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를 죽일 흑막과의 계약결혼-46화 (46/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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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디.”

조디는 그 모습 그대로 앉아 있었다. 로하나는 조디가 머리를 풀고 있는 모습을 처음 보았는데, 그러고 있으니 정말 저랑 닮은 것 같았다.

그리고 누구보다 그 유모를 닮았다.

“좀 어때?”

“그만하시죠.”

조디가 흐릿한 목소리로 말했다. 쉰 목소리는 지쳐 있었다.

“마지막까지 그렇게 착한 척하지 않아도 됩니다.”

조디의 말에 로하나는 흐릿하게 웃었다.

“그래 보여?”

보랏빛 눈에 착잡함이 가득했다.

“그런 거 아닌데.”

조디의 미간이 좁혀졌다.

“전후 사정, 상황, 전부 다 말해.”

단호한 목소리였다. 조디는 그런 공녀를 올려다보았다.

로하나 하노버는 15년을 황태자의 정혼자로 살 때도, 혼란을 지나 델클리프 공작 부인이 되었을 때도, 그리고 이날 이때까지 항상 운이 너무 좋았다.

그게 더 미웠던 것 같기도 했다.

“죽을죄를 지었으니 죽이세요.”

“중요한 참고인인 너를 죽이진 않아.”

로하나의 말에 조디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올려다봤다. 로하나가 천천히 단어를 골랐다.

“누가 뒤에 있는지, 누가 얼마나 어디까지 알고 있었는지도 얘기해. 참작할 수 있게.”

로하나의 가늘고 하얀 손이 창살을 감아쥐었다. 조디는 잠시 그 손을 바라보았다. 독한 척하지만 그녀도 망설이고 있었다.

어떻게든 저를 살려 보고 싶어 하는 것이 훤했다.

그리고 그제야 그녀가 어떻게 칼을 두고 저한테 도박을 걸었는지 알 것 같았다.

‘나도 저렇게 훤히 보였나 보네.’

조디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얘기하면…… 뭐가 달라지나요.”

로하나의 미간이 좁혀졌다.

“얘기하면…… 제 삶이 달라져요?”

“목숨을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모든 것이 달라지지.”

“그만해요.”

조디가 포기한 목소리로 말했다. 로하나는 조용히 입을 다물고 저를 바라만 보고 있었다.

조디의 머리에 케이든이 떠올랐다. 왜인지는 몰라도 절대 그녀 편에 있어서는 안 될 것 같은 그가 그녀의 곁에 섰다.

R. D. 내부에서는 그가 언젠가는 카르크족을 위해 싸울 것이라 믿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도 그렇게 믿었다.

R. D.의 일을 하는 데 있어서, 고작 아린족의 귀족이 위험에 빠졌던 것에 대해 굳이 왜 그렇게까지 펄쩍 뛰었던 걸까.

해고된 지 며칠만에 케이든이 저를 재고용했을 때는 케이든도 R. D.의 편이라 그런가 했는데.

어제 모습을 보았을 때 조디는 로하나는 괜찮을 것이라는 걸 단박에 알 수 있었다. 너무나 당연하게.

“다른 사람한텐 그런 도박 하지 마요.”

조디의 입에서 진심이 흘러나왔다.

“천하의 공작님도 그 정도로 막무가내인 당신 지키는 건 버거울 거야.”

지친 눈동자에는 묘한 평화가 감돌았다.

“왜 당신을 지키려는지 모르겠지만.”

로하나는 가늘어졌던 눈을 감았다.

*

“하노버 공작가요?”

일곱 살에 천애 고아가 되어서 밑바닥 인생을 살았다.

카르크족이었지만 유별나게 머리와 눈동자가 짙고 어두워 심지어 카르크족 빈민 사이에서도 그녀가 갈 곳은 없었다.

고작 세 살 된 동생을 술에 취한 여인들이 돌보는 시설에 겨우 맡기고 구걸하며 사는 인생.

어느 날 밀짚색 머리의 한 남자가 나타나기 전까진 그게 그녀의 삶이었다.

“조디?”

“누구세요.”

“하노버.”

“네?”

“하노버에 관련된 일로 왔다.”

협조하면 언제부터 내려오던 것인지 모를 빚을 탕감해 주고, 돈까지 안겨 주겠다는 거래였다.

“내가 뭘 하면 되는데요?”

“그것까진 벌써 알 건 없고.”

밀짚색의 머리카락을 가진 남자가 말했다.

“마력을 다룰 수 있나?”

“조금은요.”

사실, 제법 다룰 수 있었지만 조디는 왠지 모를 거북함에 애매하게 대답했다.

“이미 어느 정도 수준인지는 알고 왔는데, 제법 겸손하네.”

“근데 죽은 유모의 딸을 그들이 받아들여 주겠어요?”

하핫, 너털웃음에 기름 냄새가 코를 찔렀다.

“그쪽에서 알 일은 없어.”

“그걸 어떻게 알아요?”

여름철이라 손의 상처가 쉽게 아물지를 않아 곪고 있었다. 조디는 상처를 손가락으로 뜯으며 방어적으로 물었다. 이내 들려온 대답은 그 상처보다 더 아팠다.

“애초에 알려고조차 하지 않을 테니까.”

남자가 비릿하게 웃었다. 새 삶을 주겠다는 남자의 목소리는 달콤했고, 그렇게 조디의 공작가에서의 삶이 시작됐다.

“이분이 앞으로 너희가 모실 로하나 하노버 공녀님이시다.”

가끔 스치는 드레고리를 바라만 봐도 잠결에 실수하는 것도, 로하나의 죄로 매를 맞는 것도 시궁창 같은 삶에 비하면 견딜 만했다.

조디가 견딜 수 없는 건 그런 자신을 보며 괴로워하는 로하나였다. 마음껏 원망할 자유도 박탈당한 기분이었으니까.

R. D.의 쪽지는 그녀도 모를 사람들을 통해서 조디의 손에 내려앉았고, 그날은 오렐리아가 로하나를 이끌고 위로 갈 터이니 샹들리에로 사고사를 일으키라는 내용이었다.

그러려고 했는데.

조디의 심장이 조여 왔다. 실수는 긴장에서 비롯되었을까, 망설임에서 비롯되었을까.

무슨 영문인지 울면서 자기를 해고하는 로하나를 보면서는 인연이 여기까지인가 싶어 후련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기어이 케이든 때문에 다시 고용되어 오랜만에 로하나를 만났을 때가 결정적이었다. 그 표정에 딱딱한 조디의 가슴은 엉망이 되었다.

그냥, 로하나가 그러하듯 조디도 그녀가 마냥 반가울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죽을 때가 되면 상념에 젖는다더니.’

그래도 임무 중에 죽는 거니 동생은 괴롭지 않게 살 수 있겠지. 조디는 R. D.가 그 정도 양심은 있다고 믿었다.

그걸로 충분했다.

*

“오늘 이렇게 보여 준 건 케이든에게는…….”

히스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었다.

“케이든도 이미 알고 있군요.”

로하나의 작은 목소리에 히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보려고 하실 테니 안전하게만 하게 두라고.”

그랬구나, 하는 로하나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히스가 말을 이었다.

“그렇게 안 봤는데, 레이디도 은근히 막무가내이시네요. 다신 그렇게 도박하지 마십시오. 사람이라는 게 궁지에 몰리면 무슨 돌발 행동을 할지 몰라요.”

고개를 끄덕이는 로하나를 보며 히스도 옅은 미소를 지었다.

“괜찮으십니까.”

히스가 고개를 기울이며 로하나를 내려다보았다. 로하나가 고개를 들었다. 히스도 케이든만큼 커서 올려다보기 힘들었다.

“네.”

“거짓말 같은데.”

심각한 상황에 맞지 않게 놀리는 말투에 로하나는 피식 웃었다. 히스한테는 사람을 편안하게 하는 특유의 분위기가 있었다.

그래서 그렇게 인기가 많나, 하는 실없는 생각을 하며 히스를 올려다보는데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자객 중에 하노버 공작가에 고용되었던 적이 있는 자가 있었어요. 그래서 조디에게도 사람을 붙였던 겁니다, 바로 어제부터.”

히스의 설명에 로하나는 그제야 이해가 되었다.

“사정이 어떻든 방화범, 암살 시도범이라는 것이 달라지진 않아요.”

로하나의 눈이 침울하게 가라앉자 히스도 마음이 불편해졌다. 그러고 보면 상대는 케이든이 굳이 재고용해 올 만큼 로하나와 각별한 사이였다.

그러니 그 ‘사정’이라는 거에 의미를 두는 로하나가 아예 이해되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입을 열던가요.”

로하나는 고개를 저었다. 대충 묶어 한쪽으로 늘어뜨린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렸다.

늘 완벽하게 치장한 모습에 비해서 훨씬 제 나이답게 어려 보이고, 제 나이보다 훨씬 지쳐 보이는 모습이었다.

“R. D.가 입을 여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무조건 단독 범행으로 끝날 거예요.”

로하나의 눈자위가 어두워졌다. 히스는 조금 걱정스럽게 그런 공작 부인을 내려다보았다.

“저는 슬슬 가 봐야겠네요. 이즈가 늦는군요.”

“어딜 가시나요?”

히스는 잠시 케이든과 R. D.와의 접선을 위해 떠난다는 말을 할까 망설이다 다시 입을 다물었다.

“네, 좀.”

더 이상 설명이 없기에 로하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침 드십시오.”

히스가 불쑥 하는 말에 로하나는 보일 듯 말 듯 한 미소로 답했다. 한숨을 내쉬던 히스가 무심코 생각한 말을 꺼냈다.

“그런데 모든 걸 떠나서 하나가 이상합니다.”

로하나가 눈썹을 들어 계속하라는 표시를 했다.

“왜 굳이 불일까요. 자객까지 동원해 R. D. 짓이라는 걸 천하에 공표한 셈인데…… 저희에게 확실하게 통하긴 어려운 불을 질렀다는 게…….”

그 순간, 로하나의 눈동자가 커졌다.

돌변한 로하나의 표정을 보며 히스가 의아해하는 사이 로하나가 갑자기 다시 지하 감옥으로 뛰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레이디!”

히스는 그런 로하나를 함부로 붙잡아 세우지도 못하고 바짝 뒤따라 붙었다.

군인들이 막아 세우는 건 히스가 뒤에서 손으로 저지한 덕에 길은 쉽게 열렸다.

“조디.”

로하나가 시선을 맞추기 위해 주저앉았다. 차가운 바닥에 드레스 자락이 아무렇게나 퍼졌다.

“왜 불을 질렀어?”

히스가 조금 떨어진 채 둘의 대화를 들었다.

“왜 불을 질렀냐고.”

속삭이는 목소리에 조디는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얼굴이 눈물범벅이었다.

“사실은 케이든을 부른 거지.”

로하나가 들릴 듯 말 듯 속삭이자 조디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R. D.에게 변명할 여지는 두면서, 케이든을 부른 거잖아.”

로하나의 속삭이던 목소리가 조금 격앙되었다. 조디가 입을 열려다 어쩔 줄 몰라 하며 초조해했다. 놀란 눈은 제가 범인인 것을 들켰을 때보다 더 심란해 보였다.

순간, 군인들이 발맞춰 걷는 소리가 지하 감옥을 울렸다.

조디는 열려던 입을 서둘러 다물었다. 이어서 장소에 어울리지 않는 밝은 목소리가 울렸다.

“어머나, 이게 뭐예요?”

조디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평범하디 평범한 보통 사람의 두려움이 뒤엉킨 얼굴에 강한 두려움이 스쳤다.

로하나가 자리에 앉은 채 고개를 돌려 위를 올려다보았다.

“황후 폐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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