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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하나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여긴 어쩐 일이에요?”
오렐리아의 물음에 내가 묻고 싶은 말이라는 소리가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꾹 참은 로하나가 오렐리아를 쳐다보았다.
‘이상해.’
조디는 분명 뭔가를 말하려고 했다. 일부러 지른 불이 맞아.
‘왜 갑자기 말을 하다 말지?’
새하얀 망토가 어두운 지하에서도 반짝였다. 황후 뒤로는 경호병이 못 되어도 스물은 되어 보였다.
“생각해 보니, 이 친구한테 나도 볼일이 있어서.”
“무슨……?”
“샹들리에 사건.”
오렐리아의 황금빛 눈이 반짝였다.
“그때 나도 위험했던 거 기억하지?”
가늘고 여유 있는 목소리가 로하나를 불안하게 했다.
샹들리에가 아슬아슬하게 떨어지긴 했었다. 오렐리아가 오르간을 연주하겠다고 계단을 딛고 올라가는 그 순간 떨어졌으니 말이다.
“그래서 말인데, 우리 수도에서 이 아이를 먼저 조사해야겠어.”
경호병이 움직이는 걸 로하나가 손을 세워 막았다.
“뜻은 알겠지만, 아직 저희 사건 먼저 조사 중입니다. 차후 공식적으로…….”
“공식은 무슨.”
오렐리아가 말을 끊었다.
“내가 황후고, 내 명령대로 공작 부인인 당신은 따르면 되는 거야.”
로하나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제국의 법도라면 그녀가 훨씬 잘 알았다.
사건이 발생한 곳에서 공식적으로 재판이 열리기 전까지 범인 송환은 불가피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원칙적으로 불가했다.
조디는 현재로선 ‘로하나’ 건으로 체포된 상태였으니 여기 소유였다.
“여기에서 황후 폐하께 식견을 자랑하고 싶지 않습니다. 어차피 달리 두실 곳도 없지 않으십니까.”
그리고 그녀의 마음 깊은 곳에서 의문이 피어올랐다. 굳이 황후가 이럴 이유가 있을까?
로하나는 다시 조디를 내려다보았다. 주저앉은 조디의 모습은 이상할 정도로 경직되어 있었다.
아까의 무너진 얼굴은 간데없고 오히려 무표정하게 굳은 얼굴엔 이상한 체념과 알 수 없는 두려움이 섞여 있었다.
본능적인 직감이 경보를 울렸다.
‘오렐리아도 연루되어 있구나.’
“무섭다. 폐하 말씀대로 고지식하고 무서워.”
오렐리아의 목소리에 로하나의 보랏빛 눈동자가 다시 그녀를 향했다.
“케이든도 답답해서 어떻게 살까 모르겠네.”
정말 여러 번 봐주려고 했지만 이제 못 들어 줄 지경이었다.
“황후 폐하.”
음, 하며 대답하는 예쁜 얼굴이 말갛게 미소를 띠고 있었다.
“여기에서 나가 주시죠. 제국의 법도상 황후 폐하같이 고결한 분은 지하 감옥에 출입하실 수가 없어서요.”
케케묵은 법규였고, 황후는커녕 자작 부인도 발걸음을 하지 않는 지하 감옥이라 누가 언급한 적도 없었겠지만.
태연자약, 법도를 빙자한 명령에 오렐리아의 여유롭던 얼굴이 살짝 비틀렸다.
그때, 다시 사람들이 수선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전하.”
사람들 앞에서는 꼬박 존칭을 하는 히스가 말했다.
“케이든.”
오렐리아가 뒤를 돌아보며 해사하게 웃었다.
케이든과 로하나의 눈이 마주쳤다. 기어이, 당신은 예상대로 고집을 피웠군요, 하는 눈빛에 로하나는 건조하게 입을 열었다.
“보시다시피 황후 폐하께서 위험하고 누추한 곳에 격에 안 맞게 나타나셔서.”
로하나의 눈동자가 다시 오렐리아를 향했다.
“법도를 말씀드리던 참입니다.”
오렐리아가 헛웃음을 짓자 케이든이 머리를 쓸어 넘겼다.
“두 분 다 여기에서 우선 나가시죠.”
*
“이게 전부야?”
바르디가 미심쩍은 눈동자로 물었다.
“네, 그렇습니다. 아주 죽을 노릇으로 뒤져 왔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부디에르 후작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실비우스가 옅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보고서에는 ‘조디’라는 아이의 정보를 포함해 하노버 사용인 전체의 정보가 줄줄이 있었다. 구할 수 있는 모든 정보는 구한 모양이었다.
“재산 내역은.”
“여기, 공개된 회계 정보입니다. 내부 정보는 아직 완벽한 수준은 아닙니다…….”
그건 보면 알아. 바르디가 관자놀이를 누르면서 인상을 썼다.
“알았어, 물러가 봐.”
샹들리에 건으로 결정적 증거가 없는 것이 문제였다. 자백을 받아 내면 그만이긴 했지만.
그 증거가 있어야 정확히 ‘카르크 것들’이 다시 우리 ‘아린족’, 그것도 하노버 공작가의 귀한 딸을 해치려 했다는 그림이 맞아떨어지는데.
그때부터 그 결정적인 샹들리에 고리가 없었던 것이 문제였다. 누가 건드렸는지는 알고도 남을 것 같았지만.
“아, 폐하.”
“왜, 또.”
바르디가 신경질적으로 눈을 치켜떴다.
“델클리프 공작과 수하 히스라는 자가 오늘 성 밖으로 나간다는 전언입니다.”
“뭐?”
“비공개로 움직이는 것 같은데…… 뭔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뭔가 이상한 게 문제가 아니라 절호의 기회였다.
“도서관에서 시리율인지 뭔지를 끌어내. 그사이 너는 거길 수색한다.”
바르디가 느릿느릿 말했다.
“반드시 찾아, 그 망할 샹들리에 조각.”
바르디는 그러면서 재산 명세를 들여다보았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을지 몰라도, 케이든이 왕위 계승식에서 소위 ‘폭탄선언’을 했을 때, 그는 로하나의 얼굴을 보았다.
로하나도 같이 놀라고 있었다. 그녀도 몰랐던 부친과 케이든과의 거래가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로하나의 태도는 그 후가 더 이상했다.
<저도 남편 따라가야죠, 노프탈.>
그렇게 태연하게 밝은 얼굴을 할 사람이 아니었다. 나와도 연애로 정혼했으니 밝고 명랑했던 거지, 그렇게 굳이 아무한테나 그렇게 웃을 여자가 아닌데.
‘로하나, 미치지 않고서야…….’
바르디는 산더미 같은 서류를 쳐다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
“공작 부인께서 황후에게 예를 제대로 갖추지 못하는 것 같은데.”
오렐리아가 낭랑한 목소리를 내며 언짢은 표정을 했다.
“공작께서 어떻게 좀 해야겠네.”
오렐리아의 투정 어린 목소리에 케이든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 로하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다른 사람에게 말을 하면서도 시선은 로하나를 향하는 것은 케이든의 버릇이었다.
“부인 말이 틀린 건 없습니다.”
오렐리아의 미간이 좁혀졌다.
“뭐라고요?”
“뭐라고? 하고 하대하셔야 맞습니다. 여러 번 말씀드렸습니다만.”
오렐리아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렇게 굳이 선을 그어야 속이 시원해?”
속삭이는 목소리에 케이든은 고개를 가로젓고는 병사들을 향해 말했다.
“아무도 여기에서 저 여자를 움직이지 못한다. 공작이자 영주의 명이다.”
경호병들이 고개를 움츠렸다.
“이제부터 ‘이즈’를 제외하고는 누구도, ‘누구도’ 들고 나는 것을 금한다.”
몇 명은 행여 눈이라도 마주칠까 시선을 빠르게 돌렸다.
“알아들었나?”
느릿한 경고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태연한 얼굴에는 미소까지 서려 있어 더 살벌했다.
경호병은 어디까지나 경호병. 타 영주의 영지 내에서는 경호 이외의 임무를 할 수 없게 되어 있었다.
케이든은 굳은 얼굴로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형식상 고개를 까딱하고 히스에게 눈짓을 했다.
이제 제법 아침 햇살이 퍼진 하늘이 하얗게 밝아 오고 있었다.
“정말로 지하 감옥에는 이즈 외엔 출입 불가입니다. 당신도 포함이고.”
“케이든.”
“그 정도는.”
어제의 눈빛이 다시 돌아와 로하나는 순간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들어주십시오.”
내려다보는 그의 눈빛이 너무 진득하고 무거워 로하나는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조디는 어떻게 하실 건가요?”
케이든이 냉랭한 얼굴로 로하나의 말을 잘랐다.
“죽어 마땅한 죄를 지은 자입니다. 원칙을 무시할 순 없지.”
살벌한 목소리와 달리 태연한 표정이 아침 햇살을 받아 말갛게 보였다. 그럼에도 로하나는 재차 입을 열었다.
“케이든, 어쩌면 파인체이서의 불은…….”
“아주 잠시 다녀올 곳이 있습니다. 저랑 히스만.”
어느새 히스가 흑마를 데리고 나오고 있었다.
“급한 일이라뇨? 어딜 가시는 거예요, 지금?”
로하나의 질문에 케이든은 조금 난감한 표정을 했다. 히스도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계속 하늘을 확인하고 있었다.
“늦어도 내일 아침까진 돌아올 겁니다.”
“내일이요?”
로하나는 저도 모르게 깜짝 놀라 되물었다.
“그 건은 돌아와서 다시 얘기하죠. 그때까지 조금만 쉬고 계십시오.”
검은 가죽 장갑을 끼며 케이든의 눈이 로하나를 지긋하게 쳐다보았다.
“미안합니다, 이럴 때.”
로하나가 당황한 눈으로 말에 이미 탄 히스까지 올려보다가 다시 케이든에게로 돌아왔다.
“죽일 것까지는 없어요.”
로하나의 말에 들은 척도 하지 않은 케이든이 저 할 말을 마쳤다.
“최대한 빨리 돌아오겠습니다.”
“레이디, 다녀오겠습니다.”
히스의 밝은 목소리에 케이든은 화들짝 놀라 손을 뗐다. 둘은 그 후로 별말 없이 빠른 속도로 시야에서 멀어졌다.
‘내일이라니.’
로하나는 잠시 망연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다시 오렐리아로 생각을 돌렸다.
‘어떻게 해야 하나.’
미간을 좁히며 발걸음을 옮겼다. 차가운 바람 덕분에 머리도 차게 식었다.
‘찾아가서 따진다고 순순히 시인할 사람이 아니야.’
아까 조디가 입을 다시 다문 것을 보아선 조디가 약점이 잡혀 있다는 얘기일 터.
그리고 이런 절체절명의 순간까지 약점으로 남는 것은 생각보다 보편적인 것들이다. 조디의 그것을 찾아야 했다.
<저야 어려서 부모님 모두 돌아가시고 저만 남았어요.>
아는 것이 고작 그 정도라니.
로하나의 발걸음이 느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