그러면 안 되지만 저희 식자재 처리를 할 때…….”
“그런 건 상관없어. 혹시 어디로, 누구한테로 가져갔는지 알아?”
“세인트 헬레나 보육원이요. 그곳 출신이라고 했던 것 같아요.”
로하나는 눈을 빛냈다.
“고마워.”
그때 갑자기 요란한 소리와 함께 뭔가가 깨지는 소리가 났다.
“안 됩니다!”
계단 아래 멀리서 여자의 높은 목소리가 들렸다.
“여긴 노프탈 개인 소유라고요!”
로하나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또 무슨 일인지 머리가 아프고 심장이 두근거렸다. 길디긴 나선 계단 저 밑, 도서관 앞에서 소란이 일고 있었다.
사용인과 군인들을 지나쳐 도착한 도서관 안에서는 부디에르의 아들인 실비우스가 시리율과 실랑이를 펼치고 있었다.
“이게 뭡니까.”
공작 부인이 나서자 둘이 잠시 멈추어 섰다. 실비우스의 녹안이 로하나를 잠시 훑듯이 응시했다.
“공작 부인.”
“마님, 저자들이 함부로 물건을 반출하고 있어요.”
시리율이 새빨개진 얼굴로 말했다. 적잖이 놀란 듯해 보였다.
“이게 무슨 일입니까.”
로하나의 낮은 목소리가 호통을 쳤다.
“내가 시켰어.”
그때 들려온 목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한쪽으로 쏠렸다.
“폐하.”
실비우스가 과장되게 허리를 숙이며 황제 옆으로 달려가 냅다 무언가를 건넸다. 황제는 내용물을 확인하더니 입 끝을 끌어 올려 미소를 지었다.
“로하나, 따라와.”
손을 까딱하는 황제의 손짓에 모두의 시선이 로하나에게로 쏠렸다.
“마리, 시리율을 잘 부탁해. 괜찮아.”
로하나는 시리율에게 눈짓으로 인사를 한 후 황제가 머무는 ‘별채’라기엔 그새 너무나 화려해진 별관에 들어섰다.
“앉아.”
바르디의 말에 로하나는 하는 수 없이 자리에 앉으며, 정말 이걸 안 듣고 무시할 수는 없는 것인지 진지하게 고민했다.
“무슨 일이시죠. 도서관에서 아까 그 소란은 또 뭡니까. 장성한 성인 남자가 아직 어린 소녀를 힘으로 제압하다뇨.”
로하나의 쏘아붙임에 바르디는 비틀린 미소를 지었다.
“좀 괜찮아?”
로하나는 말없이 황제를 바라봤다.
“네가 유난히 아끼던 아이잖아.”
로하나가 천천히 눈을 깜빡이자 바르디는 어떤 봉투에 든 물건을 툭 올려놓았다.
넓은 테이블 위에 노란 봉투가 놓였다. 무거운 것이 든 듯 둔탁한 소리가 울렸다.
“뭐예요?”
“열어 봐.”
바르디가 턱을 괴며 말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내며 봉투에서 꺼낸 것은 낯선 금속 조각이었다. 무겁고 둔탁한 강철의.
“뭔지 알아보겠어?”
순간, 로하나는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두통을 느꼈다.
샹들리에 조각.
“샹들리에 조각.”
바르디의 목소리가 로하나의 머릿속 소리를 따라 읊었다.
“마력 흔적이 있다는군. 뭐 딱 봐도 억지로 구부러진 모양새가 누가 봐도 자명하지만.”
바르디가 입을 열었다. 적갈색 머리칼이 반짝였다.
“케이든이 빼돌려 놨던 모양이야.”
로하나가 고개를 들었다.
“이상하지 않아?”
바르디가 책상에 걸터앉으며 몸을 기울이자 로하나와 지척으로 가까워졌다. 새파란 눈에 뭐라 할 수 없는 열의가 일렁였다.
“모든 게 너무 딱 맞아떨어지잖아.”
로하나는 구부러진 조각을 매만졌다.
“케이든이 노프탈에서 수도에 도착하는 그 순간에 샹들리에가 그렇게 떨어졌고, 엄청나게 놀라운 능력으로 그가 널 구하고.”
로하나가 미간을 좁혔다.
“굳이 위기에 빠뜨린 후에 구해 내고…… 시선을 돌려서 증거품 탈취까지.”
바르디의 목소리에는 잔잔한 분노가 일렁였다.
“치밀해. 케이든다워.”
“마력의 흔적이라면…… 누가 했는지도 알 수 있나요?”
처음으로 로하나가 흥미를 보이는 것에 바르디는 반가운 미소를 지었다. 내려다보는 눈이 짙었다.
“아니, 열심히 지워서 그런지 그것까진 쉽지 않겠더라고.”
“그럼 누구 행위인지 정확히 적시할 수는 없겠네요.”
로하나의 말에 바르디의 눈썹이 움찔했다.
“로하나.”
목소리가 나지막했다. 가까이 다가온 손이 올라와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 듯 쓸지 않듯 스쳤다.
어째서 상처받는 목소리를 하는 거야.
바르디는 설마 하는 마음에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설마 흔들려?”
그녀의 귓가에 속삭이자 로하나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계약일 뿐인 거 아니었어?”
잠시 숨이 멈추어졌다. 황제는 잠시 심각했던 얼굴을 지우며 금세 피식 웃었다.
“뭘 그렇게 놀라. 누가 봐도 훤한 사실을 두고.”
황제가 책상에 걸터앉은 채 로하나를 내려다보았다. 푸른 눈이 찬찬히 기억을 더듬고 있었다.
“계승식 때 너도 케이든과 약혼한 줄 몰랐잖아, 그 순간까지도. 내가 그것도 눈치 못 챌 거라고 생각했어?”
로하나는 황제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놀랐나 보네. 하긴, 우리 아버지처럼 안 되려고 바보 놀이를 하긴 했지. 난 케이든처럼 이런 자기만의 왕국에서 제멋대로 클 수가 없었으니까.”
로하나는 그의 입에서 제 부친의 이야기가 나온 것에 조금 놀랐다.
바르디의 부친은 어려서부터 병약해 결국 황태자 자리도 받지 못하고 병사했다.
병약한 것보다는 포악하고 악독해 초대 황제의 눈에서 벗어났다는 것이 황태자가 되지 못한 이유였지만 그건 원작을 아는 로하나만이 알 정도로 극비였다.
“로하나.”
바르디의 목소리가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비뚜름한 미소가 입에 걸려 있었다.
“정말 괜찮아?”
겨울 햇살에 붉은 적갈색 머리칼이 반짝이고 새파란 눈은 그에 대비되어 기묘한 느낌까지 들었다.
“상황이 이렇게 불안하고 무서우니 당신이 케이든한테 흔들리는 것도 이해가 돼.”
로하나의 눈이 조금 가늘어졌다.
“그렇지만 그들은 우리와 달라.”
바르디의 목소리만큼은 그녀가 황태자 정혼자 시절이었을 만큼 부드럽고 다정했다.
“당신이 날 얼마나 원망하든 상관없어. 당신에게 내가 죄인인 것 인정해. 마음껏 미워하고 마음껏 경멸해.”
속삭이는 목소리에는 절박함까지 배어 나오는 듯했다.
“난 네가 안전해야 한다고 생각해.”
로하나는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조금 흘러나왔다. 조금 더 솔직했으면 진짜 아하하 소리 내서 웃었을지도 몰랐다.
“말씀은 감사하지만, 전 안전합니다. 제 남편은 제국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을 뿐이고요.”
로하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희 부부 사이의 감정까지 굳이 걱정하지 말아 주셨으면 좋겠어요.”
순간, 바르디의 눈빛에 강한 분노가 번뜩였다. 순식간에 낚아채진 로하나의 팔이 고통스럽게 잡혔다. 여유를 가장한 얼굴과는 달리 황제의 손엔 핏대가 섰다.
“저를 두고 오렐리아에게 가셔 놓고 저에게 또 이러시면…….”
아팠지만 절대 티를 내지 않는다. 그래 줄 생각은 없었다.
“잘못하면 사촌 형이 좋아하는 장난감 탐내는 어린애처럼 보이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